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독립, 하셨습니까?] 연재도 어느덧 네 번째를 맞이했네요. 오늘은 패션 사진가 한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패션 사진가' 하면 과장된 환상을 보여주어 잠재된 욕망을 이끌어내고 소비를 부추기는 작업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진가로서의 본업보다 지구환경과 동물복지를 생각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친환경 잡지를 만드는 일에 더 열심인 사진가가 있습니다. 《오보이!》의 발행인, 사진가 김현성 씨를 이은 씨가 만나고 왔습니다. 

패션지, 동물복지와 환경을 만나다, 
《오보이!》 발행인, 사진가 김현성 

한때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이 더 훌륭하고 고상한 삶이라 믿었다. 내가 행복해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존재에게 자신의 이기심으로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하기도 하는데 사실 반려인과 반려동물은 한끝 차이일 수도 있다. 종(種)이 달라도 얼마든지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다. 김현성 편집장은 표정이 그다지 없는 얼굴이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동물이란 존재를 위해 있는 힘껏 살고 있는, 그러니까 행복한 사람이었다. 

동물, 사지 말고 입양해요 

그는 잘 나가는 유학파 포토그래퍼였다. 10년을 훌쩍 넘겨 패션 사진을 찍으며 스튜디오를 차려 실장 직함도 달았고 크게 남부러울 일 없이 살았다. 특유의 감성이 엿보이는 사진과 일에 안달하지 않는 그의 시크한 태도가 도리어 차별화 전략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럭저럭 잘 나가던 어느 날, 삶이 바뀌었다. 남보다 잘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와 생명을 돌보는 일에 대가 없이 자신을 쏟아붓게 됐다. 자식처럼 키우던 개 '먹물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모델과 연예인이 표지를 장식했지만오보이!》의 주인공은 반려동물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잡지도 생겨나지 않았을 테니.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전에는 잘난 척하면서 제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제 인생과 앞길만 위해 살았어요. 상업 사진 찍으면서 제 감성을 팔았는데 자식처럼 키우던 먹물이의 죽음이 (《오보이!》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어요.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제 자식이었거든요. 저보다 일찍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아니까 미리 준비했는데, 그래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힘든 일로만 지나가 버리면 먹물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하게 된 거죠. 갑자기 성자가 된 건 아니지만 이대로 사는 건 무의미하고, 돈 벌어서 땅 사고 건물 짓고 이름 알리는 일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보이!》를 만든 거지요. 욕심이 없어져서 옷도 안 사요. 예전 같으면 인터뷰하는 자리에 옷도 신경 쓰고 나왔을 텐데 지금은 예의만 차리는 정도죠." 

사진가이긴 해도 '찍히는' 일도 더러 있다. 인터뷰하던 날 그는 무늬가 없는 단색 티셔츠에 무채색의 팬츠, 운동화 차림이었다. 최신 유행 아이템을 입지 않아도, 차림이 캐주얼해도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이 격식 아닐까.
    
이렇게 2009년 말에 등장한 무가지 《오보이!》 창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이런 변화는 잡지 시장의 다양화, 양적인 팽창과 수익구조의 악화로 거품이 꺼지면서 무가지가 속속 등장하던 배경에서 시나브로 일어났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동물 복지를 이야기하는 패션 매거진'이라는 다소 급진적(?)으로 보이는 메시지를 담은 잡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 거의 3년 동안 31권을 만들어오면서 그간 공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고, 패션 사진이 단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오보이!》에 나름의 원칙은 있다. (기존의 패션 화보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가죽으로 된 신발이나 소품은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모피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잡지 말미에는 유기동물을 스타가 안고 있는 화보를 실어 분양을 부추긴다. 잡지의 권수가 늘어난 만큼 아무 대가 없이 《오보이!》에 등장한 스타의 수도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톱스타라도 촬영 때는 개나 고양이의 컨디션이 우선이다. 고양이는 특히 예민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화보가 예쁘게 나와야 녀석들이 좋은 곳으로 입양될까 싶어서다.
 
이런 마음으로 만들어서인지 잡지의 인기는 나날이 상한가다. 매월 초 서울 도심 곳곳에 있는 배포처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오보이!》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동나곤 한다. 지난 9월호도 그랬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f(x)의 멤버 크리스탈이 표지 인물로 나온 고양이 특집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10여 페이지가 넘는 화보, 이름난 글쟁이들이 고양이에 관해 쓴 글로 가득 채워져 고양이 애호가 사이에서 구하기 어려운 '희귀템'이 되었다. 잡지는 별다른 꾸밈없이 세련된 디자인으로 패션 리더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화려하고 멋진 것이 다가 아니라는 인식도 심어주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아끼는 것 또한 아주 멋진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물권'이란 단어조차 생경하게 느끼는 이가 여전히 많지만,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유행을 선도하고 남보다 앞서갈 수 있다고 사람들이 공감하는 데는 분명 《오보이!》 같은 잡지와 이효리 같은 톱스타의 영향이 존재한다. 

《오보이!》에 실린 기사와 화보는 누리집에서도 볼 수 있다.

"벌써 3년 가까이 됐네요. 생계를 위해 촬영하면서 틈틈이 잡지 만들고. 한 달에 열흘은 계속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고, 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어요. 매달 기획과 섭외를 하고 촬영을 부탁하는 일이 힘들긴 해요. 다행히 화보를 찍겠다고 먼저 연락하는 스타가 늘었어요. 효리 씨도 화보 촬영으로 처음 만났고요. 기획사나 방송국도 그렇지만 요즘 연예권력이 엄청나잖아요. '누가 입었다' 하면 완판되고 산업 자체가 연예인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잖아요. 이왕이면 그런 유명세를 긍정적인 쪽으로 활용해보고 싶었어요. 잡지를 만들면서 동물복지에 관심 있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됐지요."  

《오보이!》 그리고 《그린보이》  

그에게 동물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본능과도 같은 일이다. 버려지는 동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머니 덕에 언제나 동물로 넘쳐나던 집안 분위기도 큰 몫을 했으리라. 수없는 만남과 이별을 겪었음에도 유독 잊을 수 없는 반려견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처음으로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했던 개, ‘레니’ 그리고 결혼 후 처음으로 키운 개 ‘밤식이’와 ‘먹물이’. 10년이나 자식처럼 키우던 밤식이와 먹물이가 차례로 곁을 떠난 후, 세상은 텅 빈 굴처럼 공허했다. 하지만 잡지를 창간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고, 지금은 잡종 개 ‘뭉치’가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흔히 이야기하듯, 그네들이 주는 사랑은 조건 업고 절대적이다. 그래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굳이 비싼 품종일 필요는 없다. 개는 사람에게 좋은 반려자가 되어준다. 애정을 쏟을 사람이 있으면 개는 행복하지만 철창에 갇힌 개는 그렇지 않다. 

"더는 안 키우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얘가 잡종이라 입양이 안 되면 안락사당할 확률이 높아 보호소에서 데려왔어요. 자기 배가 고픈데 동물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요.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지만, 지구나 환경 측면에서 보면 인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죠. 출산율이 낮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럴수록 환경과 동물엔 피해가 가니까요. 할 일이 많죠. 동물을 '같이 사는 존재'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아이들이 반려동물을 자연스럽게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식을 개선하는 교육도 하고 싶어요. 하루아침에 바뀌길 바라는 건 아니고, 작은 영향이라도 조금씩 일어나길 바라요. 보신탕 먹는 사람을 비난하는 식이 아니라, 공장식 축산의 폐해를 알려주면서 천천히 인식이 바뀔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는 몇 년을 썼는지조차 가물가물한 ‘017’로 시작하는 피처폰을 쓴다(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고장 나기 전에 물건을 사는 일이 없으니). 배터리 수명이 다된 탓에 충전기에 늘 꽂아두지 않으면 통화가 힘들 정도지만, 굳이 ‘스마트’한 새 전화기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다. 철 따라 싫증 나면 바꾸는 세태 속에서 이런 삶의 방식이 대단한 실천으로 보일 지경이다.

꾸준히 책을 내면서 미약하나마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덕분에 반응이 좋아져 광고 수익과 정기구독을 통해 어느 정도 유지도 가능해졌다. 아직은 1인 매체지만 장기적으로는 필자들에게 고료도 지급하고, 함께 일할 사람도 고용할 계획이다. 원고 쓰는 일은 물론 촬영과 메이크업, 스타일링까지 주변인의 '재능기부'에 기대어 계속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게 본인의 인건비를 고려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전 같으면 집에 틀어박혀서 책을 보거나 게임에 몰두할 시간을 지금은 온전히 《오보이!》에 들인다. 이는 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지켜봐주는 아내 덕이기도 하다. 잡지를 만들며 틈틈이 쓴 글들에 살을 붙여 《그린보이》란 책도 냈다. 이래저래 바쁜 일상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감지하며 힘을 내는 수밖에.

"주로 동물이나 문화 관련 특집이 중심이기 때문에 틀은 빤한데 어떻게 포장해 보여주느냐가 관건이죠. 기획은 다 제 머리에서 나오고 큰 틀에서 글은 자유롭게 쓰도록 해요. 애초 전하고자 한 것과 다른 방향의 글이 들어오는 것도 재밌고요. 만든 지 3년 가까이 되었는데 달라진 걸 많이 느껴요. 객관적인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반응들이 오니까요. 좋아하는 스타가 나와서 우연히 책을 접했다가 동물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는 글을 받으면 참 뿌듯하죠. 죽을 때까지 해야 하고 그 이후에도 이어져야죠. 미스코리아에게 소원을 물으면 '세계 평화'라고 하는데, 제 소원도 마찬가지예요. (웃음) 사람이 평화로워야 해요." 
  
동물 문제 실상 알리고 환경에 기여하고파 

열심히 책을 만들면서 이를 알리는 일에 나서다 보니 패션지를 벗어나 시사잡지, 각종 학보(學報)와 문화면까지 등장하게 됐다. 환경이나 동물복지 이슈를 알리기 위해 인터뷰나 강연은 가리지 않는다. 말수가 적고 능변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대답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았다.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육식과 공장식 도축의 폐해를 줄이는 일이라 했다.

(이하 사진) 개인 전시 혹은 사진집의 형태로 곧 만나게 될 그의 사진들. 무심히 보면 건조해 보이지만 언뜻언뜻 세세한 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저도 완전한 채식주의자는 못 돼요. 아예 먹지 말자는 게 아니라 육식을 줄이고 되도록 건강한 고기를 먹자는 거예요. 다국적기업의 대규모 축산과 도축은 환경을 파괴하고 가난한 이들을 더 굶주리게 해요.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고통받을 때도 잦아요. 개한테 염색을 시키거나, 억지로 교배시켜 작게 만들어 컵 안에 넣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요. 동물을 생명이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예요."

그가 늘 입바른 이야기만 하고, 메시지가 있는 사진만 찍는 것은 아니다. 15년간 작업해온 사진가로서 잡지와 무관한 사진집과 전시도 준비하고 있다. 꾸밈이 없어 건조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진은 동물보다는 덜 오래되었으나 그의 절친한 친구다. 누구도 보지 못한 결정적 순간을 놓칠세라 재빨리 셔터를 누르기보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피사체와 느릿느릿 호흡을 맞추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특별한 기술이 요구되기보다는 특유의 감성이 필요한 사진. 담백한 시선에 솔직함이라는 양념을 가미한 그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다.

"메시지와 무관한 일상이나 아무것도 아닌 걸 찍어요. 결정적 순간에만 집착하지는 않아요. 기록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세트나 조명을 복잡하게 꾸미지 않은 솔직한 사진을 좋아하거든요." 

그는 자기만의 메시지나 이야기를 가질 틈조차 없어 보이는 젊은 세대를 만나면 또 할 말이 많아진다. 세상을 숫자로 환원하고, 조금이라도 덜 가지면 불행하다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서 벗어나면 동물도 사람도 더 행복해질 텐데. 가난해도 힘써 살아온 이들이 부자들보다 남을 돕는 일에 지갑을 더 잘 여는 것을 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누군가가 더 잘나가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바꿔야 해요. 나보다 힘겨운 존재를 알고 그들을 위해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 행복해진다고 봐요. 실제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기부도 많이 하고 마음이 더 여유로워요. 주식이나 부동산, 자기 앞날만 생각하면서 각박하게 사는 것보다는요." 

김현성은 남다른 이상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아끼고 사랑하던 이가 죽은 후에 그 죽음을 되새기며 삶의 전환점을 찾고, 소소한 자신의 삶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그 꿈은, '너무 어려워요' '난 못해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삶의 자그만 태도나 습관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배우게 해줬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힘겹고 지난하지만 각자가 삶의 태도를 바꾸기란 훨씬 쉬우니까. 얼핏 보기에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애정과 의지가 있다면 자신만의 타협점이나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얼마 못 가리라고 많은 이가 걱정하던 도전을 멋지게 지속 가능한 현실로 만든, 그처럼 말이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추석 명절을 보낸 가을, 유난히 고향이 그립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에게 시골의 고향은 그림이나 영화 또는 여행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처럼 아련하기만 합니다. 방학 때 친척을 찾아 시골에서 논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향 하면 앞에 강이나 바다가 있고 뒤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오늘 소개할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를 쓴 김준태 시인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입니다. 그는 "살구꽃이 피고, 보리꽃이 피고, 봄마다 뜸북새가 울고, 여름마다 물꼬싸움이 찾아들고, 매미가 울고, 가을엔 저녁노을처럼 들기러기가 내려앉는 곳. 뿐이랴, 논밭들이 헐떡거리는 들판 건너 바다도 보이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이다" 하고 자신의 고향을 소개합니다.

시인의 말마따나 고향은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편안함을 주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장 일변도인 정부와 지자체의 개발 논리 앞에서 전국의 고향은 위태롭습니다. 댐을 만들어 수몰되거나, 공장이 들어선다고 파헤쳐지거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고층 아파트가 세워지거나, 항구를 만든다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산과 들과 강과 해변이 추억으로만 남을 위기에 처한 곳도 많습니다. 4대강 공사로, 해군기지 건설로, 간척사업 등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우리의 고향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에서 표현되어 있듯이 시인은 도시생활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참깨를 터는 작업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라고 심경을 직접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휘파람불며 참깨를 털어내는 손자에게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하며 가볍게 일러주십니다.

‘참깨 털기’가 도시생활에 익숙한 손자에게는 큰 즐거움이겠지만, 할머니에게는 해마다 돌아오는 일상생활입니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며 참깨를 텁니다. 깨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젊은 손자는 해지기 전에 집에 가려고 빨리 털어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할머니는 귀여운 손자에게 가벼운 꾸중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흔합니다.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농촌의 삶을 막연히 즐겁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조선 시대 윤선도처럼 가난하지만 낭만적인 생활을 하고 왔다는 식으로 농촌생활을 '쉼'과 '재미'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윤선도가 자연과 어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노래하며 즐기는 동안 보길도 주민은 일상의 힘겨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체험'을 하러 내려가는 사람들에겐 그곳의 일상이 재미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논밭에서 땀 흘리는 현지인들로서는 일상을 재미로 국한하여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젊은 손자의 모습과 농촌을 문화체험의 현장 정도로 생각하는 요즘 도시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김준태 시인이 <참깨를 털면서>를 발표한 1970년대는 농촌에서 많은 젊은이가 빠져나와 도시로 이주하던 때였습니다. 농촌에서 젊은이를 찾아보기 어렵고 노인들만 남은 곳이 허다했습니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파헤치고 개발 논리를 내세워 고향을 배반하고 팔아먹기도 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런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준태 시인은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집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고향을 잊어먹거나 고향을 배반하거나, 고향을 뒷발로 차버리거나, 고향을 올라타고 말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아. 고향! 이제 우리는 고향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고향을 깊이 어루만져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사방팔방으로 입맞추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노래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울어주어야 할 것 같고, 아주 우리가 진짜로 고향이 돼버려야 할 것 같다. 사람들아, 오 사람들아. 이제 우리는 저마다 고향이 되어서 기실 천지간이 온통 고향으로 둘둘 뭉쳐졌으면 환장하게 좋을 것 같다.
몇 주먹 더 털어놓자면, 사람들아, 나의 고향은 나의 宇宙다. 나의 고향은 나의 敎科書요, 바이블이요, 눈알이요, 망원렌즈요, 배꼽이요, 귓구멍이요, 속옷이요, 머슴이요, 스승이요, 보리밥이요, 天國이요, 개똥이요, 구정물통이다. 요컨대 나의 고향은 나의 모든 것이다. 나의 未來다.

글을 마무리하며 《참깨를 털면서》의 발문을 쓴 조태일 시인과 천상병 시인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조태일은 김준태의 시를 읽고 자신보다 인생의 연륜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가 보내온 약력을 보고 대학교 초년생이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 뒤 김준태는 중앙의 발표지면을 통해 좋은 시를 맹렬히 발표합니다. 하루는 《창작과비평》에 실린 김준태의 <감꽃> 등의 시를 읽고 천상병 시인이 조태일 시인을 찾아왔습니다. 

감꽃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대낮부터 청진동 막걸릿집으로 조태일을 데려간 천상병 시인은 백 원어치의 막걸리를 이 세상에서 남에게 사는 처음이자 마지막 술이라며 권했다고 합니다. 김준태의 좋은 시를 읽고 매우 기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옛동무를 만나 고향의 추억을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김준태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과를 졸업했다. 1969년 월간 《시인》지로 등단했다. 베트남전쟁에 1년 동안 참전했으며 13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11년간 전남일보, 광주매일 편집국, PBC광주평화방송 시사자키, 5·18구속자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로, 광주 금란로에 작은 학교 <금남로리케이온>을 마련하여 교육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참깨를 털면서》《나는 하느님을 보았다》《국밥과 희망》《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칼과 흙》《지평선에 서서》, 소설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 외 액자소설 88편, 통일시해설집 《백두산아 훨훨 날아라》, 세계문학기행집《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평전《명노근 평전》 베트남전쟁소설《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가을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과 단풍, 낙엽의 계절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이런저런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최근에 편지를 쓴 기억이 있습니까? 휴대전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메일, 메신저 등이 익숙한 시대입니다. 종이에 정성껏 펜으로 꾹꾹 눌러 편지를 써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부는 이때, 편지나 엽서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이메일이라도 편지 형식으로 누군가에게 진솔한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건 어떨까요?

가을편지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는 분이라면 이 시의 감흥을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편지나 엽서를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기 어렵다면 이메일로 편지의 형식을 갖춰서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누군가의 그대가 되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면 스산한 가을 저녁에 외로운 밤을 보내진 않을 테니까요.

<가을편지>는 시인 고은이 쓴 노랫말에 약관의 미대생인 김민기가 곡을 붙이고 샹송 가수 최양숙의 목소리로 1972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입니다. 그 이후로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했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듣다 보면 당장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대인가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대이길 바라나요?’
현대인은 직장이나 각종 모임 혹은 온라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이 가을에 누군가를 그대로 생각하고 편지를 써보세요. 여러분이 바로 아름다운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호승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하지만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말입니다. 요즘 연인들은 예전처럼 편지로 소통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편지보다는 전화나 문자, 메신저 등으로 즉각적으로 소통합니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답문자가 오지 않거나 통화가 되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일이 잦습니다. 설레는 시간도 짧아졌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에서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꽤 길어집니다. 그리움의 눈물도 흘렸지만 원망보다 사랑이 더 깊어집니다. 외로운 마음은 첫눈으로 녹고 다시 설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사랑이 성숙하고 깊어지는 자양분입니다. 그 시간을 타고 편지가 옵니다. 마치 첫눈처럼….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또 기다리는 편지>와 다른 느낌이긴 해도 <즐거운 편지>에 나타난 ‘기다림의 정서’는 공통적입니다. '편지는 기다림'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말을 하고 평범하게 쓰지만 진한 울림을 간직한 채 수취인을 찾아갑니다. <즐거운 편지>의 화자는 사랑을 기다림으로, 기다림을 사랑으로 바꾸고 항상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귀한 사랑의 행위와 같습니다.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여길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편지도 받는 이가 즐겁고 설렐 때라야 기다림이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기다림과 사랑이 언제나 영원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화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는 표현처럼 화자는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며 편지를 계속 쓸 것이고 계속 기다릴 테지요. 

편지
            김명인

다시 가을이다
돌틈 새에 숨는 몇 마리 도마뱀들
숨어도 보이는 우리들의 꼬리를 
아프게 잘라버린다
친구여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느냐?
계절을 받고 또 계절을 내주고 섰는 
산 속으로 들어서며
가을이 가고 있군 가을이
풀잎 위에 떨구는 산여치의 울음
바람은 개울 위에 새 주렴을 펴고 있다
뒤따라가며 우리도 또한 흩어질 것이냐?
묵묵히 견디고 섰는
더 괴로운 물풀도 만나고 싶다
괴로움도 이제는 괴로움이 아니라고
친구여 맨살에 끊임없이 감기는 물소리
홀로 흐를 때 
물소리는 한결같이 차갑게 스민다


김명인 시인의 <편지>를 보면 친구와 보낸 어린 시절의 일들이 행간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편지는 추억이고 기억입니다. 시인처럼 친구에게 옛이야기를 써보세요.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겠지요. 이렇듯 '편지는 과거로의 여행'이기도 합니다. 괴로운 여행일 수도 있고, 행복한 여행일 수도 있습니다. 여행을 통해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죠. 그 즐거운 여행을 누구하고 할지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중략>… 그저 당신은 자기 작품 속에서 자랑스럽고도 자연스런 재화,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 그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적 필연성에서 이루어진 예술 작품은 훌륭한 것입니다. 시의 원천에 의해서만 시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것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파고들어서 당신의 생명이 근원한 그 깊이를 음미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 원천에서부터 창작을 해야 할까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해답이 어떻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모르긴 해도 당신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 보상 따위는 염두에 두지 말고 그 무겁고도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하는 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글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인지망생 프란츠 크사버 카프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카프스는 자신이 습작한 시를 보내 평을 듣고 싶어 릴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위의 글은 릴케의 첫 답장 중의 일부분입니다.

시인 릴케는 자기 생각을 시인 지망생인 카프스에게 친절하고 성의 있게 썼습니다. 이들은 꽤 오랫동안 편지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은 편지로 세대를 넘어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편지를 쓰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진심을 말이 아닌 글로 옮겨 보낼 때 더 큰 울림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편지는 용기'입니다. 반드시 답장을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보내는 이에겐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요. 시인 지망생 카프스는 시인 릴케에게 자신의 습작을 보여줄 용기가 있었고 실행했기에 답장을 받을 수 있었죠. 

어느덧 완연한 가을입니다. 편지를 쓰세요. 그때가 ‘누군가의 그대’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기다리세요. 기다림은 사랑이요, 추억이니까요. 언젠가 편지는 사랑을 싣고, 추억을 싣고, 기다림과 설레는 마음을 싣고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이 시대에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고, 사랑을 잃고, 과거를 잊고, 마침내 자신마저 잃어버리지는 않았나요? 편지는 이 모든 것을 찾게 도와줄 테니, 지금 곧 펜을 드세요.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최근 묻지마 칼부림 사건, 빈발하는 성범죄 등으로 사회적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안전망에 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자살률이 대변하는 '삶의 질'

얼마 전 우리나라 국민의 ‘삶의 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오이시디 국가의 삶의 질 구조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보면, 한국은 자체 분석한 ‘삶의 질’ 조사에서 10점 만점에 4.2점을 받아 34개국 가운데 32위를 차지했습니다. 
 

논문을 쓴 이내찬 한성대 교수는 OECD 행복지수 조사 지표에 소수에 대한 관대성, 국가 신뢰도, 지니계수(소득 분포의 불평등도를 측정하기 위한 계수), 빈곤율, 여성차별, 지속가능성,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라는 7개 지표를 추가하여 새로운 지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전 조사에서는 22~24위로 중하위권에 있었던 우리나라가 새 지표를 추가한 삶의 질 조사에서는 최하위권으로 떨어졌습니다. 

삶의 질 지표의 수치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한국은 OECD 국가 중 8년간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2010년 우리나라의 하루 평균 자살자는 42.6명으로 연간 1만 5566명에 달합니다.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OECD 평균(12.8명)의 2.4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2위인 일본(21.2명)과도 큰 격차를 보이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infographicworks.com)

현대 사회에서 자살률은 경제변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인당 국민총소득(GNI,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생산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로서, 실질적인 국민소득을 측정하기 위하여 교역조건의 변화를 반영한 소득지표)가 2000년 1만 1292달러에서 2010년 2만 562달러로 1.8배나 높아졌지만,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000년 13.6명에서 2010년 31.2명으로 2.3배나 증가했습니다.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하고 2008년 기초노령연금제, 장기요양보험제를 시행하는 등 주요 제도가 정비된 것과는 상반된 결과입니다. 복지 선진국인 스웨덴의 자살률(10만 명당 11.7명)이 OECD 평균과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살률이 높은 원인을 낮은 사회보장제도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 자살은 10대 사망 원인 중 남성의 경우 4위, 여성의 경우 5위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아직 꽃피지도 못한 청춘들이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회를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이유에 관해 더 나은 삶을 누릴 기회가 사라졌다는 절망에서 기인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나 직장생활을 통한 삶의 질 개선의 문이 저소득층에게 점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회 전반의 잠재적 불안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급증하는 아동 대상 성범죄

최근 성범죄를 다룬 기사가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했습니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급증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범죄가 사람의 왕래가 없는 구석진 곳에서 발생할 것으로 흔히들 예상하지만, 사실상 아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사람들은 성범죄가 발생하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 구조적으로 문제를 풀 생각보다는 일단 자신의 아이를 돌보거나 챙기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범죄율이 높아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 《한겨레》에 실린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의 칼럼(<한 아이를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은 우리 사회가 왜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사 일부를 소개합니다.

정말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책의 핵심은 이런 ‘아저씨’들을 양산하지 않는 데 있다. 요즘 농촌에 가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리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종종 아이들에게 집적거린다는 걸 동네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서로가 안면이 있고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라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을 공동체의 순기능은 사라지고 오히려 역작용을 하는 상황인 것이다. 중소도시나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이번 경우에도 아이가 길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도 벌을 받고 있거니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이웃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상황에서는 계속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 힘든 부모들은 점점 늘어날 것인데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돌봄의 인프라’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하는가? 안전한 마을을 만들지 않고는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  지역 주민자치센터나 공공회관에 부모들이 모여 사랑방을 마련하고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면 끔찍한 일들을 많이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피시방 한켠에 구직 상담이나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할 수 있는 응접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를 살리고 서로를 돕는 주민들이 주도하는 마을에서는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성범죄나 세상에 복수를 하겠다는 ‘묻지마 살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한 이유

얼마 전 의정부역에서 벌어진 묻지마 칼부림 사건 이후로 언론을 통해 알려진 관련 범죄만 해도 7건이나 됩니다.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이거나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기간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생활했거나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소외된 경험이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얘긴데요, 최근 여의도 흉기난동 사건의 피의자 김모 씨(30) 역시 가족과 몇 년째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회사를 그만둔 뒤 생활고에 시달리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OECD 회원국들은 1인당 GDP가 높을수록 '위험 방지 지출'을 많이 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위험 방지 지출은 노령, 질병, 실업, 재해와 같은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복지 지출(Social Expenditure)을 의미합니다. 앞서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이 경제변수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위 통계를 보면 자살률과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율 간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인 성장은 이뤘지만 사회복지 지출은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이니까요. 

(출처: 사회적기업 창업 교과서)

어느 사회든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미취업자와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제도 강화, 사회적 고립을 겪는 이를 위한 상담 프로그램같이 '사회안전망'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에 이르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사회안전망은 브레턴우즈협정 기관들(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개발도상국과 동구권국가들에 차관을 제공하면서 요구한 구조조정으로 야기된 실업 및 생계 곤란자 양산이라는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고자 마련한 것으로, 이는 기존의 사회보장이나 사회복지라는 개념보다 긴박하고 과도기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사회적 장치인 셈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안전망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997년 경제위기 당시 IMF 및 세계은행이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사회안전망 확충을 요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일자리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일본에서 ‘니트(Neet)’란 15~34세의 청년 가운데 일도 공부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들을 약 64만 명으로 추산했는데요, 니트에 속하는 대상을 50세까지 넓힌다면 100만 명이 훌쩍 넘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우리나라 청년 니트족에 관한 자료를 보면, 2003년 75만 1000명에서 2010년 99만 6000명으로 약 24만 명이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문가들은 2011년에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이는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청년 실업자 32만 명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에 해당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 실업자인 니트. 이들을 '지원'하는 일과 '예방'하는 일 사이에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양쪽 다 중요하겠지만, 니트가 되고 난 다음 지원해봐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니트는 앞으로도 계속 생길 테니까요. 급증하는 사회보장비로 말미암아 국가 재정은 점점 심각한 상태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출처: 민중의 소리 인포그래픽)


또한 한번 니트가 되면 사회에 복귀하려고 마음먹어도 취직이 어렵다는 문제가 뒤따릅니다. 니트 기간의 공백 탓으로 채용단계에서 불이익을 받기도 쉽지요. 20~30대 니트 모두가 50세까지 그 상태로 있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상당한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예방하는 편이 전체적인 사회적 비용이 적게 들 뿐 아니라 각자에게도 훨씬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뉴욕대 정신의학 교수 제임스 길리건은 20세기 미국의 살인율과 자살률 통계를 분석하여 폭력의 메커니즘을 규명했습니다. 그는 "수치심이 고통스러울 때 이를 남에게 전가하기 위해 강력하게 휘두르는 폭력이 살인이며, 그 방향이 자신에게 향하는 게 자살"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리하여 실업은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실직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므로 실업률 해소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 사회는 국가와 기업을 위해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노동계에 '비정규직' 바람이 불면서 노동자들은 무한경쟁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니계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상승 추세를 보였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제일 높은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지요. 

(출처: 사회적기업 창업 교과서)

이런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노무현 정부는 사회적기업을 육성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사회적기업은 비영리 조직과 영리기업의 중간 형태로,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을 말합니다. 일반 기업처럼 이윤을 추구하기보다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윤의 대부분을 재투자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기업 육성은 일자리 창출, 특히 경제적 취약계층의 고용과 같은 사회문제 해결에 역점을 두고 진행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적기업이 남긴 과제가 적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상당히 기여한 건 사실입니다.  

이와 더불어 기업 또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기업문화가 점차 강화되는 긍정적인 흐름도 생겼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진정성을 보이며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한계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다시 사회로 복귀시킬 제도적인 장치가 바로 사회안전망이기 때문이지요. 

생각비행은 그동안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동력으로 '사회적기업'에 주목해왔습니다. 사회적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지막지하게 경쟁하기보다는 함께 성장하는 길을 모색하는 대안적인 경제활동을 추구합니다. 성장보다는 사회적 나눔과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관심을 보입니다. 사회적기업이 풀지 못한 과제를 협동조합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생기고 있습니다. 저희도 우리 사회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계속 발굴하고 공유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많은 관심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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