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부터 한 달에 세 번, 《르네상스의 어둠》의 저자인 도현신 씨가 기고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꼭지는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기도 하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을 짚어내기도 하고, 미래를 점치는 전망을 싣기도 합니다.

첫 기사로 개성공단 폐쇄를 바라보며 남북한 평화 공존 체제를 구축하자는 주장을 담은 글을 싣습니다. 개성공단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낸 이후 2000년 8월 22일 남측의 현대아산(주)과 북측의 아태, 민경련 간에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여 시작된 남북교류협력 사업입니다. 

(출처: 통일부)

개성공단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하여 마련된 역사적인 협력의 장이었습니다. 2004년 발표된 당초 계획으로는, 2011년까지 총 2000만 평의 부지 위에 800만 평의 공단과 1200만 평의 배후도시를 계획하고, 70만 명의 북한 근로자가 고용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계획처럼 개발이 진전되지는 않았으나, 개성공단의 근로자 현황을 보면 북측 근로자가 2005년(6000명), 2006년(1만 1000명), 2007년(2만 2000명), 2008년(3만 8000명), 2009년(4만 2000명), 2010년(4만 6000명), 2011년(4만 9000명) 등이었고, 2012년 1월에 드디어 5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남측 근로자는 700명~80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싸늘해진 남북관계로 동북아 평화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김정은 체제하에서 도발적인 대남전략의 극단적 조치가 개성공단 폐쇄였으며, 이에 우리 정부는 인력 철수라는 강경한 대응을 고수했습니다. 개성공단 철수가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야기할까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이 문제에 관해 살펴봅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생각비행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기까지

요즘은 다소 조용하지만, 불과 4월 말까지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개성공단에 파견된 우리 측 근로자들이 북한에 인질로 잡히면 특전사를 동원해서 인질 구출 작전에 나서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북한이 당장에라도 근로자들을 인질로 잡고 남한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했습니다. 각종 언론들도 덩달아 앞장서서 가설을 마구 발표하여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결국 부랴부랴 개성공단 근로자들은 귀국했고, 그렇게 해서 2007년부터 운영되었던 개성공단은 현재 잠정 중단, 사실상 폐업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근로자가 철수했다고 밝힌 개성공단. (출처: ytn)

물론 북한 측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죠. 2013년 2월,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으며, 무수단 미사일을 동해에 배치해서 언제든지 어디로든 쏴버리겠다고 위협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합동 군사 훈련을 재개하고, 유엔을 통해 대북 제재를 강화하라고 미국과 중국에 호소했습니다.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을 격추시키기 위해 도쿄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했으며, 군사대국화를 외치는 아베 신조가 70퍼센트라는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교전권 금지를 명시한 일본의 평화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 2월부터 5월초까지의 북한 관련 뉴스 보도만 보고 있으면, 당장 북한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북한의 붕괴설만 믿고 안이했던 정부?

지금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누가 승자가 되든 간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우리가 떠안아야 합니다. 북한의 장사정포와 화학무기에 의해 수도 서울이 제일 먼저 타격을 입을 것이고, 최소한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에 투자된 외국 자본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겠지요. 세상에 어느 누가 전쟁이 나서 모든 산업 기반이 파괴되고,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한 나라에 귀중한 돈을 투자하고 싶겠습니까?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한국의 모든 사회 전반이 1950년대, 전 세계에서 제일 가난했던 시절로 후퇴함을 우리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태연하다 못해 너무나 안이합니다. 북한이 강경 발언을 하면 그에 맞서 강경 발언을 날리고, 북한이 군사 행동을 하면 그에 맞서 군사 행동을 하고, 북한이 조용하면 아무런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합니다. 이건 꼭 사이가 나쁜 유치원 아이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먼저 나서서 북한과 대화를 해보겠다거나, 아니면 남북 간의 위기 상황을 스스로 해결해보겠다는 움직임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북문제의 당사자가 우리인 만큼, 결국 우리가 스스로 적극 나서야 하는데, 왜 제3자인 미국이나 유엔에 매달리면서 정작 우리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위키리크스 때문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지난 2010년 2월 17일, 천영우 전 외교통상부 차관이 캐슬린 스티븐슨 주한 미국대사에게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무너졌고, 김정일 사후 3년 이내에 붕괴된다. 중국도 한국이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것을 내심 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내용이 전 세계 외교관들끼리의 대화를 담은 위키리크스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죠.

정말로 한국 정부가 천영우 전 차관의 말을 그대로 믿고, 북한이 저절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에 죽었으니, 3년이라면 2014년인데 그때 가서 북한이 붕괴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걸까요?
 
저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보이는 무대책, 무대응, 막가파식 태도를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개성공단 폐쇄만 해도 그렇습니다. 2013년 4월 9일, 청와대는 “개성공단이 폐쇄할 경우, 어떤 대책도 없고 그런 것을 마련해 오지도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개성공단 폐쇄의 책임을 모두 북한 탓이라고 돌리면서 말이죠.

천영우 차관이 미국 대사에게 한 북한의 붕괴 임박설, (출처: 쿠키뉴스)

말하자면 한국 정부가 북한을 대하는 언행들은 조만간 북한이 붕괴한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얼마 안 가 곧 망할 집단(헌법상 북한도 한국의 영토로 간주되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 세력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테러 단체로 봅니다)과 무슨 대화나 협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북한이 곧 붕괴한다는 주장은 이번에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이 바로 망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2~3년 동안 끊임없이 나돌았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확인되자, 일부에서 예의상 북한에 조문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들이 나오자 보수 여당과 언론들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조문 이야기를 꺼낸 사람들을 빨갱이 취급하며 탄압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없이는 못 사는 나라다. 김일성이 죽었으니 이제 북한은 곧 망한다. 그러니 망할 나라인 북한에 뭐 하러 조문을 보내느냐?” 하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서점가에서도 한동안 북한이 곧 망하고 남한에 흡수 통일된다는 예측과 전망을 담은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김일성 사후 19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북한은 붕괴하지 않고 건재합니다. 김정일이 죽은 지 이제 1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났지만, 북한은 건재합니다. 대체 전문가란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북한이 정확히 언제 망한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었던 것일까요? 혹시 그들의 말은 그저 일방적인 소망만을 담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 과연 좋은 일일까?

걸핏하면 전쟁 위협과 공갈, 핵실험을 일삼는 위험한 집단인 북한이 붕괴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북한이 붕괴한다면 우리에게 좋기만 한 일이 아닙니다. 북한이 무너진다면, 극소수 상류층을 제외한 2000만에 달하는 대부분의 북한 국민은 어떻게 될까요? 그나마 개미 눈물만큼이라도 식량 배급을 해주던 국가가 사라졌으니, 누구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가만히 앉아서 몽땅 굶어죽기를 기다릴까요? 아닐 겁니다. 국경선을 마주한 중국이나 남한으로 넘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식량을 구하려 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들에게 지원을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입으로만 한민족, 통일을 외칠 뿐 정작 진심으로 그들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1997년 5월 15일, 주간지 《한겨레 21》이 서울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응답한 아이들의 절반이 “통일되면 거지들이 몰려오니까 싫다!” 하고 답했답니다. 요즘은 “통일이 되면 우리가 북한을 먹여 살리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싫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1997년의 상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우리보다 못 사는 북한 주민을 먹여 살리거나 통일을 하는 데 내 돈을 쓰기 싫다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약 3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놓인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2011년 7월 15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탈북자 대부분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이유는 남한 주민이 탈북자들을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여겨 차별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보다 앞선 2006년 7월 17일, 《월간중앙》 8월호가 국내 거주 탈북자 29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응답한 탈북자 중 무려 70퍼센트가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으며, 그중 54퍼센트는 차라리 북한으로 가고 싶다는 말까지 했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 살았던 북한 주민은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극단적인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적응을 못 할 뿐더러,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부담을 느끼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난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탈북자들이 인권과 임금 차별을 받는다는 보도. (출처: mbn 뉴스)

이렇게 국내에 거주하는 3만 명의 탈북자도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하면서, 그보다 훨씬 많은 2000만 명의 굶주린 북한 난민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한꺼번에 넘어온다면, 과연 우리 사회가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순순히 돈을 풀까요? 저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탈북자들이 못 넘어오게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 주민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난 60년 넘게 무기고에 쌓아 둔 무기를 꺼내들고 식량과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할 것입니다. 이런 시나리오가 예상되기에 북한 정권이 당장 붕괴한들, 우리가 얻을 이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북한과 대화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박근혜 대통령

사실, 북한과의 대화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정부가 그러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서슬 퍼런 독재 정권이자 당장 북한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살던 박정희 시대인 1972년 7월 4일, 남한 정부의 특사가 되어 북한으로 파견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일성을 직접 만나 회담한 뒤 남북 간의 평화로운 통일을 약속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남북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 이후락 중정부장. (출처: 동아일보)

요즘 북한과의 대화 제의를 두고 “북한은 정신 나간 미치광이 집단인데, 뭐 하러 대화를 하느냐? 다 필요 없다!” 하며 일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뿔 난 악마로, 북한을 무자비한 살인마 집단으로 여기던 상황인 1972년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심복인 이후락을 보내 김일성 주석과 대화하게 했습니다. 박정희가 김일성을 좋아하고 존경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김일성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가 포함된 특수 부대를 보내 박정희를 죽이도록 지시한 바 있습니다. 사적으로 보면 김일성은 박정희의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4년 후에 자신의 오른팔을 보내 김일성과 대화하게 했습니다. 김일성이 지금 북한의 통치자인 김정은보다 더 이성적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박정희는 남북한의 대화라는 큰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사소한 사적인 감정은 접어두기로 한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박근혜는 “북한에 신뢰를 통한 대화에 나서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취임한 지 이제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북한과 대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박근혜의 지지층은 반공 정서를 기본으로 깐 보수 세력입니다. 이들은 북한을 “미치광이 살인마 집단”이라고 맹목적으로 증오하며, 그들과 어떠한 대화나 협상도 해선 안 되고 그들이 저절로 붕괴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굶주린 북한 주민을 위해 식량이나 돈을 지원하는 것도 반대할 겁니다. 만약 북한이 정말로 그들의 소망대로 붕괴한다면, 한국군 전 병력을 동원해서 휴전선을 막고, 북한 주민이 자기들 땅 안에 갇혀서 전부 굶어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북한 주민 먹이는 데 자기들 돈 쓰는 걸, 아까워하니까요.)

만약 이런 지지층을 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진심으로 “북한과 대화에 나서겠습니다. 남북 간에 두 번 다시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김정은 위원장, 우리 부디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평화를 위해 노력합시다.” 하고 공식 석상에서 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당장에 박근혜를 두고 “어찌 감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비굴하게 저 북한 빨갱이들한테 애걸을 할 수 있느냐?” 하고 항의하는 여론이 빗발칠 겁니다.

실제로 2013년 4월 11일 밤, 박근혜가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제안만 했는데도 보수층의 여론은 격분했습니다. 한국의 보수 언론을 대표하는 《조선일보》는 다음 날인 12일, 신문 사설에 “북한과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뉘앙스가 담긴 글을 실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 언론인인 조갑제도 자신의 홈페이지인 <조갑제닷컴>에 “북한과의 대화는 그들의 공갈에 굴복하는 것이다!” 하며 규탄했습니다. 이런 주변의 반발에 겁을 먹었는지,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북한과의 대화 제의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보수층의 반발 이외에도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당분간 대북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취임 초기부터 추천한 인사 대부분이 부정부패와 공직자 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낙마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40퍼센트 대까지 추락하는 상황을 경험한 바 있는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자신과 정권의 지지율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대북 강경책을 펴서 반공 보수 계층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합니다. 또 실제로 그 판단이 옳았죠. 연일 대북 강경론을 펼치자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제 60퍼센트 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안정세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정권의 보신만을 위해 무책임한 대북 강경책을 고집하는 모습이 불안해 보이는 건 저뿐일까요? 반공 보수 계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북한과 치킨 게임을 벌이는 식으로 대북 강경책에 몰두하다가 한반도 긴장 국면이 더욱 악화되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개성공단 철수, 필연적이었다

결국 5월 12일 현재,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노동자 전원이 귀국하고 공단 운영은 잠정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성공단의 사실상 폐쇄를 두고 국민의 약 3분의 2 정도가 잘된 일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북한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면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이 2013년 5월 6일 자신의 트위터에 쓴 글들을 보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상황이라면 개성공단은 존속할 가치가 없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개성공단의 운영을 원치 않고, 계속 공장들을 돌려봐야 “빨갱이들 돈 대주는데, 뭐 하러 공장을 하느냐?” 하고 차가운 눈으로 본다면 개성공단을 만든 근본 목적인 “경제협력을 통한 남북 간 갈등 완화와 신뢰 구축”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셈인데, 공단을 운영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겠죠.

우리는 아직도 통일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 진중권 씨 (출처: 진중권 트위터)

또 박근혜 정부의 취임사에서 밝힌 “북한과의 신뢰 구축”이라는 목표가 북한이라는 집단 자체를 “비이성적인 미치광이 집단”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부터 점검해봐야 합니다. 진중권 씨가 트위터에서 밝힌 대로, 북한을 ‘비이성적인 미치광이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어떻게 북한을 신뢰하고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미친 사람을 믿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북한을 정말로 대화 상대로 생각한다면, 일단 그들을 비이성적이고 미치광이 집단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북한을 정말로 비이성적이고 미치광이 집단이라고 여기고 싶다면, 그들과 아예 대화하려 하거나 신뢰하지 말아야 말의 맥락이 맞겠지요.

통일은 안 되도 좋으니, 우선 평화 공존부터 이루자 

악화될 대로 악화된 지금 상황에서 여전히 통일을 향한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재 국면을 잘 넘기고, 다시 북한과 대화 및 협상에 나서 보자는 의견을 견지한 이들이죠.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DMZ(비무장지대)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DMZ 평화공원은 북한과의 신뢰 관계가 구축되지 않는 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만에 하나 어찌어찌해서 DMZ 평화공원이 조성된다고 해도, 금강산 관광 사업이나 개성공단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 과정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북한의 강경 세력은 서로 간의 적대적인 대치 상황이 해소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북한이 영원히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대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자기들의 입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남북한의 평화통일이라는 대의에는 저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지금 통일을 이야기하기에는 남북한은 너무나 멀리 왔습니다. 무엇보다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강경파가 집권한 현 시국에서 통일은 은하계로 가는 것만큼이나 멀고 험난해졌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통일은 안 해도 좋으니, 남한과 북한 두 나라가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대치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 공존으로만 나아가도 대단한 성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머리기사로 공공의료의 현실을 다뤘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경상남도가 진주의료원 폐업 절차를 밟으면서 한국의 공공병원 체계의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돈보다 생명이다


《경향신문》 기사는 우리나라 의료의 역사가 '공공병원 포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합니다.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에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되면서 의료 대중화가 시작되어 1980년대부터 그 수요는 급증했으나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이를 민간에 내맡겼다고 합니다. 이로써 개인 소유의 민간병원이 급성장하는 시대가 열렸고, 돈을 많이 번 병원 상당수가 1990년대 들어 의과대학으로 허가를 받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형병원의 환자 유치 경쟁이 치열한 정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출처: 경향신문)


민간병원은 공공성보다는 투자한 원금을 회수하는 데 열을 올리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비급여진료를 중심으로 과잉진료 논란이 우리 사회에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지방에서 수익 없는 진료에 앞장섰던 지방의료원은 수익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될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번에 부각된 전주의료원 폐업 논란은 한국 공공 의료체계에 내재된 모순의 일부가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상호 협력과 공존의 해결책,
사회적경제네트워크에서 실마리를 찾다


강원도 원주에는 2009년 19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들이 모여 발족한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원주네트워크)가 있습니다. 원주에서는 협동조합에 가입하면 먹을거리를 사고, 아플 때 치료받고, 아이들 보육을 맡기고, 꼭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는 등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공동체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원주네트워크에 가입한 회원이 3만 5000명에 이릅니다. 단순 계산을 하더라도 원주 전체 인구 30만 명의 10퍼센트가 넘는 셈입니다.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은 사회운동가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의 생명평화 사상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장일순의 사상은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운동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장일순은 1980년대 이후 ‘한살림운동’에 헌신하여 이 일을 주도했습니다. 한살림운동에서 주목할 부분은 ‘호혜(互惠)의 원리’입니다. 이는 상호 협력과 공존을 중시하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한살림생활협동조합’이 탄생했고, 이와 같은 다양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이 모여 원주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해 공통의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실현하고자 자발적으로 협동하는 자율적인 조직입니다. (참고 기사: 99%를 위한 위한 기업, 협동조합의 미래) 협동조합은 경제적 약자인 다수가 뭉치고 호혜의 힘으로 시장 지배력을 키워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독점적 폐해를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일반 기업은 생산과 운영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경영환경이 어려워지면 기업은 각종 비용을 줄여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기울입니다.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각주:1], 식스 시그마(Six Sigma)[각주:2] 같은 경영혁신 기법들도 모두 위기를 극복하려는 절실함에서 나왔습니다. 위기 때마다 일본식 경영 모델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마른 수건을 다시 짜면 물이 나온다’ 식의 짠돌이 경영 때문입니다. 

물론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을 한다는 점에선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데 재료비가 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인건비가 드는 건 사실이니까요.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상품의 ‘원가’ 부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긴 해도 비용을 지출하는 목적을 생각한다면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이 취하는 방법은 기존 자본주의 시장하에서 일반 기업과는 달라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이 구매력이 낮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사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비용 최소화는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도 하는 까닭에 비용을 줄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이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사회혁신 비즈니스》의 두 저자는 다음의 내용을 그 해결책으로 내놓습니다.


• 기술혁신(Technology Innovation)
• 운영혁신(Management Innovation)

사회적기업도 엄연한 ‘기업’이다. 따라서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혁신적 기업가 정신, 전략적 사고, 효율성, 고객지향, 목표 성과관리, 효율적 조직관리, 시장개척, 자본조달 등의 경영원리에 따라 사업을 운영해야 한다. 만일 사회적기업이 외부 지원금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무늬’는 사회적기업일지 모르나 그 ‘영혼’은 사회적기업이 아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 가치 창출이라는 원칙에 충실해야 하지만, 기업으로서 생존과 성장에 실패한다면 본연의 목적 또한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각종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사회적기업’이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해 오히려 사회적 문제가 되어 버린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사회적기업이 추구하는 경제적 가치란 기업이 만든 상품과 서비스의 이야기를 팔아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그 ‘스토리’가 사회적 가치다. 사회적기업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사이의 갈등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해결하는 일은 사회적기업가의 숙명이다. 이를 위해서 때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혁신’이 필요하다. 근래 혁신이라는 말을 빼고서는 사회적기업을 설립하기가 어려워졌다. 일자리 창출을 위주로 하는 ‘루비콘형’보다 사회혁신을 추구하는 ‘아쇼카형’ 사회적기업이 더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적기업 창업경진대회에서도 혁신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과연 혁신은 어디에서 나올까? 혁신은 바로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타인과의 연결(connection with others)’에서 나온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한 시기와 커피를 파는 카페가 생긴 시기가 얼추 비슷하다. 술 대신 카페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며 다양한 배경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혁신이 일어났고, 이것이 국가 전체의 산업혁명으로 나타났다는 견해를 표방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 시대에 혁신의 아이콘이 된 스티브 잡스의 경우 ‘타인과의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긴 해도 사실상 애플이 이뤄낸 혁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회사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가치 창출과 더불어 공익을 생각하고 사회혁신을 꿈꾸는 사회적기업가라면 모름지기 세상을 향해 열린 ‘사고(思考)’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즐겨야 한다.《논어》를 보면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知之者不如好之者),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好之者不如樂之者)’고 하지 않았는가? 시장에 잘 맞는 제품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기업가는 ‘아는 사람(知之者)’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혁신가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好之者)’이요, ‘즐기는 사람(樂之者)’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끊임없이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배우고 즐겨야 한다. 이것이 가장 확실하게 혁신을 이루어가는 방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기업가는 곧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회혁신가다.
-《사회혁신 비즈니스》 본문 중에서

책에서 두 저자는 공공의료 부문에서 기술혁신과 운영혁신을 이룬 좋은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인용합니다.

공공의료 부문 사회혁신 사례

엠브레이스―생명을 살리는 온기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2.5킬로그램 미만으로 태어난 아이를 조산아라고 한다. 엄마 젖을 빨 힘도 없고 면역력도 약한 이런 아이들은 외부와 격리하여 체온을 유지해주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의료기기가 바로 인큐베이터다. 그런데 매년 400만 명의 조산아가 인큐베이터 시설을 이용하지 못해 사망한다. 비록 운 좋게 살아남아도 각종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으며 평균 지능도 정상아보다 낮다. 이러한 현상은 저개발국의 조산아들한테서 빈번히 나타난다. 대당 2만 달러나 하는 인큐베이터는 저개발국가의 병원이 갖추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병원에 설비가 있다고 해도 고장이 나면 수리비용 등의 문제로 고치지 않고 방치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2008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최고의 적정성을 위한 기업가적 설계(Entrepreneurial Design for Extreme Affectability)’라는 수업을 듣던 첸 제인과 동료는 저개발 국가의 인큐베이터 이용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존 인큐베이터 가격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25달러짜리 인큐베이터’를 개발하는 회사 엠브레이스(Embrace)를 설립한다. 이들은 네팔 지역을 조사하여 이 지역 사람의 80퍼센트가 집에서 아이를 낳기 때문에 병원용 인큐베이터가 아닌 가정용 인큐베이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엠브레이스(www.embraceglobal.org)

엠브레이스는 전기를 쓰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곤충의 피해를 막는 저렴한 인큐베이터를 설계한 뒤 여러 차례의 실험을 거쳐 포대기 형태로 된 인큐베이터를 개발했다. 엄마가 아기를 직접 안아줄 수 있게끔 디자인되었으며 세탁하기 쉬워 관리하기 편리한 이 인큐베이터는 12시간 동안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를 내는 물질이 들어 있어 열효율도 좋았다. 더구나 부피가 작고 가벼워 운송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엠브레이스가 만든 혁신적인 인큐베이터 덕분에 수많은 아이가 목숨을 건졌다. 단돈 25달러로 말이다.

아라빈드 안과병원―백내장 수술의 혁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 제품 및 서비스의 기능과 품질이 점점 비슷해지는 동질화(同質化) 현상이 발생한다. 기업들은 이에 대응해 차별화를 추구하지만, 고객들은 미세한 특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경쟁이 격화된 시장에서도 업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돌연변이형 제품과 기업은 꾸준히 출현해왔다. 그들의 차별적 속성을 분석해보면 동종업계에서 보기 어려운 이(異)업종의 DNA를 도입한 사례가 눈에 띈다.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아이디어의 원천을 찾는 노력은 새로운 혁신의 원천이며, 이는 사회적기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인도에 있는 아라빈드 안과병원은 백내장 수술을 전문으로 한다. 이 병원은 수술 과정에 제조업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적용했다. 우선 기술혁신으로 백내장 수술에 꼭 필요한 인공수정체의 가격을 대폭 낮추었다. 수입산이 보통 200~300달러인 반면 아라빈드 안과병원이 사용하는 인공수정체는 5달러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백내장 수술에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적용해 의사 한 명이 맡은 영역을 옮겨 다니며 여러 명의 환자를 동시에 집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의사들의 수술 효율성 및 생산성이 혁신적으로 개선되었으며,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 인력의 수술 준비 과정을 분업화하여 시간 손실을 최소화했다.

아라빈드 안과병원(www.aravind.org)

아라빈드 안과병원은 수술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120여 명의 의사가 하루에 약 70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그중에 약 850여 명을 수술한다. 저렴한 시술비로 백내장 수술이 이뤄지지만 아라빈드 안과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훨씬 높은 40퍼센트에 달하는 영업 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가난한 사람을 위한 무료 시술이 전체 환자의 약 6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효율을 극대화하여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를 통해 남는 수익은 병원이 아닌 가난한 환자를 위해 사용한다. 아라빈드 안과병원은 백내장 수술의 혁신을 이뤄내어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밝은 세상을 선물해주었다.
-《사회혁신 비즈니스》 본문 중에서

2010년 이후 우리 사회에는 혁신을 추구하는 아쇼카형 사회적기업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혁신을 가르치는 강좌가 생기고, 몇몇 대학 경영학과에 사회적기업 관련 과목이 개설되기도 했습니다. 에스케이(SK)그룹은 사회적기업가 경영학 석사과정(MBA) 개설을 위해 카이스트와 손을 잡았습니다. 스탠퍼드, 하버드, 버클리, 듀크, 와튼, 옥스퍼드 등 세계 유수의 대학 엠비에이(MBA)에는 이미 사회적기업이나 사회혁신과 관련된 전공과목이 개설되어 있습니다. 경영대학뿐 아니라 디자인, 공학 관련 수업에서도 ‘사회적~’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교과목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아쇼카, 에코잉 그린(Echoing Green)이나 슈왑 재단(Schwab Foundation)과 같은 세계적인 기관들도 사회적기업가를 발굴, 육성하고 사회적기업가들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하고, 정・재계 주류 인사와 적극적인 교류를 도모하며 사업 확대에 필요한 자원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기업 및 협동조합 육성책이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세계적인 흐름에 충실하면서도 국내 상황에 적합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고 교육 주체들은 책임의식을 갖고 지속가능하고 창의적인 사회적기업가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해야 합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사회적경제 생태계가 꽃피우기까지 30년의 시간이 걸렸듯이 어쩌면 한국에 사회적기업이 뿌리내려 생태계를 이루며 건강한 모델이 형성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적기업가를 인스턴트식 강의 몇 개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비영리 분야도 기업가적 면모를 살리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구조개편에 들어가는 사례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기업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제 영리, 비영리 분야 할 것 없이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란 기업활동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말합니다. 재활용을 사업으로 하는 환경기업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일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거나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서비스 대상자들의 자존감이 향상되는 등 개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일부터 사회인식과 제도를 바꾸는 모든 과정이 바로 사회적 가치의 창출입니다.

《사회혁신 비즈니스》의 두 저자는 영리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을 기울이고, 비영리 분야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의 장점들을 받아들이고, 영리와 비영리 분야의 협력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사회혁신 비즈니스’라고 규정합니다. 달리 말해 사회혁신 비즈니스란 ‘기업과 사회문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긍정적인 변화와 혁신을 일으키는 비즈니스’를 의미합니다. 

이는 기업의 단순한 사회공헌이 아닌 ‘기업의 사회혁신’이며, 일자리 창출형 사회적기업을 넘어서는 ‘사회적기업을 통한 사회혁신’을 의미합니다. 사회혁신 비즈니스는 사업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입니다. 오늘 소개한 공공의료 부문의 사회혁신의 사례와 같이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사회문제 해결을 이루는 의미 있는 기업이 많이 생겨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1. 기업의 체질 및 구조와 경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하여 경쟁력을 확보하는 경영혁신 기법. [본문으로]
  2. 품질혁신과 고객만족을 달성하기 위해 전사적으로 실행하는 21세기형 기업경영전략. 1980년대 말 미국의 모토로라에서 품질혁신 운동으로 시작된 이후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텍사스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소니(Sony) 등 세계적인 초우량기업들이 채택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본문으로]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지난해 11월에 출간한 생각비행의 책, 《르네상스의 어둠―빛의 세계에 가려진 11가지 진실》이 2013년 1월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일전에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고등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표적인 퀴즈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도전! 골든벨〉 문제로 소개되었습니다.

세간에 '르네상스'는 굉장히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요? 르네상스기를 그저 '예술과 문화가 찬란하게 발달한 시대'라거나 그 시기에 일어난 '과학기술의 발달로 서구가 세계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폭이 좁은 이해에 불과합니다. 《르네상스의 어둠》은 르네상의 시기의 이면을 11가지 열쇳말(예술, 약탈, 해적, 전쟁, 흑사병, 종교개혁, 과학, 마녀, 노예, 제노사이드, 제국주의)로 탐색하면서 빛의 세계에 가려졌던 진실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런 책이 학생들에게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저희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도전! 골든벨>, 그것이 궁금하다

<도전! 골든벨>은 원래 1998년 10월 16일에 처음으로 방송된 <접속! 신세대>라는 프로그램의 일부 코너로 시작되었습니다. 1999년 1월 8일 10회 방송부터 '골든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코너는 꾸준한 인기를 얻은 결과 1999년 9월 3일 방송부터 포맷을 바꿔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출처: KBS 도전! 골든벨)

(출처: KBS 도전! 골든벨 누리집)

프로그램 소개에도 잘 나와 있듯이, 퀴즈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매회 각 학교의 대표 100명이 참가합니다. 50개의 문제가 출제되는데 오답을 쓴 학생은 장외로 나가게 되어, 문제를 풀수록 살아남은 사람의 수가 점점 적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갈수록 흥미진진해집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1명이 50번째 문제까지 정답을 맞히면 골든벨을 울리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누리게 되니, 학생 개인은 물론 학교 전체로도 기념이 될 만한 일이겠지요. 또한 <도전! 골든벨> 프로그램은 단순히 지식을 대결하는 퀴즈쇼 형식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재치와 끼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많은 고등학생이 출연하고 싶어하는 대표적인 퀴즈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도전! 골든북' 문제로 선정된
《르네상스의 어둠》


<도전! 골든벨> 프로그램에는 '도전! 골든북'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보통 20번대 문제로 들어가는데요, 한 권의 책을 선정하여 참가자들에게 미리 읽게 한 뒤 책 내용에서 문제를 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2013년 3월 31일 방송에는 수원 조원고등학교 학생 100명이 골든벨에 도전했습니다. 이번 방송에서 '도전! 골든북' 코너인 27번 문제에 도달하기까지 60명의 학생이 탈락했습니다. 그리하여 '도전! 골든북' 문제에는 40명이 도전했습니다.

(출처: KBS 도전! 골든벨)

르네상스의 전성기인 16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의사였던 이 사람은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고 자신의 의술에 회의를 느껴 점성술사가 되는데요, 4행시의 예언서 《제세기(諸世紀)》를 통해 미래를 예언해 오늘날까지도 주목받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떻습니까? 답을 아시겠습니까? 《르네상스의 어둠》을 읽지 않은 분이라도 이 사람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신 분도 계실 테지요. 그런데 고등학생들에겐 이 문제가 조금 어려웠나 봅니다. '도전! 골든북' 문제에 도전한 40명의 학생중 무려 10명이 답을 맞히지 못해 장외로 나갔습니다. 

(출처: KBS 도전! 골든벨)

이번 방송에 출제된 '도전! 골든북' 문제는 생각비행이 출간한 《르네상스의 어둠》 제5장 '흑사병―인구 집중이 낳은 엄청난 재앙' 편에 나오는 인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서양, 특히 중세를 폄하하는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목욕과 흑사병입니다. 중세 유럽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아서 더러웠고, 그러다 보니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수시로 창궐해 수천만 명이 떼로 죽어나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 학자들의 방대한 문헌 탐사와 자료 조사 덕분에 이러한 통설은 지나치게 과정되었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실 중세 초기에는 오히려 위생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벌어진 대혼란 때문에 도시에 사는 인구가 적었고, 많은 사람이 흩어져 시골에 살고 있었으므로 전염병이 쉽게 창궐하지 않았다. 미국의 맥닐 교수에 의하면 767년 이후 약 600년 동안 유럽을 포함한 기독교 지역에서는 흑사병 같은 대규모의 전염병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중세 유럽인들이 목욕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할 줄 몰랐다는 말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 가난한 농노조차 마을의 개울이나 호수, 강에서 몸을 자주 씻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먼 곳까지 나가기를 귀찮아해서 집에 욕조를 마련해놓고 하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시켜 목욕을 했다. 또한 중세 기사들은 서임식을 앞두고 전날 밤에 반드시 목욕을 했다.
미개하고 잔인한 야만인 정도로 알려진 바이킹들도 알고 보면 목욕을 자주 했다. 바이킹들은 마로니에 열매를 빻아서 비누를 만들어 매주 토요일마다 거품을 내어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사우나(한증막)에서 하는 증기욕을 개발한 이도 바이킹이었다.
중세 유럽에도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중세가 안정기로 접어든 12세기 이후가 되자, 많은 도시에 공중목욕탕이 들어서서 인기리에 영업했다. 개중에는 탕 안으로 매춘 여성을 들여보내어 일석이조의 수익을 노리는 목욕탕도 있었다.
이렇듯 중세 유럽인이 씻지 않고 지저분하게 살았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니며, 지나치게 과장된 편견으로 보아야 한다.
_《르네상스의 어둠―빛의 세계에 가려진 11가지 진실》 본문 중에서

그렇다면 14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흑사병이 그토록 빨리 유럽 전역으로 퍼져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얄궂게도 르네상스 이후 유럽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각지에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로 인한 인구 밀집이 원인이었습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동방 교역으로 부를 쌓으면서 농촌에서 살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다 보니 자연히 전반적인 위생 수준이 나빠진 것입니다.

도시 빈민도 전염병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시로 간다고 해서 모두가 일확천금을 얻어 잘살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가족같이 지내던 작은 마을에서 농사만 짓고 살던 순박한 농민들은 영약한 도시 사람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렵게 돈을 마련해서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 교활한 사기꾼에게 걸려 신세를 망치기 일쑤였습니다. 다행히 일자리를 얻더라도 항구나 가내 공장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일용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일자리마저 잡지 못한 농민들은 구걸을 하거나 소매치기가 되어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6세기에 흑사병은 맹위를 떨쳤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헨리 8세 시절 흑사병이 런던에 창궐하여 한동안 궁정 신료들이 병을 피해 시골로 피난하기도 했습니다. 1592년 흑사병이 런던에 다시 퍼지는 바람에 영국이 낳은 전설적인 문호 셰익스피어가 기획한 연극은 상영 중지를 당했고, 극장들도 한동안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연극을 보려 극장에 사람이 모이면 흑사병이 퍼질 수 있다는 정부의 우려 때문이었죠.

<도전! 골든벨> 문제와 연관된 본격적인 내용은 다음의 내용에 나옵니다. 인물의 이름은 문제와 같이 이 사람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같은 시대 프랑스에서도 흑사병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언자 이 사람의 원래 직업은 점술가가 아니라 의사였다. 그가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1526년부터 프랑스 남부에는 흑사병이 유행했다.
사람들이 흑사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 사람은 의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치료약을 만들어냈다. 장미꽃잎과 붓꽃iris에서 짜낸 기름과 도금양나무의 말린 꽃가루를 섞어 만든 약이었다. 얼마 동안 이 사람이 만든 약이 흑사병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흑사병에 걸렸을 때 그토록 자신 있어 하던 약이 전혀 듣지 않았다.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은 이 사람은 의사로서 자신의 의술에 회의를 느꼈고, 의학으로도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의사 신분을 버리고 점성술사가 되어 미래를 예견함으로써 사람들을 구하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_《르네상스의 어둠―빛의 세계에 가려진 11가지 진실》 본문 중에서

자, 이제 답을 아시겠습니까? 학생들은 과연 어떤 답을 제시했을까요?

(출처: KBS 도전! 골든벨)

네. 정답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였습니다. 이번 방송에서 '도전! 골든북'의 문제는 단순히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사람의 이름을 아는가를 확인하려 했다기보다는, 르네상스 시기에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어야 했던 한 인간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흔히들 '빛의 세계'로 알고 있는 르네상스기의 이면에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어두운 사실이 많이 있음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

14세기 중엽부터 르네상스의 시기를 거쳐 유럽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흑사병은 177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것을 끝으로 유럽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과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을까요? 확실한 통계는 없으나 최소한 3000만에서 4200만 명은 될 것으로 추측합니다. 서구의 역사학자 사이에서는 흑사병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을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빛과 이성의 시대로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에 어떠한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던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공포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야야 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많은 분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일전에 저희는  <사회적기업이란 무엇일까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기사에서 공정무역 커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공정무역 커피를 즐기는 분도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회적기업' 혹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커피산업과 연관되는지 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스타벅스는 세계 40여 개국에 1만 6000여 개의 매장을 둔 세계적인 커피 체인입니다.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말로 성공적인 마케팅전략을 설명하기도 했죠. 그런데 스타벅스가 세계 최대의 공정무역 인증 커피 구매업체 중 하나라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스타벅스는 2012년 전체 원두 구매량의 8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3430만 파운드의 공정무역 인증 원두를 구매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공정무역 커피를 구매한다고 해서 스타벅스를 좋은 기업이라고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작년 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습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스타벅스 불매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스트벅스의 하워드 슐츠가 과격 시오니스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졌고, 스타벅스 운영으로 거둔 수익의 상당액이 이스라엘 군수산업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둘러싼 사회, 문화, 정치적 상황이 참 기막힙니다. 세상 일이란 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이라지만,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독립, 하셨습니까?]를 연재하는 이은 씨가 지난 2월에 '커피 콘텐츠 기획자' 박우현 씨를 만났습니다. 원고를 지난 2월에 보내주었는데요, 3월에 나올 생각비행의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과 겹쳐 제때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두루 양해를 구합니다. 찬찬히 읽어보시면 누군가의 커피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커피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커피를 드셨나요?


커피 라이터 박우현 씨가 말하는  
커피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휩쓸고 지나고 있다. 이 땅에 커피산업이 번성하게 된 과정 말이다. 갑자기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번성하고 목 좋은 번화가 길목마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생겨나더니 급기야 동네 골목까지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이 커피문화의 확산 속도를 근대화 과정만큼이나 재빠르다고 느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믹스커피 문화의 반대편에 있는 아라비카 커피 시장의 팽창과 공정무역 커피의 개발과 보급, 확산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품화된 공정무역 커피는 아름다운가게가 내놓은 ‘히말라야의 눈물(네팔산)’이었다. 당시 가게에서 활동하며 이 과정을 주도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우현 씨다.

10년의 세월 동안 변한 것은 커피를 둘러싼 사회적 현상만이 아니다. 커피를 통해 그의 삶도 변했다. 박 씨는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이 아니라 전업주부, 영화기획 프로듀서, 잡지사 기자, 회사원 등을 거쳐 공정무역 커피를 들여오는 일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폭넓은 시도와 변용이 가능했고, 지금과 같은 커피(에 관해 쓰는) 저술가, 그의 표현대로 ‘커피 콘텐츠 기획자’가 될 수 있었다.
 
커피에 관한 책이야 많이 접했지만, 그가 쓴 《커피는 원래 쓰다》가 여느 책과 다른 점은 일단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커피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혹은 스토리텔링이 접목된 커피문화사랄까. 인류사에 커피가 등장한 지 추산하기론 약 1000년, 그다지 오랜 세월이 아닌데도 사료가 충분하지 않아 상상으로 그 틈새를 메워야 하기에 더욱 흥미롭다. 커피의 역사에 관한 자료가 왜 그토록 남아 있지 않은지 짐작할 만도 하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에 따르자면 커피는 (서구에서는) ‘이교도의 음료’였다. 음주를 금기시해 커피를 즐겨 마시던 이슬람 문화권에서 커피의 위상이란 독일의 맥주, 아시아의 차문화 사이 어딘가 혹은 그 둘을 더한 것만큼 일상적인 무엇이었을 터다.

커피의 등장, 생각의 발견
 
커피와 카페에 관한 책이야 근래 발에 채고도 남을 만큼 많이 나왔지만, 박우현 씨의 책이 돋보이는 점은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데 있다. 커피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야 가설이 많으니 아주 새롭지는 않다고 해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으로 ‘정약용’을 추론한 것은 꽤 흥미롭다.
 
“커피에 관해 재미난 이야기가 많아요. 미국이 베트남전에 패망한 이유가 커피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어요. 인스턴트커피(나쁜 커피)로 찌들었던 미국이 전쟁에 지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던 시기, 비교적 양질의 커피를 표준화한 스타벅스가 창업한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커피 견문록》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커피에 얽힌) 재미난 얘기가 많은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를 가는 바람에 즐겨 마시던 커피가 끊겨서 어렵게 구해 마셨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지어서 썼어요.”
 
이렇듯 커피가 매력적인 까닭은 역사, 문화,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매우 다양한 텍스트로서 그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면 뇌 작용이 활발해져 생각이 깨어나게 된다는 것도 단지 우연만은 아니리라. 우연한 기회에 커피를 업으로 삼게 된 그가 이토록 매료된 것만 보아도 커피의 치명적 매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2005년경, 프리랜서로 영화 일을 하며 이래저래 생겨나던 카페들을 떠돌며 일하던 그에게 생경한 제의가 들어왔다. 아름다운가게에서 ‘별난사업국’이란 이름의 새로운 팀을 만드는데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의 진두지휘 아래 성장을 거듭하던 아름다운가게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혁신적인 방식과 구성으로 팀을 꾸리려 한 배경이 있었다. 이 사업국의 아이템으로 최종 선정된 것이 재활용사업(에코파티 메아리 등 재활용 디자이너 브랜드 론칭)과 공정무역 커피 론칭 사업이었다.

“당시 한국 시장은 아라비카 시장도 미미하고 로스터리 카페가 막 생겨나는 시점이었어요. 시장이 너무 작아서 공정무역과 아라비카를 동시에 알리는 게 힘들었어요. ‘네팔리바자로’라고 네팔만 도와주는 일본 엔지오에서 네팔 원두를 어렵게 구했어요. 1년에 10톤을 재배하는데 판로가 없어서 절반을 버린다고 하더군요. 도와달라고 요청했더니 생산자가 흔쾌히 한국까지 와서 도와주고, 전광수 선생도 재능기부를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직접 원두를 볶다가 물량이 달리니까 공장에 로스팅 시스템을 만들어주셨어요.”
 
세계적으로 아라비카 커피가 90퍼센트 정도 통용되고 있지만, 정작 ‘공정무역’이라는 공인된 시스템에 속한 커피의 수급량은 미미했다. 아름다운가게는 애초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공정무역 원두를 브랜드로 양산하는 것은 물론 공정무역 커피믹스를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네팔 공정무역 커피가 탄생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착한 소비’를 내세우는 마케팅을 등에 업고 대형마트와 편의점까지 입점한 아름다운커피는 공정무역 커피의 동의어로 통용될 정도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개발부터 론칭까지 대략 1년 반, 양산과 보급은 후임 활동가에게 맡기고 박 씨는 가게를 나왔다.

요즘 카페는 차별된 공간으로 만드는 분위기, 사람의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 사진은 홍대 카페 디스트릭트 D에서 찍은 것. 인위적인 색채를 배제한 빈티지한 톤도 요즘 인기다. 

그 뒤로 전광수커피하우스의 전광수 선생과 함께 프랜차이즈 가맹을 시작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기계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로 만드는 커피가 아니라 다양한 산지별 원두로 핸드드립(쉽게 말하면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내려 마시는 커피)에 주력하는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이다. 전광수 아카데미를 이수한 사람 중 ‘슬로우 커피’라는 본연의 방식에 충실하려는 이들을 모아 가맹점을 내는 일을 했다. 그런데 고작 점포 5곳을 론칭하고는 이내 다른 일을 벌였다. 가맹 담당 직원을 뽑아 일을 맡기고서 ‘킹콩커피’라는 원두 판매 온라인 숍을 운영하고 ‘카페인’이라는 커피문화 웹진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직업이 대체 몇 개인지 헛갈릴 지경이지만, 어차피 ‘커피’나 ‘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통용될 만한 일들이다.
 
“저는 바리스타도 아니고, 로스터도 아니고, 냉철한 사업가도 못 되니 커피에 관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 적성에 맞더라고요. 웹진에 실은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내면서 ‘작가’란 타이틀도 얻게 됐지요.”
 

커피로 다양한 문화적 변용을 꿈꾸다

 
고종이 ‘고히’를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으니)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커피 문화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계기는 한국전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군의 인스턴트커피에 맛 들인 한국인들이 결국 세계 최초로 믹스커피를 양산해낸 것이니. 1964년 이후 근 40년 동안 우리나라는 믹스커피의 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든 빠른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습성이, 빠르고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에스프레소 전문점에 쉽사리 적응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공정무역 커피는 이래저래 식민지 역사와 연관이 깊다. 유럽이 처음 공정무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에 반기를 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수익의 일정 정도를 분배해야 돌아갈 수 있어요. 미국이 중남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 커피를 제값 주고 사주다가 더 보호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국제커피기구에서 탈퇴해버려요. 미국의 4대 커피회사가 산지를 베트남으로 바꿔버리니 안 그래도 떨어진 커피 값이 더 폭락하게 돼요. 유럽에서 그걸 보자니 미국 주도로 세계가 움직이는 것 같아 기분도 나쁘고 해서, 과거 식민지에서 수탈하던 일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지식인들이 ‘공정무역’을 만든 거예요.”
 
커피는 주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돼, 주된 커피 소비국인 선진국으로 흘러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친다. 그 안에 들여다보아야 할 노동 현실과 국경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넘실거린다. 커피를 단순히 하나의 산업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 혹은 성찰과 실천이 필요한 무언가로 봐도 좋은 이유다.
 
“어느 언론이 ‘커피 컨설턴트’란 이름을 붙였던데, 그 말은 좀 그래요…. 제 인생도 책임 못 지는데 어떻게 남의 일을 컨설팅하겠어요? (웃음) 그저 제 경험을 조금 나눌 수 있는 정도죠. 카페 서비스는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고, 감성적인 비즈니스예요. 어마어마한 일이지요. 이걸 단순히 매뉴얼화하거나 주5일 근무에 익숙한 사람들이 대책 없이 시작하면 안 돼요. 자영업도 작은 기업을 꾸리는 일인 만큼, 이것저것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사람들과 함께’ 해나가도록 차근차근 준비해야 합니다.” 

그의 작업실 '화수목'. 빈 공간이 사람의 온기와 커피향기로 채워지는 순간이 가장 빛나는 때가 아닐까.

박우현 씨는 오랫동안 살던 종로 안국동의 한옥을 떠나 용인시 수지 동천에서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커피가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커피문화 교실을 여는가 하면, 작업실에서 상영회와 토론회를 겸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커피를 만나는 일을 벌이고 있다. 공간 한쪽에는 헌책방을 열어 책과 커피가 공존하는 공간을 꿈꾼다. 그의 작업실 이름은 ‘화수목’. 커피에 필수적인 나무(커피체리)와 물과 불(로스팅)을 담은 이름이기도 하고, 일주일에 3일만 일하고 싶다는 바람도 담아 지었단다. 물론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족의 이해와 지원도 필요하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맡았기에 가족의 유대감이 남다른 듯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된 덕분에 삶에 쉼표를 허락하는 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에 관해 할 이야기가 여전히 많은 그는, 또 다른 꿍꿍이를 준비 중이다. 커피와 영화를 접목하는 일이 그것이다. 연출된 다큐멘터리(페이크 다큐)의 형식에 유에프오에서 커피가 내려온다거나 하는 SF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이래저래 생각을 엮어내는 중이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이, 커피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커피란 삶의 매뉴얼을 새로 쓰게 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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