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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이제 진일보한 사회로!

by 생각비행 2019. 4. 12.

낙태죄가 드디어 폐지됩니다. 법이 제정된 지 66년 만이며, 지난 2012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 이후 7년 만입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해당하는 형법 조항 제269조 1항, 제270조 1항에 대한 위헌 여부 판단에서 헌법불합치 4명, 단순위헌 3명, 합헌 2명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 뜻깊은 판결이 나와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출처 - JTBC


'헌법불합치'는 위헌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지만 위헌처럼 해당 법이 즉시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법률의 공백에 따른 혼란과 대처를 고려해 한시적인 시간 안에 개선 입법을 하라는 판결입니다.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국회에서 법을 개정하도록 주문했습니다. 이 기한이 지나도록 개선 입법이 되지 않으면 그 법률들은 위헌 판결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무효가 됩니다.


출처 - 청와대


이번에 헌법불합치 판정으로 사라지게 될 조항은 낙태한 여성에게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 200만 원 이하를 선고하도록 한 269조(자기 낙태죄)와 낙태를 도운 의사 등에게 징역 2년 이하를 선고하도록 한 270조(동의낙태죄)입니다. 수많은 여성과 여성의학과 교수들이 안 그래도 힘든 때에 이 법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보통 이 문제를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대결로 보곤 합니다만, 관련된 사건들을 보면 이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대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와 국가 간의 대결 구도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생각비행도 이런 시각에서 여러 차례 낙태죄 폐지에 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출처 - 시사IN

여성 탄압의 굴레, 낙태죄 폐지하라! : https://ideas0419.com/669

혜화역 시위와 낙태죄 폐지, 여성 인권 신장 계기 되길 : https://ideas0419.com/840

낙태 여성 조사 위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압수수색한 경찰 : https://ideas0419.com/911

 

사실 이번 낙태죄 위헌 판결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습니다. 7년 전 헌법 소송이 합헌으로 판결이 나기는 했지만 4:4, 문자 그대로 턱걸이 합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진보하고 개인의 인권에 대한 존중이 높아지며 낙태죄라는 법은 사실상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얼미터 현안 조사에서도 남녀노소,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국민 10명 중 6명은 낙태죄 폐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일하게 60대 이상만이 찬성과 반대가 팽팽했으나 미세하게 낙태죄 폐지 찬성의견이 높았습니다. 여성들의 시각은 어땠을까요? 낙태죄 폐지 찬성 응답 비율이 75%가 넘었습니다. 2010년까지만 해도 낙태 찬성 비율이 33%에 불과했던 점을 보면 인식이 참으로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와 여성의 인권에 대한 배려와 감수성이 진보한 것입니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헌법불합치냐, 단순 위헌이냐의 갈림길이었을 뿐입니다.


출처 - SBS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4명의 헌법재판관은 "모자보건법상의 정당화사유에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갈등 상황이 전혀 포섭되지 않는다"며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해 낙태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경우까지도 예외없이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 및 출산을 강제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형사처벌한다는 점에서 위헌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태아의 생명은 여성의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죠. 다만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해 각각 단순위헌 결정을 할 경우, 임신기간 전체에 걸쳐 행해진 모든 낙태를 처벌할 수 없게 됨으로써 용인하기 어려운 법적 공백이 생기게 된다"고 하여 유예를 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것입니다.


출처 - 한국경제


단순위헌 의견을 낸 3명의 헌법재판관은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임신 제1삼분기(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에는 어떠한 사유를 요구함이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옹호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와 반대로 합헌 의견을 낸 2명의 헌법재판관은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의 허용은 낙태의 전면 허용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해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며 "우리도 태아였다"는 다소 감정적인 표현을 동원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이성적으로 더 막을 방법이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까요? 종교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태아와 출생한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인데, 이건 현행법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 형법은 태아를 임산부 신체의 일부로 보거나 임산부 폭행 등 어떤 행위로 인해 태아가 사망하여도 태아의 사망만으로는 임산부에 대한 상해죄나 태아에 대한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태아는 살인죄의 객체조차 아닌 셈이죠. 그저 낙태죄에 있는 부동의낙태죄에 해당할 뿐입니다. 태아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면 과실치사나 살인죄로 처벌해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출처 - 뉴스1


종교계가 이야기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충분히 공감해야 하겠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잣대와 방향이 너무나 잘못 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동안 낙태죄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여성을 지배하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더는 존속해서는 안 되는 악법입니다. 최근 5년간 전국 법원에서 이뤄진 낙태 관련 판결 80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여성을 고소한 사람 대부분이 그 여성을 임신시킨 남자친구 또는 남편, 또는 그 남성 측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이혼 소송이나 양육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거나 이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를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낙태죄를 악용하고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마치 불법촬영물로 여성을 협박하는 남자들처럼 낙태 사실을 소문내겠다며 낙태죄를 이용해 여성들을 협박하는 도구로 삼고 있었던 겁니다. 낙태죄에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쏙 빠져 있다는 질책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태아가 성인과 다름없는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면 누구보다 그 생명을 잉태한 여성을 협박하고 생명을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남성을 가장 무겁게 처벌했어야 했을 텐데 말이죠. 현재 낙태죄가 폐지되었으니 낙태 이력을 남기라고 악플을 달고 다니는 남성들은 여성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참으로 한심한 부류일 뿐입니다. 


출처 - 한국여성민우회


녹색당은 헌재의 결정에 대한 논평에서 "여성들이 겪어온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결정이지만, 오늘이라도 이런 결정이 나온 것을 환영한다"며 2020년 12월까지 국회는 법개정 논의를 통해 여성의 자기결정권, 안전한 임신중지권 그리고 평등한 재생산권의 실질적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법개정을 해야 한다. 만약 이 과정에서 또다시 낙태죄를 변칙적으로 존속시키려 하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 정치세력은 2020년 총선에서 낙태죄 폐지방안에 대해 책임있는 정책을 내놓고 유권자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 녹색당

 

낡은 시대의 법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입니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국회는 적극적인 개정 입법을 시작해야 합니다. 아울러 낙태 시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등 행정적인 지원은 물론 의료계에 대한 교육과 지원 역시 필요하겠죠. 교육 현장에서도 현실적인 피임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성교육이 동반되어야 하며, 여성들에게는 임신 중단 상담을 위한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는 장소나 행정요원이 필요합니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시대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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