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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여성 탄압의 굴레, 낙태죄 폐지하라!

by 생각비행 2017. 11. 28.

청와대는 한 달 안에 20만 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에 대해 담당자가 관련 답변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청원에 대해 지난 26일 조국 민정수석이 공식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오늘은 '낙태죄' 문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출처 - 청와대

 

출처-청와대

 

현재 우리나라 형법 269조, 270조는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법 제269조 1항은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했고, 형법 제270조 1항은 의사나 한의사 등이 동의를 얻어 낙태 시술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동의가 없었을 땐 징역 3년 이하에 처하도록 하고 있죠. 

 

예외 사항으로 모자보건법 14조 1항에 따라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는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한 여성은 물론 시술한 의사까지 처벌하도록 하면서도 낙태를 시키거나 동의한 남성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습니다. 뭔가 이상하죠?

 

출처-청와대

 

근본적으로 여성의 선택권을 무시했던 낙태죄는 우리 사회에서 사문화되어 왔습니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1년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한국 형법 조항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낙태죄가 한국 여성의 건강과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 권리로 규정했습니다. OECD 30개국 중 23개국이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으며, 이 중 다수가 공공 의료체계를 통해 여성이 필요한 경우 안전하게 임신중단 상담과 진료를 받고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출처 - 청와대 

 

그런데 모든 것을 과거로 퇴행시켰던 박근혜 정권은 음성적으로 이뤄지던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보고 처벌을 강화하려 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죠. 여성단체는 물론이고 의사협회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낙태죄를 강화할 경우 오히려 피해가 여성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2006년 세계보건기구 연구를 보면 매년 전 세계에서 2000만 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고 그중 6만 8000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신중절을 불법화하고 낙태죄로 처벌하는 것은 여성을 음성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절 시술로 내모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은 시술로 여성은 건강을 위협받고 사망률은 높아집니다. 낙태 수술을 금지한 필리핀만 보더라도 모성 사망률이 치솟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론이나 사회적 합의도 없이 처벌만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박근혜 정부의 특기였지만,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려 했던 경우는 국가의 폭력, 위선의 극치였습니다. 수많은 여성의 시위와 민원, 의사들의 항의가 빗발쳐 낙태죄 형량 강화 시도가 무산되긴 했으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여전히 불법입니다.

 

출처 – 한국 여성의 전화

 

낙태를 신고하겠다는 위협을 빌미로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관계를 강요하거나 협박을 하는 사건들은 지금도 버젓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제는 인식을 바꾸고 법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낙태죄 폐지는 임신 중단의 '권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임신 중단과 지속의 선택은 여성의 삶을 건 중요한 결정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복합적인 현실을 들여다보지 않고 여성의 결정을 범죄화하거나 여성을 범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 한겨레


녹색당은 2017년 9월 29일 임신중지를 개인의 도덕성 여부로 환원하는 것은 피임과 임신,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숱한 사회정치적 문제와 구조를 은폐하고 공동의 행위인 임신을 여성 일방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는 일이 된다며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논평을 낸 바 있습니다. 

 

출처 - 녹색당

 

아울러 아이를 낳아 키우는 데 최소한의 안전망이 갖춰진 사회적 토대, 피임이 당연하며 여성이 주체적으로 피임을 제안할 수 있는 평등한 관계, 비혼모에 대한 편견 없는 존중과 제도적 보장, 다양한 가족 형태의 인정, 남성과 국가가 적극적으로 양육을 분담하는 등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면 여성이 건강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신중단을 할 이유가 줄어든다고 밝혔습니다. 피임, 임신, 임신중단, 출산, 양육의 전 재생산 과정을 여성에게만 책임 지우지 않고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라면 임신중단율은 당연히 낮아지겠지요.

 

출처 - 청와대

 

청와대가 정리한 위 도표를 보면 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는 사회, 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눈에 들어오는 도표가 있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출처-미디어브리지

 

표를 보면 낙태 불법화가 해결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낙태율을 줄이기 위한 낙태를 불법화하는 것은 위험한 불법 낙태를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 때문에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이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21》 1134호에 소개된 루마니아의 사례를 보면 이런 사실이 더 명확해집니다.

 

1966년 루마니아의 국가원수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낙태금지법 시행을 결정합니다. 이는 루마니아의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기인한 것인데요, 'Decree 770'이라고 불리는 낙태금지법은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으로 법이 폐기될 때까지 23년 동안 지속되어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루마니아와 세계보건기구의 몇몇 연구자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지속된 낙태금지법이 루마니아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1992년 미국 공중보건 학회지에 실었습니다. 

 

'Decree 770'이 시행되고 첫 4년 동안 여성 1인당 출산율은 두 배 증가하고, 인구 1000명당 태어나는 신생아 수를 지칭하는 조출생률은 14명에서 21명으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출산율 증가는 일시적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충분한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이라 의사에게 뇌물을 건네 낙태수술이 가능한 거짓 진단명을 받아내는 사람이 늘어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은 의사의 도움 없이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불과 4년 뒤인 1970년부터 조출생률은 다시 감소하고 1985년에는 법이 시행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Decree 770'이 낙태뿐 아니라 피임 제한까지 포함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낙태금지법을 통해 출산율을 높이려 한 시도가 실패했음이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아원 등의 시설에서 자라나는 아이 수가 증가하게 된 것이죠. 'Decree 770' 때문에 많은 여성이 원치 않은 아이를 낳은 결과였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키울 경제적 자원도, 스스로의 동기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시설에 맡겨졌습니다. 열악한 시설에서 아이들은 영양결핍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유아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출처 - 《한겨레21》

 

그리고 모성사망비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의사로부터 안전한 수술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많은 여성이 불법 시술을 했고 이로 인해 여러 합병증을 앓으면서 매년 500여 명이 출혈과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 낙태금지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1966년에 비해 1983년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7배 높아졌으며, 1989년을 기준으로 루마니아는 주변 국가인 불가리아나 체코보다 9배 가까이 높은 모성사망비를 보였다고 합니다. 1989년 12월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폐된 다음 해에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습니다. 이는 낙태금지법이 모성사망비 증가의 원인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임신중단을 결정한 여성을 형법으로 처벌하는 사회는 여성을, 여성의 삶을, 여성의 판단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인구가 많을 때는 낙태죄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다가, 이제 출산율이 낮다고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을 탓하는 것은 국가 폭력이며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성을 탄압하는 낙인의 굴레 낙태죄를 폐지하고 임신, 출산, 육아를 여성의 책임으로만 강요하는 사회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자연유산 유도약의 합법화 여부도 이러한 사회적·법적 논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에서 임신중절 관련 보완대책도 다양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프란체스코 교황의 발언을 인용하며 임신중절에 대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도 밝혔습니다. 청와대의 이번 답변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한 공론화가 본격화할 양상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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