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를 선언하면 그 순간 끝이 아닌가. 박 전 대통령은 탄핵을 택했는데, 당시엔 헌재에서 기각될 걸로 기대했던 것 같다. 김기춘 비서실장 등 청와대에 있는 모두가 100% 기각이라고 봤다. 기각되면 광화문광장 등이 폭발할 것 아닌가. 그래서 기무사령관한테까지 계엄령 검토를 지시한 것이다" - 2021년 4월 26일 시사저널 김무성 전 의원 인터뷰 중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국정농단의 도당들이 촛불집회 당시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알려지긴 했습니다만, 당시 여당의 대표이기까지 했던 사람의 입으로 관련 사실이 확인되어 새삼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과거 생각비행은 쿠데타 모의 관련 내용을 몇 번 다룬 바 있습니다.  (<촛불집회 당시 쿠데타 검토한 기무사, 이대로 괜찮은가?>, <국정농단 촛불집회 당시 쿠데타 모의한 기무사와 군>)

 

출처 - YTN

 

김무성 전 의원이 시사저널》과 나눈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었던 문재인과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었던 박지원 등 야권 핵심 인사들은 박근혜를 탄핵하는 것보다 하야를 주장했는데 자신은 탄핵 입장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두와 같은 발언을 한 겁니다. 당시 김무성만 탄핵 입장을 외친 것은 아니었으니 정치인으로서 앞가림하려는 의도가 농후합니다만, 당시 여당 대표까지 지낸 사람이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발언한 내용이라 무게감이 있는 내용입니다. 김 전 의원의 주장에 의하면 박근혜 탄핵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친위 쿠데타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YTN

 

사실 우리는 국정농단 폭로로 인한 시위가 한창이었던 지난 2016년 11월 18일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계엄령 선포와 친위 쿠데타에 대한 경고를 들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극우언론은 물론 시위 중인 시민들까지 이 상황에 뜬금없이 계엄령 소리가 왜 나오냐,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의견이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7월 2017년 3월 자로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방안> 문건이 공개되면서 관련 내용이 사실임이 드러났죠. 추미애 전 대표는 김무성의 탄핵비화 인터뷰 후 당시 야합이라고 비판받던 김무성 전 대표와의 만남이 탄핵 추진에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추미애 전 대표는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서 용기 있는 고발을 했습니다. 이 경고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가 현재의 미얀마보다 더 극단적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친위 쿠데타 세력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테니 말입니다. 그 정도로 당시 계엄령 모의는 작전, 지휘, 감독, 언론 통제 등 실행 방법까지 담겨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었습니다.

 

출처 - KBS

출처 - 한겨레

 

이 정도의 사실관계가 확인됐다면 당시 쿠데타 세력을 내란 모의로 모조리 처단해야 마땅할 텐데 수년째 지지부진인 상황입니다. 계엄령 문건을 작성한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과 관련한 체포, 수사 등은 2018년 군검 합동수사단이 미국으로 도피한 조현천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며 기소를 중지한 상태입니다. 그 윗선인 박근혜 전 대통령, 황교안 전 국무총리, 김관진 전 안보실장,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한 수사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못 잡는 건지 안 잡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문가들은 여권 무효화 조치까지 된 조현천의 행방을 모른다는 건 그를 돕는 조력 집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복지부동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지 사라진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출처 - JTBC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탄핵 의지가 변함없다는 사실입니다. 야당에 대한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재보궐선거 시점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에 부정적이라는 답변이 과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재보궐선거에 승리하자마자 박근혜와 이명박 사면론을 꺼내 들었죠. 그러자 지지율의 거품이 순식간에 꺼져버렸습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재보궐선거에서 정점을 찍은 후 사면론을 꺼내든 이후로 3주 연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여당의 잦은 헛발질에 실망해서 재보궐선거에서 야당을 찍었을 수는 있지만 도로 한국당이 되는 것만큼은 눈 뜨고 봐줄 수 없다는 여론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난처해진 국민의힘은 뒤늦게 사면론에 선을 긋고 있지만 정작 당 내부는 친박과 비박이 분열되어 지난 정권의 망령을 붙잡고 퇴행 중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박근혜 친위 쿠데타 관련 사실을 확인해준 김무성 전 의원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국정농단 세력과 극우 기득권층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면 우리나라가 미얀마와 같은 반민주주의 사회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는 점이 확인됐습니다. 정부와 여당에 실망해 대안을 찾고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릴 무리에게 다시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재보궐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인 지난 8일 국회 앞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연내 입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그리고 노동당, 녹색당, 미래당, 진보당 대표들까지 원내건 원외건 크고 작은 정당 대부분이 모여 포괄적 차별금지법 연내 입법을 촉구했습니다. 국민의힘 같은 보수 정당은 빠졌습니다.

 

출처 - 뉴스핌

 

차별금지법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은 13년째 표류 중입니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국회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습니다. 다음 해 노회찬 민노당 대표가 발의한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로 자동폐기되었습니다.

 

출처 - 시사저널

 

이후 권영길 민노당 의원, 김재연 통진당 의원, 김한길, 최원식 민주통합당 의원이 각 국회마다 발의했지만 대부분 회기 만료로 자동폐기됐고 민주통합당의 발의안은 종교계의 반발, 정확히는 극우 개신교계 대형 교회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철회됐습니다. 당시 지방선거를 의식한 결과였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작년에도 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필두로 소속 의원 5명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이동주 의원,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발의했으나 이 역시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당시 극우 기독교계는 조간신문에 심상정과 차별금지법을 저격하는 전단을 살포하며 발의를 막으려 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한국 교회를 말살하는 반헌법적인 시도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그러나 이들은 한국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들이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라 차별과 혐오에 바탕을 둔 주장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듯합니다.

 

출처 - YTN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 인한 부작용이 여실히 드러난 바 있습니다. 작년 1월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가 학내 반발로 입학을 포기하거나, 성전환 수술이란 이유로 강제 전역시킨 국방부의 조처에 반발하다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변희수 하사의 예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여성 혐오, 장애인 혐오, 소수자 혐오, 민족 혐오와 차별까지 생각한다면 이제 우리나라도 차별과 혐오에 대한 기준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출처 – 한겨레

 

차별금지법은 병력과 출신 국가, 출신 지역, 인종, 피부색,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성적 지향, 학력과 학벌, 사회적 신분, 용모 등 신체 조건,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및 보호처분 등을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시하는 법입니다. 이 법 하나로 일시에 혐오와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무엇을 차별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제시하여 문제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14년 만에 다시 한번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을 국회의장에게 촉구했습니다. 평등법 시안 차별의 개념을 직접 차별, 간접 차별, 괴롭힘, 성희롱, 차별 표시 및 조장 광고고 나누어 각 개념의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아울러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유전정보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 21개에 해당하는 차별 사유를 명시했습니다.

 

출처 - MBC

 

그리고 차별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조항도 포함됐습니다. 악의적 차별이 인정될 경우 차별 행위자에게 재산상 손해액의 3~5배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가중 부과할 수 있게 했습니다. 차별 피해자와 그 관계자가 차별 내용을 진술, 답변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을 경우 불이익을 준 당사자에게 가중적 손해배상 무담과 함께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게 한 겁니다. 하지만 가장 첨예한 논란의 대상인 종교계에 대한 평등법 적용이 애매하게 되어 있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 문제는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의 발의안에 특정 종교단체 및 소속 기관에 대한 예외 조항이 들어가며 더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출처 - 시사IN

 

조계종은 종교를 예외로 둔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며 이상민 의원 발의안에 대해 아쉬움을 밝혔습니다. 특정 종교 단체와 소속 기관을 예외로 두면 종교 안에선 차별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종교 자체는 물론 그 종교법인의 학교, 병원, 사업체 등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차별금지법 적용이 애매해질 여지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차별금지법에는 종교도 명문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극우 개신교계에 의해 방화나 폭행 등 수많은 테러 행위를 당했던 불교계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작년 10월에도 개신교 광신도가 저지른 방화로 경기도 남양주 수진사가 전소된 사건이 있었죠. 개신교계 입장에서도 코로나19로 더욱 심해진 기독교 혐오를 막고 싶다면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면 좋을 텐데 동성애 반대와 선교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핑계를 대며 반대 입장을 취하는 쪽이 다수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종교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만연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포기와 변희수 하사의 사례가 단적인 예입니다. 이 외에 작년 8월 신촌역에 국가인권위가 설치한 성소수자 차별 반대 광고판이 총 7차례 훼손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 6번은 동일인물인 20대 남성이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죠. 그는 혐의를 인정하며 성소수자들이 싫어서 광고판을 훼손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상 속 차별을 태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도 차별금지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출처 - KBS

 

불행 중 다행으로 여론은 차별금지법에 우호적입니다. 작년 6월 인권위가 공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88.5%가 차별 금지 법제화에 찬성했습니다. 개신교계가 공격해온 성소수자 역시 동등하게 존중받고 대우받아야 한다는 응답도 73.6%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2019년 조사 때보다 찬성 비율이 15%나 높아진 결과여서 고무적입니다.

 

출처 - 한겨레

 

코로나19라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깊어지게 해준 셈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확진자가 되어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차별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이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국민 10명 중 9명은 자신도 언제든 혐오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역, 종교, 인종 등의 관점에서 혐오를 당하는 쪽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실감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72.4%는 지금 같은 수준으로는 사회적 갈등이 심해질 것이라고 답했고 81.4%는 차별이 범죄까지 유발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성 의견은 성별, 나이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민들의 뜻이 일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출처 - 뉴스1

 

그래도 여전히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신다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계속 벌어지는 아시아계 혐오와 차별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미국과 유럽에 가면 우리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언제든 나 자신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14년의 표류를 거친 차별금지법,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 등―이름은 무엇이라도 괜찮습니다―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멈출 법을 우리 손으로 제정할 때가 왔습니다.

4.7 재보궐선거의 여파로 다시 한번 여성 징집과 연관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여성도 징병 대상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청원은 이미 1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국방부는 사회적 합의가 먼저라고 선을 그었습니다만, 이 논란은 다른 청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성징병 대신에 소년병 징집을 검토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입니다. 한국전쟁 때도 학도병이 있었던 걸 감안해 병력 자원이 부족하다면 중고등학생도 징집하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출처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이 청원을 올린 이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정신이 온전한 상태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지구 어딘가에서 갈등과 내전 등의 상황에 내몰려 죽어가고 있을 소년병 문제를 생각한다면, 국내의 젠더 이슈와 관련하여 자극적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청원에 대해 동의를 주도하는 남초 커뮤니티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페미가 역풍을 맞게 하려는 것이죠.

 

출처 - 부산일보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한국에 살면서 병역 의무와 관련하여 억울함을 느끼는 남성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군복무를 마친 분들이라면 국방부와 군대가 사람을 어떻게 굴리는지 경험하셨을 테니 긴말이 필요 없겠지요. "군대 갈 땐 국가의 아들, 사고 날 땐 당신의 아들"이라는 분노 섞인 표현이 괜히 나온 건 아니겠죠.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 가운데에는 일본군과 군부독재를 거치며 군대에서 유래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전히 군대에서 학습되는 것들도 많고요. 하지만 군대 내에서는 국가를 위한 다는 명분으로, 제대한 뒤에는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치장되곤 합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군대를 정상화하자거나 입대를 보이콧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국가와 국방부를 상대로 싸워야 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소년병 징집 청원을 들먹이며 여성도 군대 가라는 식으로 싸움의 방향을 잘못 잡으니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죠.

 

 

리로이 존스의 지적대로 노예 생활이 길어지면 노예들끼리는 쇠사슬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을 구속하는 압제자를 상대로 사슬을 끊어내려고 싸우는 게 정상인데도 말이죠. 이처럼 '내가 군복무를 하니 너도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식의 병역 의무 논란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누구나 흔들리며 페미니스트가 된다》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들이 성평등을 외칠 때마다 남성들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얘기가 바로 '군대' 문제이다. 군복무는 기간이 정해져 있는 반면 성차별을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문제인데, 이둘을 과연 대등한 문제로 볼 수 있을까? 과연 여성이 군대에 의무적으로 가게 된다고 한들 성차별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까? 나는 아닐 거라고 본다. (중략)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져야 하는 것도,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남성이 기준이 되는 시스템을 다른 측면에서 바로보고 이를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 위에서 남성들이 억울함을 주장하는 편이 옳다고 봅니다. 이는 남성이 피해를 보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 사회가 지극히 남성을 '기본값'으로 놓고 있는 남성 중심주의 사회이며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가 여성 착취의 기반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출처 - MBC

 

현실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4월 초 하나은행에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나은행 지점장이 대출 상담을 한 여성 고객을 식당으로 불러 술을 따르라고 강요했던 사건 말입니다. 상담을 해주겠다는 얘기에 여성은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 혹시라도 대출 승인이 될까 싶어 기뻐하며 나갔다고 하죠. 그런데 지점장은 횟집에서 고객에게 반말로 술을 따르고 마시라고 강요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지점장은 여성 고객을 접대부로 쓰려고 했던 겁니다. 여러 정황상 그 지점장은 대출을 미끼로 한두 번 여성 고객을 농락했던 게 아닐 겁니다. 일이 커지자 지점장은 자기 부인까지 앞세워 용서를 빌게 했습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죠.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운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 대출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한둘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같은 고객인데 접대부 취급을 받는 일은 거의 여성에게만 일어납니다. 이런 사회가 과연 정상적일까요?

 

출처 - KBS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장경훈 하나카드 사장이 공식 회의 자리에서 "카드는 룸살롱 여자가 아닌 같이 살 아내를 고르는 일"이라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자 결국 물러난 일 말입니다. 하나은행과 하나카드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낮은 성인지 감수성과 미흡한 인권 의식을 가진 남성들이 권력과 위계를 이용하여 여성을 희롱하고 농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건만 우리 사회는 이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남성 중심주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출처 - JTBC

 

지난 3월 논란이 불거진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은 또 어떻습니까? 동아제약은 면접 자리에서 여성 지원자에게 여자는 군대 안 갔다 왔으니 남자들보다 월급을 적게 받아야 한다고 운운했습니다. 이 질문은 공통 질문도 아니었고 직무와도 관계가 없었는데 왜 이 질문을 굳이 여성 면접자만 받아야 했을까요? 이로 인해 불매 운동이 불거지자 동아제약은 인사팀장을 보직 해임하고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다고 하죠. 그저 면접관 개인의 일탈로 꼬리를 자른 겁니다.

 

출처 - 뉴스1

 

반면 성추행 가해자들과 2차 가해자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안희정 전 지사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한 김지은 씨를 모욕하는 댓글로 벌금형이 확정된 안희정 전 지사의 측근은 서울 송파구 정무직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죠. 올해 1월부터 송파구 정책연구단 팀장, 6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판결까지 나온 성폭행범을 비호하고 본인 또한 2차 가해로 벌금형으로 유죄를 받았는데 민간 기업도 아닌 공무원으로 다시 일할 수 있다니 기가 막힙니다. 상황이 이러니 아무리 선량한 남성이 많다고 한들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방어운전을 잘하는 운전자가 도로에 많다 해도 몇몇 난폭 운전자들 때문에 움츠러드는 경험은 다들 해보셨을 줄 압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남성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쉬쉬하며 넘길 일이 아니라 구조적인 진단과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요? 

 

출처 - MBC

 

여성 혐오 반달리즘의 한 형태는 지난 3월 세종대 철학과 온라인 수업에 난입한 외부 남성들의 분탕질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보겸의 '보이루'가 여성혐오 표현이라는 논문을 쓴 윤지선 교수의 강의였습니다. 신 남성연대라는 유튜브를 비롯해 일베 등 여성 혐오에 사로잡힌 남성들이 온라인 수업에 침입해 온갖 욕설과 여성 혐오 용어를 쏟아내며 수업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경찰은 모욕, 업무방해,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온라인 수업을 이용한 여성 혐오적인 반달리즘이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던 터라 걱정이 더 커집니다.

 

출처 – 노컷뉴스

 

여기에 더해 '허버허버, 오조오억개' 등 SNS에서 쓰이던 용어들을 갑자기 '남혐 용어'로 규정하며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건지 눈앞이 막막해집니다. '김치녀, 된장녀' 등은 명확하게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기 위해 일베에서 생겨난 용어이지만, '허버허버'는 2019년부터 쓰인 신조어로 당시 중앙일보 네이버 블로그 포스트에서는 해당 단어가 '급히'라는 뜻의 영단어 'Hubba-hubba'에서 유래했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오조오억개' 역시 한 팬이 아이돌 멤버를 찬양하는 댓글에서 발전한 것이고요.

 

출처 - JTBC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혐오에 기반한 젠더 갈등이 청년 세대의 잘못된 공정성 문제와 연결돼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공정성은 사회의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능력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애초 남성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등하게 돌려놓자는 움직임은 남성들로서는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당연해지지 않는 세상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노예제도가 사라지자 자신들의 재산을 국가가 강탈해갔다고 분노하던 노예 주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울어진 운동장 시절의 잣대로 공정성을 주장하면서 군복무 문제를 젠더 갈등으로 비화시키는 측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공정성 문제로 인한 갈등은 여성을 넘어 성소수자, 장애인, 저학력자,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해 점점 더 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론을 비롯한 정치권은 이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논란을 부추기는 실정입니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없는 자인 우리는 각자의 사슬 자랑은 그만하고 '사슬을 끊기 위한 연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여성 혐오와 젠더 갈등을 넘어 '약자를 위한 연대'로 말입니다.

지난 4월 16일은 대한민국 국민의 트라우마로 남은 세월호 희생자 7주기였습니다.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기억식은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유가족과 유은혜 사회부총리 등 정부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로 진행됐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한 4.16 생명안전공원 선포식도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세월호의 기억으로 가슴 아픈 4월이라며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를 통해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이 이뤄지도록 끝까지 챙기겠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4.16단원고가족협의회 유가족 22명은 목포해경이 준비한 경비함을 타고 사고 해역에서 선상 추모식을 진행했습니다. 유가족들은 바다에 국화를 던지며 눈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이런 추모 행사만 보면 지난 7년간 많은 일이 해결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출처 - KBS

 

박근혜 정부 당시 국회는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를 꾸렸고 감사원과 검찰이 잇따라 결과를 내놨지만 의혹은 오히려 증폭되었습니다. 그 후 세월호 참사 특위 1기가 구성됐지만 정부와 여당의 비협조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세월호를 인양했을 때는 드디어 진실이 밝혀지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출범된 사참위도 뚜렷한 결과를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9년 출범한 검찰 세월호 특별수사단은 세월호 관련 의혹 17건 가운데 해경 지휘부의 구조 소흘과 청와대 비서실 등의 세월호 특조위 방해 딱 두 가지 혐의만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마저도 대부분 무혐의로 결론 나버렸습니다.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김석균 전 해경청장 등 지휘부 10명에게 지난 2월 1심 재판부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데 과실이 있는 이들의 혐의는 인정되지도 않고 책임을 묻지도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난 7년간 정권이 바뀌면서도 세월호 참사는 제대로 된 조사도, 수사도, 처벌도 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세월호 참사 당시 화물 고박 부실 책임이 있는 항만물류업체 우련통운이 손해배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산을 빼돌린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지만, 수사기관은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다. 해당 기업이 현직 국회의원 가족회사인 데다 세월호 참사 구상권 청구 소송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현 정부의 책임도 없지 않아 수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련통운은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배준영의 동생이 대표이사이고 아버지가 회사 지분의 9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배준영 의원 자체도 이 회사의 사내이사를 지낸 바 있는 관계 깊은 기업이죠. 법원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회사의 구상권 책임비율이 5%라고 한 상황인데도 이 모양입니다.

 

출처 - JTBC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세월호 참사 7주년인 올해에도 카카오톡 익명 단체 채팅방에 '세월호 크루'라는 방이 여럿 만들어졌는데,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을 모욕하는 글로 도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월호 추모 왜 함?"이라며 "콩글레이츄레이션~" 등 세월호 참사를 조롱하고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나마 7년 전보다 나아진 부분은 이런 모욕적인 표현에 대해 분노하며 항의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사참위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발생 후 5년간 수사로 이어진 혐오표현은 210건입니다. 발화자는 10~20대가 과반을 넘었습니다. 수사가 된 것만 이 정도니 그 밖의 혐오표현까지 더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일 겁니다.

 

출처 - 한겨레

 

7년이 지났지만 세월호 생존자와 유가족 그리고 자원봉사자 등 당시 참사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아픔입니다.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는 세월호 참사일이 다가오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곤 했습니다. 올해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제주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김동수 씨는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의 의인이라 불린 분이죠. 세월호 참사 생존자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이 얼마나 크기에 해마다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인지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하지만 2015년 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다시 묻지 않을 것을 규정한 지원법에 서명을 강요하고 알량한 지원금으로 이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오는 22일 국회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검사 후보 추천 위원회는 특검 후보자를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20일 예비후보에 대한 서류심사에 국민의힘 측 추천위원이 불참했기 때문에 22일 오후 추가 회의가 열리게 된 겁니다. 대선 국면을 앞두고 국민의힘 지도부가 세월호 참사 기억식에 참석했지만, 사실상 국민의힘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7년이 지난 지금도 회피하기 바쁩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길은 요원합니다. 우리가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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