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물/독립, 하셨습니까?

[독립, 하셨습니까?] '요아리'라는 장르를 건져올리다

by 생각비행 2013. 1. 30.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2013년 들어 첫 기사를 올립니다. 큰 희망을 품고 시작한 2013년의 1월이 그새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말에 '셀프 사면' '훈장 남발' 등으로 다시 한 번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암울한 상황이 여전한 때에 [독립, 하셨습니까?] 기사를 연재 중인 이은 씨가 생각비행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독자분들께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싶답니다. "아마도 선거 결과에 많이 절망하고 계실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짓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생각비행도 같은 마음입니다. 하늘에서 복이 뚝 떨어지길 바라기 전에 우리 손으로 2013년 복을 많이 지어냅시다. 이번 기사는 <보이스 코리아>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많은 이를 깜짝 놀라게 했던 한 가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디션의 틈바구니에서
'요아리'라는 장르를 건져올리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 녹화장. 심사위원들의 의자가 무대 쪽이 아닌 객석을 향해 있다. 노래하는 1분 30초 동안 하나의 의자도 돌려세우지 못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그 시간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들려주어야 한다. 긴장했음이 역력한 한 참가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정적을 깨듯 전주가 흐른 뒤 100미터 경주처럼 노래의 피치를 올려간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듣는 이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노래였다. 몇 소절 듣지도 않은 채 '원조 아이돌' 강타가 벨을 눌러 의자를 돌렸다. 벌어지는 입을 감추지 못하며 가수 백지영, 신승훈, '리쌍'의 길도 연달아 의자를 돌렸다.


가수 타이틀 버리고 목소리로 띄운 승부수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깐깐한 심사위원 모두의 러브콜을 받은 참가자. 절박한 심정으로 부른 노래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과 시청자의 귀마저 사로잡았다. 힘 있는 목소리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단 한 번의 무대로 오디션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강미진_요아리’다. 


그는 아이유의 데뷔 초기 곡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미아>를 불렀다. 강미진_요아리는 올해 본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적인 도전자였다. 이 장면은 정말로 수십 번이나 돌려볼 만큼 극적이었다.

노래 실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2007년 스무 살에 데뷔, 실력파 록밴드 '스프링쿨러'의 보컬로 활약했다. 2010년에 솔로 앨범을 내기도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6개월 연습하고서 바로 데뷔했지만(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막상 가수가 되고 나서는 인기 가도를 달리지 못했다.

2012년 말에 발표한 신곡 <Lie>

독특한 음색 때문일까, 요아리의 노래는 소수의 팬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편이다. 함께 연습하던 동료가 대중가수로 승승장구할 때 지켜보는 입맛이 썼다. 같은 소속사인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멤버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걸그룹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5년이 넘도록 한 길에서 버텼지만, 언제까지 무작정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어요. 저는 프로니까 잘돼야 본전이고 떨어지면 망신이잖아요. 이번에 떨어지면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요아리란 예명이 아니라 본명인 강미진으로 나간 거예요. 아이유 씨 앨범을 들을 때 제 노래처럼 입에 감기는 느낌이어서 기회가 되면 불러보고 싶었는데, 사실 심사위원 네 분이 다 절 선택할 줄은 몰랐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듯이' 부분에서 마지막이라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던 것 같아요. 경쟁하는 건 무서웠지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본격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초인 <슈퍼스타 K>와 뒤를 이은 공중파의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케이팝스타> 등 홍수처럼 수많은 오디션이 있었으나 요아리가 <보이스 코리아>(이하 <보코>)를 선택한 이유는 명백했다. 외모가 아닌 가창력만으로 뽑는다는 콘셉트 덕분에 <보코>에는 타오디션과 구별된 프로급 참가자가 대거 등장했다. 본선 첫 무대에 한정되기는 했으나 목소리만으로 진짜 노래 실력을 겨룬다는 점에서 <보코>는 신선했고 외모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한 '얼굴 없는 가수'들을 위한 장이 되었다. 생방송에서는 살짝 긴장감이 덜했지만, 토너먼트 식으로 둘씩 자웅을 겨루는 라이벌 매치의 긴장감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폭발 직전이었다. 실시간으로 투표하는 승부 예측마저 엇비슷해서 누가 떨어져도 아쉽지 않을 정도였다. 외모나 나이 때문에 아이돌이 되지 못해서, 가수가 될 만한 체구가 아니어서 쓴웃음을 삼키던 뮤지션들이 이때다 싶어 노래를 토해냈다.


가수의 재능 물려준 아버지를 향한 노래

강미진은 4강 문턱에서 아쉽게 좌절했지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만큼 얻은 것이 많았다. 늘 아쉬웠던 대중적 인지도를 고스란히 챙겼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가 새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편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그에게 노래는 다른 인생을 열어준 우연하지만 결정적인 기회였다. 그의 목소리에 무언가가 서려 있다고 말하는 데는 이런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19살 때 노래 대회에 나갔어요. 상품이 유럽여행권이었거든요. 노래를 배운 적도 없었는데 우승해서 고생하신 엄마 해외여행을 보내드렸어요. 남들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게 노래라는 걸 알게 됐죠. 그때부터 운명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아요. 20살 때 인터넷에 '모나리자녀'로 UCC 영상을 올렸는데 그게 화제가 돼서 데뷔하게 됐어요. 길이 쉽게 열리니까 소중한 줄 모르고, 어렵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인가 보다 했어요. 음반이 잘 안되면서 방황도 했고 음악적으로 철이 들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학교를 그만둔 후로는 늘 돈을 벌었다. 동대문에서 옷이나 신발을 팔고 미용실 스태프나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은 곧잘 했지만 아르바이트 급여로는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쩌면 노래는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노래를 하면 늘 칭찬을 받았고, 운이 따랐고, 즐거웠다. 소질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타고난 것이었다. 어릴 적을 떠올리면 늘 "날 닮아 노래를 잘한다"며 좋아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보코> 마지막 무대에서 부른 노래가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래였다. 리허설 때 너무 우는 바람에 감정을 빼고 부른 탓인지, 정작 생방송에서는 강미진 특유의 감성이 살아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후련했다. 마지막처럼 불렀고, 정말 마지막이었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진행형이니까.

"그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때 아니면 언제 부를까 싶었어요. 아버지가 노래를 너무 잘 하셨대요. 가족들하고 놀러갈 때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꼭 시키셨어요. 5학년 때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아버지가 제 노래를 보실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고 싶었어요.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와서 웃겨주시고 그러니까 무대에서는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컸어요. 비록 떨어졌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제 음악을 궁금해 할 만큼은 한 것 같아요. 제가 자신 있는 노래나 고음으로만 승부하지도 않았고요."

우승은 스무 살 손승연에게 돌아갔다. 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부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자신을 보여줄 준비를 해나갔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무엇보다 못 다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2년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싱글 앨범도 냈다. 그렇게 2012년이 바삐 지나갔다. 그의 곁에 아버지는 없지만 빈자리를 채워준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니, 톱클래스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윤일상이다(인터뷰로 만난 자리에서 그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를 물을 때 '요아리'를 첫손에 꼽았다. 그래선지 요아리라는 가수의 존재가 더 궁금했다.)

"음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부자지요. 제가 데뷔할 때 회사 이사님이셨어요. 브아걸 콘서트에서 멤버 '미료'와 함께 축하 공연을 할 때 처음 보셨대요. 그때 밴드가 해체되어서 개인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활을 선물해주셨어요. 매일 나가는 연습 공간, 음악적 색깔에 대한 발언권을 주셨는데, 이십대 초반의 제겐 큰 경험이었어요. 제게 '충분히 예뻐' '살 그만 빼'라고 용기를 주세요. 그래서 더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2010년 처음으로 낸 싱글《저기요》

2010년, 싱글 《저기요》를 내면서 요아리는 삭발까지 했다. 귀엽기만 한 얼굴인데 밴드 보컬로 데뷔하면서 신비주의 전략으로 가면을 썼던 것이 패착이었다. 노래하는 이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여(성)가수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 앞에 신인 요아리의 자존감은 낮아졌다.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스프링쿨러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결국 홀로 서서 싱글 음반을 내며 요아리는 대중 앞에 결연하게 자신을 얘기했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은 <저기요> 뮤직비디오는 외모지상주의를 향한 저항의 방식이었다. 성형 대신 끝없는 도전과 변신을 꾀하면서 진학을 위해 짬짬이 공부하는 요아리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다.


오디션이 주는 위로 혹은 냉혹함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력만으로 등용될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에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 그리고 대리 충족의 경험을 통해 초기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맷 자체가 식상해진데다 억지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편집 때문에 도리어 프로그램에 꼭 필요한 긴장을 잃어버렸다. 한때는 오디션이 스타를 꿈꾸는 이들만이 아니라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많은 이에게 매력적인 기회와 희망을 건네줬지만, 이제는 누가 우승하는지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느낌마저 든다.

요즘은 눈물겨운 사연에 뛰어난 노래 실력을 지닌 참가자보다는 소위 '엄친아' '엄친딸'로 불리는, 집안 좋고 외모도 뛰어난 이들이 더 높은 관심을 받는 경향이 있다. (올해 <슈퍼스타케이 4> 우승상금 5억 원이 모 주조회사의 2세인 로이킴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이 상금을 기부했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기존 소속사의 연습생 선발 프로그램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케이팝스타>는 가요 프로그램에 바로 데뷔할 만한 인재를 찾아내 갈고 닦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애초 '공정한 기회의 장'으로 연예기획사의 눈에 들지 못하던 사람들의 돌파구였던 오디션도 이미 기존 스타시스템의 구조 어딘가에 안착해버린 모양새다. 참가자들의 수준이 떨어지면서 '오디션의 수가 너무 많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최근 방송 중인 <케이팝스타 2>를 보면 십대 초중반 참가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현상도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형 인재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영향 때문에, 아이돌 가수를 인생의 모델로 삼아 차근차근 준비해온 꿈나무들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자신의 곡을 노래할 줄 아는 싱어송라이터처럼, 끝없는 경쟁과 대중의 사랑을 얻기 위한 분투에서 결국 살아남는 이는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가사를 쓰는 데 재능이 있는 요아리는 작사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혼자 노래방에 가서 아이돌 노래를 맘대로 편곡해 부르는 거란다. 언젠가는 이런 모습도 보여줄 것이다.

"미디움 템포의 켈리 클락슨이나 리드미컬한 케이티 페리, 댄스 팝이나 스트레이트 창법의 부드러운 록을 좋아해요. 비욘세처럼 춤을 춰도 노래가 들리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의상에도 관심이 많아서 소품 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가요계의 '낸시 랭'처럼 파격적인 것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 듣기 좋아요. 요아리라는 장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라이브형 가수, 콘서트를 기다리게 하는 가수가 돼야죠. 남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노래에 미친' 가수요."

일렉트로닉이 가미된 록적인 사운드의 <맘에 드니?>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윤일상(키보드)이 직접 세션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강미진은 다시 요아리로 돌아왔다. 앨범 준비를 하며 틈틈이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던 그가 1월 15일에 미니앨범 《맘에 드니?》를 발표했다. 타이틀곡 <맘에 드니>를 비롯, 전 곡을 윤일상이 작곡하고 대부분 요아리가 가사를 썼다. 아이 같으면서도 성숙함이 깃든 묘한 보이스, 힘 있는 진성의 고음과 절묘한 완급 조절, 록과 댄스음악을 종횡무진하는 요아리의 목소리. 삶은 그에게 손쉬운 성공이나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 덕에 복잡다단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낼 줄 아는 아주 드문 음색을 갖게 되었다.

음악만 들으면 다소 '센' 인상이지만, 장난기 많은 소녀의 이미지도 엿보인다.

오디션 무대의 화려한 무대 뒤안을 보지 못하는 시청자로선 입이 벌어지게 하는 그의 노래 실력 뒤에 어느 만큼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요아리는 묵묵히 노래한다. 그만의 작은 희망을 위해. 요아리의 노래를 들으며 섣부르지 않게, 작은 희망을 품게 된 것도 그의 노래가 쉽지 않아서일 테다. 이제 다시 그의 노래를 만나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