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5.18에 읽는 양성우의 <겨울 共和國>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5월 16일과 5월 18일은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권을 생각하게 되는 날입니다. 5.16은 박정희에 의해 4.19의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뀐 날이며 5.18은 전두환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국민을 군홧발로 짓밟은 날입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정권은 1970년대를 지나 1980년 5월 18일 정점을 찍었습니다. 엄혹했던 그 세월 동안 이름 없이 쓰러진 많은 분의 피로 우리 사회는 지금 이 정도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 상황도 그렇게 밝지만은 않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무리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상식이 아닌 비상식으로 한국 사회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맺힌 현실을 노래했던 많은 시 중에서 양성우의 <겨울 共和國>을 소개합니다. 이 시는 1970년대 유신체제와 작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양성우 시집: 겨울 共和國


겨울 共和國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걸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라쳐서 누군가의 발밑에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 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랑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같은 라디오도 신문도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 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 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 양성우, 《겨울 共和國》(1977년 화다출판사) 

1992년에 양성우의 《겨울 共和國》을 처음으로 읽은 뒤로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20년이 지나 시집을 다시 펼쳐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악랄한 유신체제의 현실을 '겨울 공화국'이라고 표현했던 시인의 마음을 처음으로 접했던 20대 시절보다 40대가 된 지금, 시의 구절마다 단어마다 배어 있는 애끊는 심정이 훨씬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끝없이 지치지 않고 봄을 기다리는 시인처럼 우리도 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거짓이 진실이 되고 비상식이 상식이 된 현실 앞에서 단순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봄이 오지는 않겠지요. "여보게/우리들의 슬픈 겨울을/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한사코 온 몸을/버둥거려야/하지 않은가" 라는 시인의 권유처럼 현실에서 버둥거려야 우리가 원하는 봄이 옵니다.

<겨울 공화국>은 활자화되기 전 1975년 2월 12일 광주 YWCA 회관에서 열린 민청학련사건 관련 구속자 석방 환영회 겸 구국 금식기도회에서 시인이 처음으로 낭송했다고 합니다. 그 후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광주 일대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시인은 재직하던 중앙여고로부터 사직 압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중앙여고는 금호그룹을 창업하고 사세를 확장하던 박인천이 이사장이었습니다. 당시 기업인들은 정부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시인을 파면하라는 정보기관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사퇴하지 않고 계속 버텼습니다. 그러자 1975년 3월 12일 박인천 이시장은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시인을 파면합니다. 시인이 학교 측에 제출한 재심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시인은 여느 때처럼 출근했지만 교무실에 있던 그의 책상은 치워졌고 기관원들이 진을 치고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당 해고로 신음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탓으로 병을 얻거나 죽어도 언론이 외면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시인이 감내해야 했던 <겨울 共和國>이 겹쳐 보입니다. 

"신문, 잡지, TV가 정직해져야 하고 비겁하고 더러운 것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시인의 외침은 2012년 5월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하는가"라는 시인의 고백이 귀에 맴도는 5월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시집에 실린 양성우 시인의 모습

양성우
1943년 전라북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시인지에 <발상법> 등 6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저항시를 주로 썼다.《겨울 공화국》은 1977년 장편 저항시 〈노예수첩〉을 일본 월간지에 게재해 투옥된 상태에서 출간 되었다. 서문에서 고은은 " 正義 의 엘리지를 원한과 분노로써 확인하는 사내 양성우는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나 그의 마음과 우리 마음은 이런 책 말고도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고 쓰며 시인 양성우를 그리워 했다.
시집으로는 《발상법》《신하여 신하여》《겨울 공화국》《북 치는 앉은뱅이》《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5월제》《그대의 하늘 길》《세상의 한가운데》《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첫 마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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