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록물 관리, 나아갈 방향은?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시기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보존한 결과입니다. 이런 방대한 기록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 기록에 근거해 왕들의 치적과 폐단을 논할 수 있습니다.

 

출처 - tvN

 

조선 시대 나라 차원에서 기록물을 관리하는 체계를 오늘날과 비교할 때 가장 유사한 것을 꼽으라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의 기록물, 즉 국가 기록물을 관리하는 체계가 아닐까 합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일제침탈 및 항일운동 기록, 국무회의록, 행정, 외교, 통일, 경제 그리고 대통령기록물까지 약 1억 3000만 건의 기록물을 보존하고 있는 국가기록원이 오늘날의 사고(史庫)에 해당하겠죠.

 

출처 - 뉴스토마토

 

얼마 전 퇴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기록물 1116만 건 역시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이관된 기록물은 법률에서 정한 대통령 비서실, 대통령 경호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 27개 대통령 자문기관이 생산하고 접수한 것들입니다. 예전에는 문서 형태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나 동영상, 그리고 대통령의 개인 SNS 게시물까지 기록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국민청원 게시물도 이관되었습니다. 이번에 이관된 기록물 중에 전자기록물은 888만 건, 비전자기록물은 228만 건이었습니다. 검수와 정리 작업을 거친 뒤 목록과 원문을 전시 콘텐츠로 구축해 국민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출처 - 국가기록원

 

기록물 관리는 관리 체계의 일관성이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이번에 청와대를 상대로 특활비 내역을 공개하라며 소송을 건 납세자연명 건만 해도 그렇죠. 문재인 대통령 당시 특수활동비 내역과 김정숙 여사의 의전 비용 예산 내역, 2018년 당시 장차관 워크숍에 제공한 도시락 가격 등 의도가 훤히 보이는 소송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생각해볼 지점은 있습니다.

 

출처 - SBS

 

우선 이 소송에서 납세자연맹은 1심 승소했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은 정부의 예산집행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면서 판결을 내렸는데요. 당시 청와대 측은 특활비는 대통령 기밀 활동에 쓰이고 영부인 의전 비용은 편성된 예산 자체가 없어 자료가 없다며 항소했습니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면 그때 공개하면 될 것 아닌가 싶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권이 바뀌면 전임 정부 관련 자료들은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돼 15년 동안 공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사생활 관련 정보는 30년간 공개할 수 없습니다. 결국 확정 판결이 나온들 소송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얘기입니다. 이에 납세자연맹은 관련 정보를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하는 것 자체를 막겠다며 대통령 기록물에 관한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출처 - 조선일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기록물 지정은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당시 시민단체가 청와대 특활비 내역과 세월호 사고 당일 보고 내역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내 1심에서 승소했지만, 박근혜의 탄핵으로 기록물이 이관되어 2심 재판부는 각하 결정을 내렸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15~30년까지 공개를 못 하게 하는 지정기록물로 만들어버린 탓에 세월호의 진실이 봉인돼버린 겁니다. 비슷한 사례로 현 대통령인 윤석열도 검찰총장 재직 시절 특수활동비와 특정업무 경비 집행 정도를 공개하라고 법원이 판결했지만 윤석열은 항소하며 뭉개고 넘어갔습니다.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가리기 위해 기록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이처럼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고 했더라도 유불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뭉갤 수 있다 보니 기록의 의미가 퇴색되었죠.

 

출처 - 오마이TV

 

이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급히 업무를 시작해야 했던 문재인 정부 초반에도 난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업무현황이라는 문서 쪼가리를 제외하고는 청와대 내 서버와 각 컴퓨터 내 하드웨어에 남겨진 자료가 없었습니다. 과거 인사수석이 어떻게 인사 검증을 했는지 이런 자료가 남아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는 얘깁니다. 아마도 박근혜는 이명박에게 배웠나 봅니다. 2013년 4월 15일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청와대에 가보니 아무런 자료가 없었다고 한 바 있으니까요. 국정원, 검찰, 경찰 등 정보, 사정기관들이 수집한 자료에 청와대 인사검증팀의 자체 검증 결과를 합친 핵심 인사자료인 존안 자료가 하나도 없었다는 얘깁니다.

 

출처 - 세계일보

 

정권 차원의 기록물 관리가 이 지경인데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국회로 내려가면 상황은 더 좋지 않습니다.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은 국민 주권의 대리인이자 법적으로 독립된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명확히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국회의원들은 기록을 남긴다는 개념이 아예 없는 듯합니다. 아마도 기록을 남기면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출처 - 세계일보

 

지난 2019년 《세계일보》 보도에 의하면 국회의원 의원실 관계자 대부분이 "기록 관리요? 파쇄만 잘하면 된다고 배웠는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2016년 국회기록보존소가 만든 국회의원 기록관리 매뉴얼이 있지만 매뉴얼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알더라도 무시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공개하는 자료라 하더라도 자기 치적인 경우에 한해 공개하는 수준입니다. 전부 기록으로 남기면 그 기록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현재의 기록물 관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의원이라 할지라도 법안 발의를 위해 자기네 당 의원들조차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털어놓습니다.

 

출처 - 세계일보

 

우리 선조가 기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조금만 생각해봐도 현재 우리가 얼마나 기록 관리를 우습게 생각하는지가 보입니다. 중소기업, 대기업 가릴 것 없이 인수인계는 언감생심인 경우가 허다하고 회사에 들어간 이들이 대부분 맨땅에 헤딩하듯 업무를 시작하죠. 꼼꼼히 기록을 남기기보다는 파쇄에 집착하고 있으니까요. 전임 대통령이 특정 문서를 지정기록물로 지정하면 15~30년까지 비공개 상태가 됩니다. 이를 열람하려면 국회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 의결하거나 고등법원장이 영장을 발부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넘기 어려운 문턱이죠. 현행법상 세세하게 청와대에 무엇을 남겨놓아야만 한다는 강제 규정도 없는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 기록물에 대한 아카이빙과 관리 또한 널뛰기를 반복하고 청와대 홈페이지와 로고도 달라져 혼란을 초래합니다.

 

출처 - 청와대

 

미국의 국가 기록물을 관리하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 가면 볼 수 있는 글귀가 있습니다.

Democracy Starts Here

 

출처 - NARA

 

민주주의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이제라도 국가 기록물 관리 체계를 온전히 갖추도록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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