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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무운을 빈다" 사건으로 들여다본 언론의 실상

by 생각비행 2021. 11. 8.

언론의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지난 11월 1일 YTN이 보도한 <[2022 대선] 안철수 대선 출마, 캐스팅보트의 위력?>이라는 뉴스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대선출마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의 환담을 두고 이정미 정치부 기자가 전달한 내용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출처 - YTN

 

[안철수 / 국민의당 대표 : 저는 서울시장에 당선이 되면 도중에 서울시장 그만두고 대선에 나가는 일은 없다,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이준석 / 국민의힘 대표 : (안철수 후보가 출마선언, 야권 표 분산 지적 나오는데….) 무운을 빕니다. (알겠습니다.)]

...(중략)...


여기에 대해서 아까 이준석 대표의 말, 짧아서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답한 게 무운을 빕니다. 보통 행운을 빕니다라고 얘기하잖아요. 이것을 말을 바꿔서 안철수 대표에게 무운을 빈다, 운이 없기를 빈다라고 짧게 약간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출처 - YTN

 

처음 이 보도를 봤을 때 말문이 막혔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무운(武運)’을 '무운(無運)'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냥 넘길 일은 아니겠지요. 그것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중요한 정치 이슈를 보도하는 정치부 기자가 하는 말이니까요. 혹시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기자라서 긴장했거나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여서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 아닌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알고 보니 17년 차 선임기자로 경력이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걱정이 더 커졌습니다. 생각비행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해력 저하와 이를 부추기는 언론의 심각성에 관한 글을 여러 번 올리기도 했으니까요.

 

실질문맹률 OECD 최하위권 대한민국의 슬픈 초상https://ideas0419.com/457
'사흘'이 급상승 검색어가 되는 사회, 무엇이 잘못된 걸까? : https://ideas0419.com/1087
세계가 열광하는 K-콘텐츠, 정작 우리의 한국어 사용 능력은? : https://ideas0419.com/1229

 

사람이기에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평소 잘 아는 단어라도 특정 상황에서 혼동할 수도 있는 일이죠. 하지만 이번 YTN 보도를 보면 정치부 기자가 '무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전달하고 있는데도, 앵커 두 사람은 이를 정정해주지 않고 그냥 넘깁니다. 이런 점 또한 큰 문제가 아닐까 싶군요. 

 

출처 - 네이버

 

하지만 진짜 문제는 보도 말미에 발생했습니다. 제작진이 YTN 이정미 정치부 기자에게 발언에 문제가 있었다는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도 말미에 용어를 혼동했다거나 미처 잘 몰랐다고 밝히고 정정할 기회가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이정미 기자는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변명으로 때워버립니다. 제작팀의 지적에 대해 이정미 기자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제가 아까 이준석 대표의 발언에 무운을 빈다에서 무운을 행운이 없는 없을 무 자라고 해석을 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전에 저희 팀에서 전달을 해온 걸 보니까 이 무운이 한자어로 무에 전쟁 이런 무술 무 자를 쓰게 되면 전쟁 따위에서 이기고 지는 운수라는 의미가 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준석 대표가 어떤 의미로 한 것인지 중의적인 표현을 만약에 썼다면 단순히 비난하기보다는 결투에서의 운수에 대해서 언급을 한 걸 수도 있다는 지적이 들어와서 이것은 제가 나중에 이준석 대표께 어떤 의미였는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정미 기자는 자신이 해석한 '무운(無運)'이 맞다고 우기며 무운이라는 말을 중의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인 양 호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준석 대표에게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확인하겠다고 합니다. 이 정도 상황에 이르면 기자정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군요. 헛소리를 하는 건 기자인데 왜 부끄러움은 시청자의 몫일까요?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오만함, 잘못을 지적해줘도 고치려 하지 않는 뻔뻔함,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책임전가를 보면서 정치부 기자가 정치인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시인하고 신속하게 바로잡는다"는 기자 윤리강령을 되새길 때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일반 회사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실시간 공개 행사,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타사와의 공식 미팅에서 17년 차회사원이 저런 소릴 했다고 가정해보죠. 상대 회사에 얕보이는 건 둘째 치고 최악의 경우 회사에 대한 신뢰에 치명타가 되어 계약이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 말과 글을 전문으로 하는 분야가 아닌 일반 기업이더라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닌데, 말과 글로 먹고사는 기자가 제작진이 실수를 바로잡아주어도 뻔뻔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니 윤리 의식이 있긴 한 건지 의구심이 듭니다. 정치인의 말실수는 대서특필하면서 같은 언론의 실수는 슬쩍 넘기는 언론의 풍토도 문제입니다. 가재는 게 편이요,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국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언론의 사설, 논설, 기사를 읽으라고 하시던 어르신들의 말씀이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 버린 세태를 안타까워해야 하는 걸까요?

 

출처 - 로이터

 

언론계에서 그나마 신뢰받는 언론으로 꼽히는 YTN 기자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단어의 뜻과 관련된 논란만 해도 '사흘', '명징과 직조', 여기에 '무운'까지 더하게 되었습니다. 트럼트 전 미국 대통령 시절이긴 합니다만, 외국어였던 "long gas line"에 대한 오역까지 생각하면 대부분 일반인이 아닌 언론의 잘못이 문제였습니다. 기레기들이 왜곡을 일삼고 거짓을 전하니 사람들은 반지성주의에 물들고 결과적으로 언론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듯합니다. 온갖 '밈'과 '줄임말에 찌든 기사 제목'도 모자라 기삿거리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찾는 행태를 보며 혹자는 '기레기'라는 표현조차 무색하다고 비판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마당에 이런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아 참 암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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