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는 광복절이 토요일인 데다 코로나19로 지친 국민과 의료진을 배려한 결정이라고 합니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17일(월요일)을 포함하면 사흘을 쉴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출처 - 네이버
그런데 임시공휴일 지정과 관련해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국무회의에서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발표하며 쓴 단어인 ‘사흘’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입니다. '사흘이면 4일 연휴라는 얘기 아니냐'라는 뚱딴지같은 소리가 SNS와 커뮤니티에서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자 '사흘'이 정확히 며칠인지 알기 위해 검색하는 사람이 많아졌는지, 포털 네이버에서 ‘사흘’이 급상승 검색어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장난으로 일부러 그러는가 싶었는데 '사흘'을 '4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실제로 많았습니다. 아마 발음대로 '사흘'을 '4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잘 몰랐으면 입을 닫고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적반하장으로 '3일이면 삼흘이라고 해야지 왜 사람 헷갈리게 사흘이라고 하냐'면서 화를 내는 사람마저 등장했습니다. 황당한 일이죠.
출처 - 서울신문
해프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우리말인 3일을 쓰면 되지 왜 난 척 하느라 사흘이라는 한자어를 쓰느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한 겁니다. 이 정도면 이 사달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입니다. 날짜에 대한 우리말 단어는 정규 교육과정 중 초등학교에서 배우게 되죠. 그런데 삼일(三日)이 한자어이고 사흘은 순우리말로 '셋+날'을 뜻한다는 걸 모른다면 좀 심각한 상황이 아닐까요?
당황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곰곰이 생각하니 '사흘'의 뜻을 진짜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배운 걸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고, 사정상 날짜와 관련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관심 영역의 차이로 날짜를 세는 우리말 표현에 서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국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다른 과목에서 우수성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있겠죠. 처음엔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가 이유를 찾자니 차츰 생각이 정리되더군요.
하지만 '사흘'이 급상승 검색어가 되는 해프닝과 관련해서 염려스러운 부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온라인상에서 뭔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틀렸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 때문입니다. "3일 쉬는데 왜 사흘로 표현하느냐"며 불만을 드러낸 사람들처럼 말이죠.
출처 - MBC
기초적인 단어 사용과 관련한 해프닝은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 대한 한 줄 평이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쓴 표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명징(明澄)'과 '직조(織造)'라는 단어를 처음 본다면서 일부러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해서 잰 척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쇄도했습니다. 참 의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동진 씨는 많은 영화평론가 중에서 최대한 대중이 알기 쉽게 영화 관련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 속하니까요.
출처 - MBC
한편 영화를 평하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생소한 단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게 비난의 요소가 되는 상황은 좀 이상합니다. 대중과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대중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려는 뜻으로 〈기생충〉의 한 줄 평을 쓴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지금은 옛날처럼 두꺼운 사전을 끼고 가나다순에 따라 단어를 일일이 찾아야 하는 불편한 시대가 아닙니다. 잘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있다면 손쉽게 검색해서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죠. 그런데 잘난 척한다고 일단 비판부터 한다면 그런 행동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고개를 드는 반지성주의가 이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과거 생각비행의 포스팅 중 댓글이 100개 넘게 달리며 뜨거운 토론의 장이었던 '문해력 저하'가 실제 이런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실질문맹률 OECD 최하위권 대한민국의 슬픈 초상 : https://ideas0419.com/457
그렇다고 '사흘'과 관련한 해프닝을 단순히 개인의 책임 또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으로 국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유튜브와 같은 영상에 익숙한 사람들이라거나 책을 많이 안 읽어서 그렇다는 주장이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활자를 많이 읽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는 식으로 단순히 양적인 문제로 접근할 게 아니라 독서의 질과 교육의 질이라는 문제로 접근하는 편이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다고 봅니다. 과거 '논술'을 배운다 하면 누구나 신문 읽기를 추천하고, 다양한 신문기사를 활용해 글쓰기를 가르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짜뉴스가 판치고 기레기가 쓴 기사가 난무하는 현실을 두고서 막연히 밀레니얼 세대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언론과 방송이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걱정이 앞섭니다. 인터넷에서 단지 인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속어나 줄임 말 등을 아무렇게나 끌어다 쓰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출처 - 서울신문
MBN, MBC, 《중앙일보》 등등에서 수도 없이 '4흘'이란 표현을 머리기사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조악한 말과 글이 난무하는 언론과 방송의 현실 그 자체가 시대의 거울이 아닐까요? 한편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한국어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도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이수한다면 '사흘', '나흘'과 같이 날짜를 세는 단어는 초등학교 때 배워야 할 부분이겠죠. 하지만 요즘 초등학교는 1학년생이 한글을 떼고 이미 상당한 한국어를 습득했다는 것을 전제로 교과를 진행하고 있죠. 사전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야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어 수업을 따라가기가 버겁습니다. 심지어 국어보다 영어를 우위에 두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국적 불명의 영어식 한국어를 남발하는 문제도 발생합니다. 이제는 거의 일상적인 표현처럼 굳어진 "커피 나오셨습니다." 같은 이상한 높임법부터 "~로 보입니다.” 대신 "보여집니다.", "생각되어집니다." 같은 영어식 한국어 표현이 비일비재합니다. “끓고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 "끓여지고 있습니다."처럼 지나친 수동형 표현이 우리말을 좀먹고 있습니다.
출처 - 동아일보
최근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사태로 교육 전문가들은 '학력 격차'를 우려하고 있죠. 학교 현장에서 벌써 중위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초기에 등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교육을 통해 학업을 뒷받침할 수 있고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쓸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학습능력과 성적을 유지한 반면 그렇지 못한 집안 아이들은 눈에 띌 정도로 학습능력과 성적이 곤두박질쳤다는 일선 교사들의 경고를 흘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중산층이 붕괴하듯 중위권 학생들이 사라지고 '부익부 빈익빈'에 따라 학습과 교육마저 격차가 점점 벌어진다면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는 꼴이 아닐까요? '사흘'과 '4흘'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철없고 무식한 애들로 치부하는 것으로 상황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다각적인 분석과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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