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사이에 젊은 케이팝 스타가 2명이나 세상을 등져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f(x)의 설리, 카라의 구하라가 연이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죠. 악플로 인한 우울증을 그들이 세상을 등진 주된 이유로 보는 사람이 많은 편입니다.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가 컸고 대중적 인기를 받았던 이들인 만큼 혐오의 목소리에 많은 부담감을 느꼈겠지요.
출처 – 여성신문
설리에 이어 구하라까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까닭에 이른바 설리법, 악플 방지법 도입을 촉구하는 여론이 빗발쳤습니다. 악플을 규제하고 악플러 처벌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국회에서도 설리의 이름을 딴 악플 방지법이 잇달아 발의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페이스북처럼 실명을 드러내는 서비스에서조차 사람들은 언어 폭력을 일삼고 성희롱 이상의 범죄적 악플을 천연덕스럽게 달고 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등장했던 악플러들은 자기가 실제로 드러난 상황에서도 인기로 돈 버는 연예인이면 이런 막말 정도는 감당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적반하장입니다. 이런 형국에 실명제를 실시하고 악플방지법을 도입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는 지극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일단 우리 사회가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얼마나 집단적 가해 행위를 했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설리와 마찬가지로 구하라 역시 작년 8월 남자친구였던 최종범과의 분쟁이 시작된 이후 엄청난 악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최씨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 언론을 타면서부터 더더욱 그랬습니다. 최씨가 이별 과정에서 구하라를 먼저 발로 찼다는 얘기가 나와 이별폭력 가능성이 제기되고 최씨가 불법 영상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이야기도 불거졌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피해자인 구하라를 보호하기는커녕 더욱 저열한 말들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남성 네티즌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이 구하라 동영상 구하기에 혈안이기도 했습니다. 폭력을 행사한 최씨가 사생활 영상을 한 언론사에 팔려고 했다는 뉴스가 나온 작년 10월 4일,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의 인기검색어 1위는 '구하라 동영상'이었죠.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출처 - 여성신문
구하라는 법에 호소했지만 사법부도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친구 최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언학 부장판사는 최씨가 넘기려했던 사진 등의 수위와 내용이 제3자에게 유출됐다고 볼 만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최씨가 사진과 영상을 넘기기 위해 언론사들과 통화를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서도 구속영장을 기각한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재판부도 점입가경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심 재판부 오덕식 부장판사는 1심 재판 중 문제의 불법 촬영 동영상을 보자고 했습니다. 3차 공판에서 남자친구인 최씨도 90%가 나체인 자신만 등장하는 영상이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검찰 측도 성관계 영상이라는 이유로 해당 영상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재판부가 비공개로 영상을 확인하겠다고 강행의사를 밝히자 구하라의 변호인은 성관계 영상임이 분명하고 아무리 비공개하고 해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시 재생된다는 사실 자체가 2차 가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오덕식 부장판사는 단독으로 기어이 그 영상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사건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미명하에 성관계 장소부터 구체적인 횟수까지 확인하며 이를 판결문에도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가해자인 최씨 측에 서서 불법촬영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죠.
출처 - 미디어오늘
이는 성인지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2차 가해에 해당합니다. 오덕식 부장판사는 불법촬영에 관대한 판결을 주어온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3년간 41차례나 여성들 치마 속을 찍은 범죄자조차 집행유예로 봐줬으니 법조계의 성인지 감수성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죠. 이러니 설리와 구하라가 악플과 남성들의 폭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었던 사법부에서조차 2차 가해를 당하며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 들었을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많은 여성이 설리와 구하라의 비보 앞에 울분을 토하는 이유겠지요. 같은 일을 남성 연예인이 겪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자숙하다가 다시 방송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테니까요.
출처 - 경향신문
설리와 구하라의 죽음과 관련해 직접적인 가해자 중 가장 악독한 건 언론입니다. 자극적인 사생활 캐기를 돈이 되는 시장으로 만든 네이버를 비롯한 포털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거대 플랫폼이 악성 댓글을 기사로 확대 재생산하고 구하라의 법정 다툼을 게임 중계라도 하듯 트래픽 경쟁의 장으로 이용했습니다. 이와중에 설리나 구하라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어이없는 기사들까지 쏟아졌습니다. 과연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잠깐 《누구나 흔들리며 페미니스트가 된다》의 저자인 이유주 작가의 입장을 소개합니다. '피해자다움은 없다'라는 꼭지의 한 대목입니다.
혹자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말한다. 온 세상 남자들이 다 그리 나쁜 게 아니라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호의에 의존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종속이다.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의 의사가 아닌, 다른 이의 의사에 달려 있는 사람의 삶은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다. 사람이 알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뿐, 타인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 자체가 자유의 제약이요, 고통이다.
온 세상 남자들이 다 그리 나쁜 게 아니라는 말 자체가, 여성의 인권은 좋은 남성을 만날 때만이 지켜질 수 있으며, 여성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남성의 손에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러한 관계는 불평등하다. 여성 해방은 착한 남성을 만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남성을 만나든 여성의 권리가 지켜질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듦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남성의 호의를 구걸하지 않고도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때,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실제로 분석된 검색어를 보면 설리나 구하라의 연예 활동에 대한 기사는 극소수였으나, 설리의 인스타그램, 구하라의 동영상과 관련해서는 2000건에 달하는 기사가 쏟아졌다고 합죠. 검색어 장사를 하기 위해 언론들이 연예인, 특히 만만한 여성 연예인의 SNS를 통해 사생활을 털고, 그 밑에 달린 악플들을 밑밥 삼아 건수만 생기면 기사 같지도 않은 기사를 양산해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보고 악플러들은 다시 그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는 데 집착합니다. 이렇게 더러운 황색언론의 생태계는 두 여성 연예인에게 무수한 2차 가해를 쏟아내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설리에 대한 방송을 보면 그런 기사들은 기자가 쓰지조차 않았다고 하죠. 억울하게 죽은 두 사람 때문에 뒤가 켕기는지 언론은 이제 악플러들을 욕하는 기사를 쏟아내며 설리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사를 쏟아냅니다. 젊은 스타들의 죽음을 이렇게 자신들을 위해 활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 MBC
그동안 이런 문제에 언론계가 나서서 자정의 흐름을 만든 적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됩니다. 포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이번 사건을 계기로 카카오는 연예뉴스 댓글 서비스를 잠정 폐지했지만, 언론은 포털의 하나마나한 조치조차 피해나갈 궁리를 하는 데 골몰 중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악플을 달고, 누군가는 그걸로 같잖은 기사를 쓰고 있겠죠. 돈을 위해 누군가의 인생을 난도질하는 언론의 무책임한 횡포를 그대로 두어선 안 됩니다.
출처 - 머니투데이
출처 - 한국경제신문
우리나라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한 분야가 있습니다. 지난 2011년 하도급 분야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법은 사업자에게 최대 3배를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제도는 기업의 만연한 불법을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실정입니다.
출처 - 송윤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10월 25일 팟캐스트·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왜곡 보도한 언론을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징벌적 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 시장은 "언론의 자유는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언론에만 해당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실제로 서양에서는 언론의 악의적 오보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로 응징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민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언론이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가 아닙니다. 상업주의에 빠진 언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리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통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언론은 칼보다 강한 펜을 휘두르며 무고한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혹여 법정 다툼이 벌어지더라도 푼돈으로 자유를 만끽했죠. 더는 묵과할 수 없습니다. 저널리즘이 올바로 서도록 시민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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