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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대체 누구를 위한 '장자연 사건' 재조사였나?

by 생각비행 2019. 5. 24.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대해 10년 만의 재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힘 빠진 결론으로 실망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배우 장자연 씨가 각계각층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세상을 떠난 지 10년 사이 바뀐 게 사실상 없다는 방증입니다. 어쩌면 리스트에 거론된 가해자인 권력자들은 이 10년의 세월을 벌기 위해 이토록 질질 끌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증거도 진술도 부족한 상황에서 조사단은 13개월 동안 관련자 84명을 불러 진상 규명에 나섰지만 강제 조사권이 없어 한계를 실감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물론 아주 성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법무부 과거사 위원회와 진상조사단은 핵심 증인인 윤지오 씨의 과거 증언을 토대로 술접대 자리에서 고 장자연 씨를 성추행했다는 전직 기자를 재판에 넘겼고, 장자연 씨의 소속사 대표가 불합리한 전속계약에 근거해 술접대를 강요한 정황과 《조선일보》 관계자 등이 참석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수사기관이 장자연 씨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 등을 수사기록에서 누락하고 성접대 의혹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가 충분하지 않았던 점도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장자연 씨 오빠가 수사기관에 제출한 녹취파일과 녹취록이 사라진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기도 했죠. 나아가 《조선일보》 측이 수사를 무마하기 위해 외압을 행사했다는 결론도 내렸습니다. 과거사위는 당시 이동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조현오 당시 경기경찰청장을 만나 협박한 사실이 있다고 정리했죠.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습니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곁가지 이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습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 장자연 씨와 관련한 성범죄 의혹에 대해 수사를 권고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냈는데, 수사를 할 만큼 증거가 충분치 않고 관련 혐의 대부분이 시효가 지났다는 겁니다. 또한 장자연 리스트 존재 여부도 규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수사권이 없는 한계이기도 하고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검찰을 비롯한 권력층들의 자기비호 때문이기도 합니다.


출처 - JTBC


발표 당일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총괄팀장 김영희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번 재조사조차 비상식적인 결론이 났다고 폭로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참여한 진상조사단의 결론과 조사위원회가 밝힌 보도자료에 너무 다른 점이 많아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죠. 과거사조사팀은 6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독립성과 공정성이 우선되기 때문에 외부단원 4명이 중심이고 내부단원인 검사 2명은 보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장자연 사건 조사팀의 조사결과에서 소수의견에 불과했던 검사들의 의견을 이례적으로 위원회가 대부분 최종 결론으로 채택하면서 조사팀의 다수의견을 묵살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조사팀에서는 성폭행에 대해 세 건 정도의 유력한 진술이 있어 다수의견으로 수사 권고 결론을 냈는데 위원회는 그냥 기록을 보존하자는 검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극적인 결론을 냈다고 하죠. 장자연 리스트 역시 조사팀의 다수 의견은 리스트는 존재하며 그 리스트는 장자연 씨가 입은 피해를 기록으로 남길 목적이라는 것으로 너무나 상식적인 결론인데, 검사 쪽 소수의견은 이 리스트가 피해사실과 관련되는지 여부를 모르겠다는 상식 밖의 결론을 냈고 이것이 최종 결론으로 채택됐다고 하죠. 그나마 성과로 치는 당시 수사 미진이라는 점도 애초 조사팀은 당시 검찰 수사가 직무유기 수준으로 부실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 내용을 순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출처 - KBS


결국 누구를 위한 장자연 사건 재조사였을까요? 재조사 결과 발표조차 장자연 사건 가해자를 봐주기 위한 시도일 뿐 아니라 당시 경찰과 검찰의 과오를 덮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입니다. 공소시효가 아직 남은 특수강간 재수사 검토도 조사팀의 다수의견이었지만 검사들이 채택되지 않도록 막았다고 하니 그들의 카르텔이 아직도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여태까지 위원회는 과거사위의 조사기간 연장을 반대한다든지 아니면 조사팀의 관계자 소환 요청에 소극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 독립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소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과거사위가 운영될 때마다 관행적으로 다수의견을 채택했는데 이번엔 이례적으로 검사 측 소수의견들을 채택한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이럴 거면 대체 진상조사를 왜 한 거냐?'는 얘기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출처 – 연합뉴스


장자연 사건 당시 《조선일보》를 수사했던 경찰관이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고 1계급 특진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22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은 17개 언론 단체, 시민 단체 등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룡봉사상 공동 주관을 폐지하고 조선일보사에 내준 경찰 1계급 특진 인사권을 환수해 경찰 공무원 인사 원칙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청룡봉사상의 문제점은 생각비행이 〈대종상 대리 수상만큼 어이없는 청룡봉사상 사라져야〉라는 기사로 다룬 적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67년부터 《조선일보》는 공적이 뛰어난 경찰관들을 선발해 상을 주고, 경찰청은 수상자들에게 1계급 특진 혜택을 줬습니다. 그런데 2009년 초 장자연 사건 수사에 관여한 경찰관이 열마 후 청룡봉사상을 받고 특진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입니다. 장자연 사건 당시 《조선일보》가 수사에 외압을 넣었다고 발표한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청룡봉사상 특진 혜택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고 하죠.

 

출처 - 미디어스

 

아직 시효가 남아 있는 특수 강간 혐의 때문에 과거사위는 고 장자연 씨에 대한 성폭행 피해 증거를 나중에라도 발견하면 수사를 할 수 있다고 보고, 공소시효가 살아 있는 2024년까지 기록을 보관하라고 권고해서 재수사의 불씨는 남겨뒀습니다. 하지만 이번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마무리를 보며 국민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경찰과 검찰이 자기네 말처럼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을까?'라고요. 참으로 비통한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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