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개입 녹취록 파문, 무엇을 남겼나?
박근혜 대통령에겐 '선거의 여왕'이라는 수사가 따라다녔습니다. 2004년부터 2012년 총선까지는 그런 별명이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진박, 친박, 비박 타령을 하다 4.13 총선을 말아먹은 새누리당의 친박 핵심인 최경환 의원과 윤상현 의원 그리고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인 현기환의 녹취록이 폭로된 이후의 상황은 어떨까요? 국민의 대표를 뽑는 총선 과정에서 당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공천에 친박 세력이 의도적으로 개입했으며 그 흑막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었다는 내용이 알려진 이후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는 국정원의 불법적인 비호를 받았고, 이젠 자신이 속한 당의 선거에까지 부정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 이외에는 너무나도 유능하고 바쁜 대통령입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봐도 제대로 치른 선거가 없다시피 하니 '선거의 여왕'이라는 수사는 허울에 불과할 뿐이로군요.
출처 – 중도일보
지난 1월 친이계인 김성회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원 지역구를 되찾아오겠다며 화성갑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예비후보 등록을 했죠. 그런데 2월 3일 갑자기 화성갑에서 화성을로 예비후보 등록지를 변경했습니다. 이후 화성병이 신설되자 그쪽으로 출마 지역구를 옮겼다가 최종적으로는 경선에서 탈락했습니다. 총선 출마가 대입 눈치 보기 작전도 아니고, 출마 선언의 명분조차 무색해지는 변덕을 보였는데요.
출처 - 한겨레
그 이유가 지난번에 공개된 녹취록으로 드러났죠. 친박의 핵심인 윤상현-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이 화성갑에 친박계의 맏형인 서청원 의원이 출마할 것이니 자신의 계파가 아닌 친이계 김성회 의원더러 지역구를 바꾸라고 종용했던 것입니다. 친박계의 맏형 격인 분이 출마하는 지역구를 두고 공천 경쟁을 벌이면 친박계의 모양새가 빠진다는 얘깁니다. 그 당시 친박이 얼마나 오만했으면 공천에 대해 공식적인 권한이 없는 평의원 두 명조차 저런 말을 했을까요? 호가호위란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출처 - 뉴스타워
녹취록에 의하면 최경환 의원은 "세상을 무리하게 살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라며 공천해줄 테니 지역구를 바꾸라고 압박했으며, 자신들이 도와준다고 반복하며 김성회 의원을 안심시켰습니다. 롯데에서 50억을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롯데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용두사미 수사가 된 것도 최경환 의원이 '전화를 돌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윤상현 의원은 최경환 의원보다 먼저 김성회 의원에게 전화해 "까불면 안 된다니까. 대통령 뜻을 얘기해준 거 아니냐"며 지역구를 바꾸도록 종용했습니다. 새누리당 경선도 어차피 자신들, 친박들이 친박 브랜드로, 대통령의 사람들로 만드는 거라며 친박 실세들을 통한 공천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형(김성회 의원)에 대해 별의별 것을 다 가지고 있다며 지역구를 바꾸지 않을 경우 약점을 폭로하거나 사정기관을 동원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죠.
이처럼 친박의 실세라는 사람들이 약속했으나 김성회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뒷공작은 차치하고 약속을 얼마나 휴지 조각처럼 여기는지 드러나는군요.
출처 - 채널A
최경환, 윤상현 의원은 공천으로 싸울 필요 없지 않나 싶어서 충고한 거라고 변명했지만,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인 현기환 녹취록이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김성회 의원은 당시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도 전화를 받았는데 "가서 (서청원 전) 대표님한테 저한테 얘기했던 거 하고 똑같이 얘기하세요. 대표님 가는 데 안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물어보세요"라고 일방적인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현 수석은 "저하고 약속하고 얘기한 거는 대통령한테 약속한 거랑 똑같은 거"라며 이게 VIP(박근혜 대통령)의 뜻이니 따르라고 합니다.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김성회 의원이 말하자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지금 하라고 꾸지람만 듣습니다. 골목길 가로막고 '삥 뜯는' 것도 아니고 출마하겠다는 의원에게 깡패처럼 특정 지역구에 가라 마라 했으니, 대체 무엇하는 짓거린지 알 수가 없네요.
녹취록이 폭로되자 비박계와 야당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선거법 위반 사안이며 선관위와 검찰 수사 의뢰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이죠. 어떻게 보면 진박, 친박, 비박 타령으로 새누리당 총선 참패를 야기한 책임자들이 바로 공천 과정을 조작한 친박계 핵심들이고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정하던 박근혜 대통령일 텐데, 이들은 그 책임조차 회피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길들여놓은 조직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달 27일 새누리당 윤리위원회는 녹취록으로 불거진 친박 공천 개입 의혹을 사실상 다루지 않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전당 대회 이후로 책임을 미뤄버린 건데 새누리당에 윤리란 게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각 계파의 이익이 걸려 있는 사안을 이렇게 뭉개고 넘어갈 수 있음을 볼 때, 현재 새누리당이 얼마나 친박계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출처 - 뉴스300
선관위는 새누리당이 요청해야 이를 조사할 수 있다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24일 "비대위 차원에서 고발 의뢰할 생각이 없다며" 친박 총선 공천 개입 녹취록 파문에 대한 조사 의뢰를 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친박에 의한 명백한 공천 개입과 불법성이 물증으로 나왔는데도 새누리당의 요청이 없어 조사하지 않는다는 선관위와 쿵짝이 척척 들어맞습니다. 대한민국 선거판, 참 가관이지 않습니까?
더불어민주당은 정당 경선이 정당 자율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유로 선관위가 명백히 드러난 위법적 상황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앞으로 선거나 공천 과정에서 협박뿐 아니라 금품향응 제공, 자리보전과 같은 온갖 혼탁과 협잡이 난무해도 손을 놓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선거, 특히 자기 동네를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그 나라 민주주의 꽃입니다. 그 꽃밭을 자기 마음대로 휘젓고 꺾는 무뢰배들이 멀쩡히 눈에 보이는 대도 아무 제지를 하지 않는다면 원예사가 과연 꽃밭에 무슨 필요일까요? 선관위의 결단과 날카로운 조사로 녹취록의 흑막과 선거 부정을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기-승-전-사드
출처 - 경향신문
그런데 어느 순간 녹취록 보도는 언론과 방송에서 종적을 감췄습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논란이 모든 정치 이슈를 빨아들인 겁니다. 국가 안보 이슈가 대한민국 여론을 양분하는 사이 새누리당의 관심은 오직 8.9 전당대회에 쏠려 있습니다. 지난 6일 계파별로 특정 후보에게 투표하라는 문자메시가 돌면서 이른바 '오더(지시) 정치' 논란이 일었고, 전당대회가 계파의 이전투구 현장으로 변질되는 형국입니다.
한편 전당대회 기간 중 새누리당의 핵심 지지 세력인 대구·경북(TK) 민심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네 차례 연설회에서 계파 논란과 후보 단일화 등은 주요 이슈로 부각되었지만, 사드 문제를 언급한 후보는 찾기 어려웠으니까요. 이대로라면 새누리당은 사드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게 뻔합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가 이에 대해 "국가 최대 현안에 대해 전대에서 제대로 이슈화도 시키지 않는 후보들이 집권 여당 대표의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겠죠. 8.9 전당대회를 코앞에 둔 새누리당 친박계의 노골적 '이정현 밀기'가 어떤 결과로 끝이 날지 자못 궁금해지는군요.
생각비행은 지난 2월 〈테러방지법 vs 필리버스터 & 사드(THAAD)〉라는 기사에서 한반도의 사드 배치가 미국의 세계 구상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에게는 실익이 없는 일임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사드는 경제, 외교적으로 파국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고 안보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돈만 들어가는 국가사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사드 배치를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북풍으로 선거에 유리한 국면을 조장해보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는 선거 승리 외에 국민의 안위에는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방증하는 사례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란다면 사드 한반도 배치는 절대 불가한 일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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