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세, 왜 이렇게 비싼가?
38.2도. 몸살감기로 몸이 펄펄 끓는 환자의 열이 아닙니다. 지난 10일 사람 체온보다도 높게 치솟은 경주 날씨입니다. 이 밖에도 영덕은 36.5도, 포항은 34.4도 등 해안 지역도 찜통더위가 이어졌습니다. 기상청 지도에서 전국이 죄다 보라색이라 어디가 폭염경보 지역인지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죠.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에 안 그래도 여름만 되면 고온다습하고 장마에 시달려야 했던 우리나라는 이제 마치 아열대처럼 뜨겁고 스콜이 퍼붓는 지역으로 변모하는 중입니다. 기후의 변화로 이제 에어컨은 사치품이라기보다는 여름을 무사히 나기 위한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40년 전 산업화 시대의 낡은 체제가 우리 삶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바로 전기요금 누진제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리나라에서 주택용 전기요금은 전기사용량이 많을수록 요금이 비싸지는 누진제가 적용됩니다. 이런 제도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왜 논란이 되는 걸까요? 그건 40년 전 산업화 시대에 맞춘 낡은 기준이 변화된 환경과 상관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잦은 정전과 전기 생산 자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살기 어려운 시절을 거쳤습니다. 가정의 전기 사용을 최대한 억제해 산업용, 즉 기업이 쓸 전기를 마련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죠. 오늘날 대기업이 휘청거릴 때마다 국민의 혈세를 쏟아부어 살려내는 것처럼 과거에도 기업에 전기를 몰아주어 산업을 살리는 정책을 펼쳤던 겁니다. 그래서 산업용 등 비주택용 요금제는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 싶은 어르신들도 계실 테지만, 우리나라의 가정용 전기요금 체계는 누진제를 운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누진율을 채택하고 있어 전기요금의 상승 폭이 너무 크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출처 - KBS
우리나라 주택용 전기요금은 크게 6단계로 나뉩니다. 100kWh로 적게 사용할 때와 500kWh 이상 많이 사용할 때 무려 11배나 전기요금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과도하다는 얘기를 듣는 대만조차 5단계 누진제를 적용하고 있어 최고-최저요금 비율은 2.4배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의 11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의 누진제는 전력량 요금에만 부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한 전력과 상관없이 기본으로 내야 하는 기본요금에도 적용됩니다. 이에 의한 요금 차이는 무려 31.6배에 달합니다. 사채의 이자율처럼 불어나는 요금 체계에서 전기 먹는 하마인 에어컨을 마음대로 돌릴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서민은 언감생심입니다.
채희봉 산업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은 누진제 개편 여론이 비등하자 여름철 전력수요 조절을 위해 누진제는 꼭 필요하며 이를 없앨 경우 한전의 적자가 심해진다고 엄살을 부렸습니다. 채희봉 실장은 에어컨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때도 요금 폭탄이 생긴다는 말은 과장이라며 꼭 필요할 때 4시간씩 켜고 끄는 합리적인 사용을 하면 누진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서민을 개·돼지 취급하는 박근혜 정부가 사드 논란으로 안 그래도 뜨거운 여름에 성주 시민을 달아오른 아스팔트로 내몬 것처럼, 채 실장의 누진제 옹호 발언은 대한민국 전체에 뜨거운 기름을 끼얹은 꼴입니다. 에너지 문제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현실을 이렇게 모르다니 국민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출처 - 문화일보
대한민국은 산업화 시기를 거쳐 급성장했고 수십 년 사이에 기본적으로 쓰는 전기용품 자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진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지위도 전기를 쓰지 않으면 불가능했겠죠. 여름철이라고 집에서 에어컨 하나만 틀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밥솥, 냉장고, TV뿐 아니라 컴퓨터, 인터넷 공유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전기 없이 돌아가는 게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전기를 쓰는 물품이 이렇게 늘어난 상황에서 전기를 쓰지 말라는 건 1970년대 생활로 돌아가라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그럴 거면 경제발전은 왜 했습니까? 전기 생산을 위해 수많은 혈세를 쓰고도 아직도 전기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전기 부족 운운하는 산업자원부와 청와대 관계자들만 불볕더위에 전기 적게 먹는 벽걸이 에어컨으로 하루 딱 4시간만 틀기 바랍니다.
전력 수급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한국전력은 전기요금 때문에 적자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전은 이미 순이익 10조 원에 올 2분기 영업이익률만 20.4퍼센트에 달합니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이라는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 4.2%와 비교해보면 말도 안 되게 높은 수준이죠. 이 돈으로 한전은 임원 성과급을 70퍼센트나 늘렸습니다. 직원들은 술집에서 법인카드를 펑펑 긁어댔고요.
하지만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는 뒷전이었습니다. 올해 한전의 신재생에너지 투자 규모는 1151억 원, 순이익 대비 1.1퍼센트 수준입니다. 자기네끼리 돈 잔치한 성과급 지급 총액의 3분의 1도 채 안 되는 액수입니다. 이쯤 되면 전기요금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아시겠죠? 한마디로 도둑이 너무 많은 것이지, 전기가 부족한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 재생가능에너지의 잠재량 / 우리나라 가정용 전력 소비량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재생가능에너지의 이론적 잠재량은 354억 4241만toe로 산지와 도로, 철도 등을 제외하고 입지 조건을 고려한 지리적 잠재량은 97억 3249만toe, 이 중에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의 기술적 잠재량은 13억 7167만toe에 달합니다. 2013년에 우리나라가 소비한 1차 에너지원은 모두 2억 8029만toe이므로 기술적 잠재량만 해도 현재 우리나라 총에너지 소비량의 약 5배인 셈입니다.
출처 - 《왜 에너지가 문제일까?》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재생가능에너지 조건이 다른 나라보다 나쁘지 않아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거나 "난 값이 올라도 그냥 화석연료 사다 쓸래요." 아니면 "난 핵에너지가 좋아요. 발전소는 우리 집 앞에 지으세요." 하고 말해야 하겠죠.
화석연료와 원자력, 그리고 재생가능에너지 중 어느 에너지를 쓰느냐 하는 건 경제성과 자원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안정적으로, 지속가능하게 에너지를 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의 문제일 뿐입니다. 선택은 결국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책이 어떻게 되느냐 역시 우리 모두의 몫이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높은 누진세를 적용하는 가정용 전기요금 체계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전기세를 앞으로도 꼬박꼬박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 가정용 전력 소비 비율은 더 줄이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위 표를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전력 소비 비율은 산업/상업용 전기 소비가 87퍼센트를 차지하고 가정용 전기 소비는 13퍼센트에 불과합니다. OECD 주요국 1인당 가정용 전력 소비량의 절반밖에 안 쓸 정도로 우리 국민은 전기를 아껴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산업/상업용 전기 요금을 현실화하고 그쪽에 누진제를 시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용 누진제는 완화하면서 말입니다.
출처 - JTBC
그런데 산업계는 허구한 날 죽는소리만 합니다. 전기료를 올리면 기업의 원가부담이 너무 커져 수출과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이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사실 제조업 원가에서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1.6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시뮬레이션 결과 산업용 전기요금이 1퍼센트 늘어날 때 기업의 원가는 0.016퍼센트(제조업 평균) 증가할 뿐이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한국전력의 연구 결과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출처 - 연합뉴스
40년간 말도 안 되게 싸게 공급된 산업용 전기요금이 이번에 미국의 관세폭탄으로 돌아왔습니다. 특히 철강 분야에 관세폭탄이 떨어진 이유에는 한전의 산업용 전기요금이 지나치게 싸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 정부가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같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대체 전기가 얼마나 싸면 그 많은 쇠를 용광로가 아닌 전기로로 녹이냐는 겁니다. 이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겨우 0.0399퍼센트(1차 금속)에 불과한 원가를 아끼겠다고 전기요금을 붙잡아 봐야 관세폭탄을 맞고 나면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으로 되레 엄청난 손해가 초래될 뿐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가정용 전기에 누진제 폭탄을 안기면서까지 산업용 전기에 특혜를 줄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올해에만 대구 경북에선 온열 질환자가 65명 발생했고 그중 4명이 숨졌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세상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정부의 전기 아껴 쓰기 정책 홍보도 이젠 지겹습니다. 전기를 낭비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하는 게 먼저여야 합니다. 전기료 폭탄에 민심이 들끓자 여당인 새누리당은 8월만 누진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하자면서 청와대의 방침과 달리 한 발 물러선 입장입니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식 정책보다 전기요금 체계는 근본적인 개편이 필요합니다. 국민이 40년이나 먹여 살려줬으면 이제 갚을 때도 되지 않았나요? 불지옥 같은 헬조선에서 에어컨 바람이라도 좀 속 편히 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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