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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잔혹 동시 논란,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일까?

by 생각비행 2015. 5. 8.

'홍콩할매귀신'을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1980~1990년까지 초등학생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괴담으로 그 파급력이 대단했던 나머지 뉴스데스크에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그 인기를 틈타 어린이 베스트셀러 코너가 무서운 표지로 도배된 귀신 이야기로 도배되다시피 한 적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서점의 어린이 코너를 지날 때마다 간을 뽑아 먹는다는 흉흉한 괴담을 이미지화한 표지에 무서워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끔찍하고 무서운 내용이 담긴 홍콩할매귀신 부류의 이야기와 괴담은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책은 계속 돌려 읽은 탓에 다 헤질 정도였고, 그런 책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였죠. 물론 부모님들은 이런 책을 읽지 못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출처 - 연합뉴스


최근 잔혹 동시 논란을 보면서 옛날 일이 생각나 홍콩할매귀신 이야기를 서두에 꺼냈습니다. 최근 10살짜리 초등학생이 직접 썼다는 동시집 《솔로 강아지》가 논란의 핵심입니다. 이 동시집에 실린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작품이 동시답지 않은(?) 잔혹한 표현으로 잔혹 동시라 불리며 사람들의 비난을 사고 있습니다. 우선 어떤 동시인지 직접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출처 - 쿠키뉴스


학원가기 싫을 땐 엄마를 씹어 먹으라는 표현으로 시작해 심장은 맨 마지막에 가장 고통스럽게 먹으라는 내용을 보면 확실히 기존의 동시와 다르고 표현의 잔혹함 때문에 거부감과 불편함 그리고 섬뜩함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를 삽화로 직접 저렇게까지 표현해야 했을까 싶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시의 특성상 글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논란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어린이가 썼다고 보기엔 잔혹한 내용의 동시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자 사람들은 잔인한 표현의 동시를 쓴 아이와 이를 용인한 학부모, 출판사, 삽화가를 싸잡아 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논란이 확산되자 출판사는 사과문을 내고 동시집 《솔로 강아지》를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문제가 사그라드나 했는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동시집을 쓴 아이의 부모가 책 회수와 폐기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솔로 강아지》 회수 및 폐기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기 때문입니다. 시집에 수록된 58편 중 단 1편만 문제가 되는 것인데 책 자체를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시의 내용과 삽화가 잔혹하다면 미성년자 구입불가 서적처럼 비닐 포장을 해서 성인들에게만 판매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죠. 지금의 잔인한 한국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가 스스로 느낀 바를 시로 쓴 것인데,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책을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폐기하는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이냐 하는 얘깁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레진코믹스 차단 사태 때는 방심위를 질타하던 여론과 달리 이번 잔혹 동시 문제에 있어서는 저자와 출판사를 맹비난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저자가 아이이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자칫하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도 있는 까닭에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과연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 잔혹 동시를 비난하는 분들과 옹호하는 분들, 양쪽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솔로 강아지》가 미성년자 구입불가 도서로 판매가 제한되지 않았고, 동시집이라는 작품의 특성상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 때문에 삽화가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비판은 타당해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책을 회수해서 폐기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법 또한 그리 이성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서두에 이야기했다시피 다양한 귀신 이야기와 잔혹한 내용을 담은 괴담집을 어린 시절에 읽었다고 해서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요?

 

출처 - 트위터


물론 잔혹 동화를 출간한 출판사 측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책 출간이나 판매와 관련하여 조금 더 신중하게 처신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책이 사회전 논란에 휩싸이자 출판사 측은 회수해서 폐기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으나 동화책을 쓴 아이의 어머니가 그런 처리 방식이 지나치다고 반발하고 있는 만큼, 이 문제가 어떻게 흘러갈지 조금 더 주시해야겠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동화가 금서가 된 적은 많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당대에는 아이의 심성을 망치고 사회를 붕괴시키는 악마의 책으로 치부된 책도 많았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해리 포터》는 마법이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미국 한 공립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된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편 어린 시절에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인 동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금서 목록의 단골이었습니다. 내용이 아이들의 공격심을 유발한다는 게 그 이유였지요. 미국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떤가요? 신성모독, 성 묘사, 인물들의 부정적 사고방식 등을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던 책이죠. 지금은 미국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과서처럼 쓰일 정도인데 말이죠. 지금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읽히지 못해 안달인 로알드 달의 동화 역시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는 어른들이 몹시 불편해하고 곤란해하던 책이었죠.


출처 - EBS


홍콩할매귀신처럼 어린이의 필독서였던 《먼나라 이웃나라》 다들 기억하시죠? 저자인 이원복의 다른 만화인 《현대문명진단》이라는 책을 보면 힙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랩과 힙합의 내용이 너무 과격하고 자극적이며 어둡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자 힙합 뮤지션 스눕 독이 자기 어린 시절 사진을 내보이며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을 포함해 이 사진에 찍힌 20명은 어린 시절 함께 축구를 하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인데, 거의 대부분이 빈민가 생활 중 총에 맞아 죽거나 범죄를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다. 이 사진 속에 온전히 살아남은 건 나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인생이 아름답네, 예의 바르게 살자 같은 노래나 부르고 앉았으면 그게 더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겠느냐고 일침을 가합니다.


이번에 사회적 논란에 휩싸인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동시는 그 표현의 경중은 차치하더라도 학원과 경쟁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의 현실적인 비명소리라고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어른의 세계에서 '삼포세대'네 '5포세대'네 하는 지옥도가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의 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어쩌면 아이는 그냥 한국에서 엄마로 대표되는 한국이란 현실의 잔혹함을 느끼는 대로 묘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인 이 동시집 작가의 어머니는 딸의 시가 사회적으로 잔혹성 논란을 일으켜 송구스럽다면서도 논란에 휘말린 시 <학원 가기 싫은 날>이 숨쉴 틈 없이 학원으로 내몰리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우화로 인정될 만한 예술성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신도 이 시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일주일에 두 번 보내던 영어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면서요. 그러면서 논란이 된 점을 수정하기 위해 책을 회수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폐기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범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출처 – 다음 뉴스


사회 일각에선 동시집에 대한 비난이 지나쳐 이 시를 쓴 아이를 패륜아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한 사이코패스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런 비판은 작품으로서의 시와 시를 쓴 아이를 지나치게 동일화해서 보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인터뷰를 통해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라고 있는 아이이며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논다고 밝혔습니다. 온라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원색적인 욕을 해대며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들 쪽이 더 잔혹하지는 않은지 돌아볼 점이 있습니다.


분명 사회에는 준수해야 하는 상식과 기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상식과 터부에 도전하고 이를 깨부수면서 나아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아간 예술은 다시 다음 시대의 상식과 기준이 되었죠. 표현의 자유는 과연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걸까요? 감정적인 비난에 앞서 이성적인 토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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