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번쯤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warning.or.kr.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불법 유해 사이트 경고 페이지입니다. 지금 당신은 대한민국이 정한 불법 불순 정보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경고입니다. 죄목을 살펴보니 무시무시합니다. 안보위해 행위, 도박, 음란, 불법 약품 판매, 불법 마약류 판매 등등 영화에나 나옴 직한 죄목이 즐비합니다.
출처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그런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warning.or.kr이 근거 없이 사이트들을 차단하여 표현의 자유와 자유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 했더니 접속 차단으로 물 먹이는 방심위
국내 만화 산업의 대세는 만화책이 아닌 웹툰입니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미생>을 비롯해 다양한 장으로 뻗어 나가는 웹툰의 기세는 대단합니다. 그런데 최근 국내 대표적인 유료웹툰 서비스인 레진코믹스의 독자들은 지난 3월 26일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연재만화를 보러 접속했는데 warning.or.kr.로 차단되었다는 화면이 보였기 때문이죠.
독자들은 물론 레진코믹스조차 왜 차단되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warning.or.kr.만 망연히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접속 차단 이유는 실로 간단했습니다. 음란물 신고가 들어왔다고 방심위가 순식간에 접속 차단 조치를 했던 겁니다. 청소년 접근 제한 조처 없이 일부 콘텐츠가 음란물에 해당했기 때문이라고 방심위가 밝힌 내용은 사실 억지에 가깝습니다.
출처 - 동아일보
우선 레진코믹스는 방심위로부터 어떤 경고나 문제 지적을 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현행 청소년보호법률 규정대로 성인물은 아이핀이나 이동통신사 인증을 받아야 볼 수 있게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방심위는 '전가의 보도'처럼 항상 드는 핑계를 내세웠습니다.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세상에 청소년이 존재하는 한, 성인을 위한 콘텐츠는 만들어서도 향유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레진코믹스는 시작한 첫해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해 현재 회원수 700만 명에 매출액 100억이 넘는 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공짜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던 웹툰을 당당히 돈 받고 봐야 하는 프리미엄 문화 콘텐츠로 전환시켜 만화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박근혜 정부는 2014년 창조경제의 우수 사례라며 레진코믹스에 대한민국인터넷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여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박근혜 정부의 방심위는 레진코믹스 사이트에 무통보 접속 차단이라는 철퇴를 가했습니다. '창조경제'라는 용어 자체가 우스운 개념이긴 합니다만, 레진코믹스 차단 사례를 보면 대체 창조경제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출처 - MBC
이용자들의 항의와 만화라는 예술 분야의 표현의 자유 침해 등을 이유로 언론이 요동치자 방심위는 하루만에 접속 차단을 철회합니다. 차단할 땐 음란물이어서 차단했다더니 철회하면서는 사무처가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관행적으로 일처리를 하다 실수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이는 애초부터 문화에 대한 식견 없이 보수적이고 관성적으로 일처리를 할 뿐, 제대로 콘텐츠나 사이트 등을 심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차단 앱으로 청소년을 보호하겠다고?
지난 16일부터 방송통신위원회의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 따라 청소년은 스마트폰에 청소년 유해정보 차단 서비스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합니다. 청소년이 차단 앱을 지우거나 하면 보호자에게 통보되게 하는 방안까지 강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신사마다 서비스가 난립하고 있는데다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아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출처 – 오늘의 유머
한 통신사의 청소년 유해정보 차단 서비스에 달린 평들을 보면 유머에 가까운 해프닝이 즐비합니다.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가 부모에게 스팸 문자처럼 통보된다면, 이는 문제 해결은커녕 청소년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가족들에게 스트레스만 더하는 사회적 낭비가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검열의 일상화!
레진코믹스와 청소년 유해정보 차단 서비스 사례의 가장 큰 문제는 검열이 일상화되고 내재화된다는 겁니다.
출처 - 슬로우뉴스
현재 방심위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warning.or.kr은 패킷 감시로 작동된다고 합니다. 이는 주요 인터넷 사업자의 망 중간에 커다란 국가감시망을 설치하고 통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국가의 감청 시스템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인터넷 주소창에 어떤 내용을 입력하고 웹브라우저를 통해 무엇이 오가고 있는지 마음만 먹으면 정부는 언제든 감시하고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청소년 유해정보 차단 서비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청소년이 쓰는 카톡, 문자, 페북 등 모든 일상을 감시하고 있다는 얘기니까요. 그 주체는 정부와 부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프라이버시를 제한당하며 자란 아이들이 과연 다른 이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수 있을까요?
국가와 부모들이 청소년 유해정보를 걸러내고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살인적인 입시 경쟁을 없애고 세대간 대화와 교류를 늘리는 일입니다. 더 우선적인 일을 방기한 채 청소년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는 지나친 편의주의요 권리침해가 될 뿐입니다.
레진코믹스 사이트 차단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문제되는 이미지가 있다면 그 이미지만 수정을 요구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다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인 사례였습니다. 그런데 마치 공권력의 맛을 보라는 듯 사이트 전체를 무통보 차단해버렸습니다. 더구나 차단된 시간 동안 기업과 이용자들이 본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 운운하며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기업의 이익조차 침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범국민 추모제에 참석한 시민을 향해 공권력은 차벽, 최루액, 물대포, 무차별 채증 등으로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와 통행의 자유를 제한했을 뿐 아니라 인터넷 감시와 심의를 통해서도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검열을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텔레그램으로 사이버 망명을 택했던 수많은 시민의 결단이 이를 방증합니다. 점차 일상으로 파고드는 검열에 익숙해지다 보면 검열을 내재화하여 활동과 표현을 스스로 위축시킵니다. 자기 검열에 빠져드는 거죠. 실생활과 인터넷 공간 양쪽에서 국민을 입맛대로 길들이려는 정부와 공권력 행사를 이대로 좌시해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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