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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사진으로 돌아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by 생각비행 2015. 4. 11.

지난 4월 7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집회(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뜻깊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베트남에서 오신 응우옌티탄 씨입니다. 응우옌티탄 씨는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와 꽃다발을 나누며 서로 응원했습니다. "같은 전쟁의 피해자로서 두 할머니의 행동은 정말 옳은 일이라 응원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셔야 합니다"라고요. 수요집회를 응원차 방문한 응우옌티탄 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지 궁금해하는 분도 계실 텐데요. 아닙니다. 이분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가족을 잃었고, 본인도 부상 끝에 살아남았습니다.

 

출처 - 한겨레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직시해야 한다


1956년부터 1975년까지 20여 년간 지속된 베트남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축으로 한 냉전 체제의 대리전이었다는 양상에서 한국전쟁과 연관 지어 생각할 지점이 많습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이 참전했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력파견이 점점 늘어나고 전투가 격렬해짐에 따라 반전운동이 치열해지고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도 날로 커졌습니다. 고엽작전과 양민학살 등의 만행이 드러나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집회와 데모가 그치지 않았죠.

 

출처 - 국방일보


반공을 국시로 내건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미국에 먼저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자 베트남 정부와 미국에서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합니다. 이에 대한민국의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정예 부대가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파병 병력은 32만 명, 파병이 최고조에 달한 1968년에는 베트남 주둔 한국군만 무려 5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미국을 뒤이어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국가라고 할 수 있죠. 꼭 돈만이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월남 파병이 달러벌이의 일환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현실입니다. 한국군은 당시 4만 1000명의 베트남군을 사살하고 미국으로부터 2억 350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이런 핏값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이뤘습니다. 베트남 파병 이후 우리나라의 GNP는 5배가량 성장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21


문제는 한국군의 참전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전쟁 상황은 어느 쪽을 구분할 것 없이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사달이 안 날 수가 없죠. 미국에 의한 대표적인 만행인 미라이 학살뿐 아니라 대한민국 해병대인 청룡부대에 의해 자행된 퐁니, 퐁넛 양민 학살은 베트남 국민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그 전말이 밝혀졌습니다.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이 7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중대한 전쟁범죄였습니다. 

 

이밖에도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학살하고 가매장한 사건인 하미 마을 학살 사건, 430명의 마을 주민을 죽인 빈호아 학살 등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베트남 내에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미군 역시 진상 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군과 국방부는 학살이 없었다며 실체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달리 양심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베트남 참전 당시 우리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며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를 세우고 마을을 위해 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익 단체 방해로 파행 겪던 베트남전 학살 사진전 개막


이런 상황에서 고엽제전우회 등 우익 단체의 방해로 파행을 겪던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이 지난 8일 개막했습니다. 광복 70주년,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아 사진전을 기획한 평화박물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 씨와 응우옌티탄 씨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갤러리 스페이스99를 방문해 오픈행사에 참석하고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이번 사진전엔 베트남전 당시 학살을 당한 피해자를 기리는 위령비와 베트남 마을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었고, 다른 한편에는 한국의 베트남참전기념비를 담은 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출처 - 국제신문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베트남 지역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한 이재갑 작가는 하나의 전쟁인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한국과 베트남의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며 왜곡된 진실과 감춰진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출처 - 한겨레


약자들의 시위 현장마다 빠지지 않고 나타나 훼방을 놓는 고엽제전우회는 이번에도 1000여 명(경찰 추산 700여 명)을 동원해 베트남 피해자 초청 행사가 열린 식당 인근에서 집회를 열고 "월남참전 고엽제 환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베트콩을 민간인 희생자로 둔갑시켜 참전자들의 희생과 명예를 실추시겼다"며 전시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고엽제는 미국에서 뿌린 것인데 왜 고엽제전우회는 그 책임을 베트남에 전가하는 걸까요? 정말로 고엽제로 고통을 당하고 계신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을 욕되게 하는 건 바로 이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재갑 작가는 참전용사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로 생각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두 개의 기억'이란 사진전 제목도 베트남전을 '학살'로 기억하는 베트남인과 '참전'으로 기억하는 한국 참전용사들의 처지를 두루 고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출처 - 프레시안


베트남전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우리나라가 갑작스레 가해자로 취급받는 상황에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수요일마다 일본군 위안부 진상 규명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우리가 떳떳하려면, 우리의 과오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일본이 발뺌하고 역사를 왜곡할 때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처럼, 우리가 발뺌하고 역사를 왜곡할 때마다 베트남 국민도 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진전이 한국과 베트남이 평화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안고 분단과 냉전의 희생양이 된 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는 닮은꼴입니다. 1992년 수교 이래 경제적 교류는 늘어나고 있지만, 양민 학살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국민이 베트남전 당시 우리 군이 자행한 양민 학살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 서독 총리인 빌리 브란트는 "역사에 눈 감는 자는 미래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베트남의 아픔을 외면하고서 일본의 역사 왜곡만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전이 폭넓은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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