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직장인들을 불쾌하게 하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국 노동자(보고서 내용은 근로자)들이 경쟁국보다 일하는 시간이 짧고 생산성도 낮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발표 내용에는 한국 노동자들이 경쟁국 노동자보다 월급은 더 많이 받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적게 일하는 주제에 돈만 많이 받고 있는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근로시간 단축이나 임금 정상화 같은 변화가 꿈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죠.
지난주 기사를 읽는 내내 불쾌함과 의구심이 교차한 분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OECD 평균 근로시간을 수백 시간이나 초과하는 과로 사회로 인식되었으니까요. 오늘은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아전인수하는 통계의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출처 - 스포츠경향
일은 덜 하면서 월급만 많이 받는 한국인 노동자?
― 통계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17일 발표한 <아시아 경쟁국의 근로시간 임금 생산성 비교 및 시사점>이란 보도자료를 보면, 한국 평균 근로시간이 2011년 2193시간으로 아시아 경쟁국인 홍콩(2344시간), 싱가포르(2287시간)보다 짧다고 합니다. 대만은 2144시간, 일본은 1706시간으로 우리나라보다 근로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IMF가 조사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우리나라가 2만 5975달러로 싱가포르(5만 5182달러), 홍콩(3만 7955달러)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고 밝혔습니다. 대만은 2만 925달러, 일본은 3만 8468달러였습니다. 아울러 노동생산성은 2013년 우리나라가 5만 8700달러인데 반해 싱가포르는 9만 2000달러, 홍콩은 9만 200달러, 일본은 6만 3300달러, 대만은 7만 4600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물가 반영 구매력 기준 월평균 임금은 2005년 우리나라가 2598달러로 일본(2418달러), 대만(2162달러), 싱가포르(1757달러), 홍콩(1546달러)보다 많이 받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 국민일보
이런 통계 자료를 내세우는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형성되고 있는 근로시간 단축 움직임에 대한 명백한 반대 의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싶다면 아시아 경쟁국보다 떨어지는 노동생산성 대비 고임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속셈이 깔렸으니까요.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다른 정부기관인 고용노동부 집계만 보더라도 2012년 우리나라 노동자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2092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무려 420시간이나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손꼽히는 과로 국가라는 게 국가 통계였는데, 이번에 나온 대한상공회의소 인용 자료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바로 여기에 정부와 기업들의 꼼수가 숨어 있습니다.
농구는 점수가 많이 나니 야구보다 우월하다?
근거 없는 인터넷 루머까지 긁어오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아전인수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료는 애초에 비교 국가가 잘못되었습니다. 보도자료의 주요 비교 대상인 싱가포르와 홍콩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금융 중심지입니다. 당연히 국가의 가장 큰 산업이 금융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형 제조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지요. 그러니 1인당 생산성은 당연히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산업 쪽의 통계 수치가 크게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기간 설비 투자는 응당 제조업 쪽이 훨씬 많이 듭니다.
이렇게 명백한 차이가 있음에도 금융업 국가와 제조업 국가를 같은 선상에 두고 단순 비교하는 것은, 농구와 야구가 같은 구기 종목이니 똑같이 점수 차로 비교할 수 있다는 얘기처럼 어리석은 논리입니다. 슛 한 번에 2점, 3점씩 나와 점수가 100점도 넘게 나는 농구가, 기록적인 득점을 해도 20점 안팎인 야구보다 우월하다거나 효율이 높다는 헛소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비교를 하고 싶다면 농구는 농구와 야구는 야구와 해야 합당하듯이, 1인당 생산성 통계 역시 비슷한 나라를 대상으로 할 때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의 1인당 생산성이 낮은 이유 중 하나로 지나치게 시간만 많이 들이는 야근문화가 한몫합니다. 생산성은 단위 시간당 창출된 가치로 평가를 하는 잣대인데, 상사 눈치를 살피느라 일도 안 하면서 회사에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직장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하는 시간만 늘려봐야 생산성만 떨어진다는 건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임금 후려치기는 또 얼마나 심각합니까?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임금상승률 등을 따져보면 우리나라 노동자의 생산성이 낮은 이유에 경제의 낙후된 구조라는 크나큰 문제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산업 전체의 부가가치를 키우는 일은 노동자의 몫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의 몫이라는 것도요.
출처 - JTBC
우리나라가 일도 못 하면서 홍콩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다는 대목에 들어가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근거랍시고 내놓은 자료라는 게 9년 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인터넷 사이트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SBS와 JTBC 취재 결과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이 사이트를 누가 만들었는지, 이 사이트에 나온 결과를 검증하긴 했는지 캐묻자 대한상공회의소는 발뺌 끝에 검증되지 않은 통계라며 사과했다고 합니다. 국가기관이 출처조차 불명확한 사이트에서 긁어온 통계를 국민 앞에 들이밀며 어깃장을 놓는 꼴입니다. 한국인은 일도 못 하는 주제에 돈만 많이 받는다는 폄훼성 논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친일파나 할 법한 얘기 아닌가요?
대한상공회의소 보고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노동임금 현실화라는 여론을 교란하고자 하는 박근혜 정부와 대기업의 협잡에서 비롯된 말도 안 되는 촌극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근거도 없는 내용을 아전인수 격으로 만든 통계로 혹세무민하는 것이죠.
출처 - 연합뉴스
통계청이 발표한 2014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를 보면 임금근로자 1873만 4000명 중 월급여 100만 원 미만이 12.4%, 100~200만 원이 37.3%로 월급이 200만 원도 안 되는 근로자가 전체의 49.7%에 달합니다. 이것이 한국 근로자의 현실입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런 노동자를 두고 돈만 많이 받는다고 타박입니다.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가기관이 나서서 본질을 호도하고 국민에게 노예가 되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아전인수 통계에 정부 신뢰 추락
아전인수에 잦은 오류까지 맞물려 이명박근혜 정부가 발표하는 통계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습니다. 발표하는 기관마다 기준이 제각각이고 작성 과정에서 실수와 오류가 잦습니다. 관료와 정치인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아전인수 격인 해석을 곁들이면서 국민의 불신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출처 - 경향신문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주택거래량을 발표하면서 8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해 주택시장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했으나, KB국민은행과 부동산 114 등의 자료에 의하면 여전히 하락세였습니다. 정부는 월세가 안정세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시장에선 올 들어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실업률 통계도 마찬가집니다. 실질 실업률이 10.1%가 넘어가고 있는데, 고용노동부는 취업준비생이나 하루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하는 시간제 노동자까지도 실업자에서 제외하여 실업률이 3.2%라고 진실을 호도합니다. 지난 9월 국토부는 아예 잘못된 미분양 통계를 발표했다가 망신을 톡톡히 당했습니다.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통계는 제대로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되지만 애초에 조작과 왜곡의 여지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통계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는 까닭은 정부와 기업이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대책을 세우는 데 통계를 사용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려고 아전인수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제발 제대로 된 통계 자료로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는 데 활용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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