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정권이 끝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크게 두 가지를 단행했습니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시행이 그것입니다. 삼당 야합, 아들 김현철의 비리, IMF 금융위기 등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일만큼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29일 금융실명제법이 개정되어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됩니다. 금융실명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출처 - 한국경제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작된 금융실명제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금융실명제를 단행합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그 이전에도 시도된 적이 있습니다. 1982년 대한민국 금융 사기의 대명사인 장영자, 이철희 사건 때문에 도입 시도가 한 번 있었고 놀랍게도 군사독재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의 대선 공약으로 금융실명제가 등장하기도 했으나 곧 유예되고 맙니다.
출처 - 한겨레
사실 금융실명제는 매우 위태로운 과정을 거쳐 문민정부 시절에 도입되었습니다. 독재정권의 대선 공약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나 도입되지 못한 현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선포한 것이지요. 정상적인 법 절차를 따랐다면 국회의 논의를 거쳐 제정하고 이를 대통령이 최종 서명하여 선포 후 시행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의식과 정치 수준으로는, 금융실명제를 국회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편 가르기와 시간 낭비 끝에 유명무실해지거나 다음 정권으로 넘어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불법 자금이 은행에서 빠져나와 지하로 숨어들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그 당시엔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상당수였으니 말 다했죠.
이런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뒤에 법률안을 만들어 정식으로 시행했습니다. 이는 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건 정면돌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악에는 탄핵까지 각오해야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일제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릅쓰고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가 아니라 폭파해버리는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가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한 결단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출처 - 한겨레
금융실명제 덕분에 우리나라 경제가 꽤 투명해지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반쪽짜리 실명제에 가까웠습니다. 차명계좌 때문이죠. 금융실명제를 단행해 허명계좌나 가명계좌는 사라지게 되었으나 실존하는 사람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만큼은 현실적으로 단칼에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정서는 지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를 들어 2000만 원 이상은 종합과세되니 부인 명의 계좌로 쪼개 예금하여 절세하는 방법을 재테크의 상식처럼 얘기하고 이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차명계좌입니다. 소득세는 개인 단위로 내게 되어 있으므로 엄밀히 얘기하자면 남편의 소득을 부인의 계좌로 공유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당연히 여기는 경제관념을 단칼에 불법으로 치부해버리면 부지불식간에 전 국민이 경제사범으로 몰리게 되므로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에는 차명계좌는 묵인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하지만 차명계좌 때문에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비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 비자금 사건입니다. 2008년 특검이 밝혀낸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차명계좌는 무려 1199개로 모두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던 재무라인 임원들의 이름으로 개설된 계좌였습니다. 대기업뿐 아니라 정치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두환은 노숙인의 이름을 빌리는 편법으로 수천 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비자금을 세탁했습니다. 그럼에도 반쪽짜리 금융실명제로는 이런 불법을 처벌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소 늦었지만 이런 허점을 막고자 개정된 금융실명제법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년 만의 개정, 차명계좌 원칙적으로 금지하나 예외 있어 논란
21년 만에 개정된 금융실명제법인 차명거래금지법이 오는 29일부터 시행됩니다. 원칙적으로 차명계좌거래를 금지하지만 몇몇 예외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배우자 명의로 6억 원, 자녀 명의로 5000만 원, 부모 명의로 3000만 원까지 차명계좌 예금이 가능해집니다. 이 범위를 넘어서면 명의를 빌린 사람과 빌려준 사람 모두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 등 처벌을 받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로 합의하면 다른 사람 명의로 예금해도 처벌받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삼성 비자금 사건 같은 비리를 저지르려면 자신뿐 아니라 계좌 명의를 빌려준 수천 명을 범법자로 만들 각오를 해야 하겠지요.
또한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돈을 실소유주가 아닌 계좌 명의자의 소유로 추정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더라도 실소유주의 돈이라는 판례가 많았지만, 그 이후로 판례가 뒤집혀 차명계좌의 돈은 그 명의자의 소유라는 판결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두환 비자금 같은 비리가 다시 일어나더라도 명의를 빌려준 노숙자가 자기 명의 통장에 든 돈의 소유를 주장하면 그 돈은 이제 전두환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는 지금까지 묵인되어 악용된 합의 차명계좌에 대한 방지책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부산일보
물론 이번 개정안도 한계와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애초에 야당이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은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조카의 대학 등록금을 삼촌이 대신 내어주는 등 선의의 차명거래를 예외적으로 구제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시행될 개정안은 비자금 등 불법행위를 목적으로 한 차명거래만 금지하도록 타협한 결과물입니다.
차명거래 금지 예외에 대한 기준도 모호합니다. 금융권의 경우 위에서 예를 든 절세형 상품들이 위법이 될 수 있어 혼란이 예상됩니다. 예금보호법의 보호를 받고자 자식 명의나 부모 명의로 돈을 나눠 예금하고 있었던 일반인들도 애매한 상황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먼 친척이나 타인의 명의로 차명계좌 예금을 해뒀다면 개정안 시행 후 돈을 떼일 수도 있으니까요.
한편 계, 부녀회, 동창회 등 친목 모임의 회장, 총무, 간사를 맡으면서 회비 관리를 위해 개인 명의로 차명 거래를 하거나 문중, 교회 등 단체의 금융자산을 관리할 목적으로 단체 대표가 계좌를 개설하여 차명거래 하는 행위는 허용됩니다. 이 경우 악용할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이 역시 금융실명제 개정안이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나면 옥석이 가려지겠지요.
궁극적으로 차명거래는 완전히 금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금융실명제 역시 그렇게 발전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에 따른 공정 과세를 실현하는 일을 병행해야 합니다. 금융실명제는 사회경제를 투명하게 함으로써 정확하고 공정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금융 당국, 기업, 시민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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