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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노동절에 노동자를 근로자로 순화하라는 국립국어원

by 생각비행 2014. 5. 2.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낸 세월호 사고

노동절로 시작한 5월입니다. 노동절 휴무를 계기로 전국 각처의 분향소를 찾아 세월호 침몰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고 유가족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노동자가 많았습니다. 전국의 세월호침몰사고희생자합동분향소는 아침부터 추모객들로 붐볐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근 일주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라며 연차와 월차를 동원하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때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생각비행의 마음은 무척 참담합니다. 이번 사고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민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참사였습니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이 아르바이트생 희생자 2명의 장례비 지원을 거부했다는 보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알바생을 승무원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자본의 탐욕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납니다. 더구나 무능하고 책임지지 않는 정부, 부패한 정치권, 진실을 감추는 언론, 고물 배로 돈벌이에만 급급했던 청해진해운, 세월호 수색 현장에서 드러나는 해경-언딘 유착 증거 등은 대한민국이 그야말로 안전후진국임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이 과연 국가인가? 다시 한 번 되묻지 않을 수 없군요. 

안타까운 시국에 또 한 번 국민의 마음을 비통하게 하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쌍용차 해고자 가운데 25번째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노동자의 고용 불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안전사고의 위험성이 상존하지만 사회적 안전망은 취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청해진해운이 노조 설립을 방해하고 경영에 반발하는 노동자를 고립시켜왔다는 증언마저 나오고 있는 마당에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때입니다.
      

노동자-근로자 논란을 일으킨 국립국어원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트위터에서는 노동절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를 근로자로 순화하여 쓰라는 국립국어원의 트윗 때문이었습니다.

출처 - 트위터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국립국어원 공식 트위터는 근로자의 날(노동절)에 트위터를 운영하지 않으니 참고 바란다며 공지를 합니다. 그런데 한 트위터 사용자가 이 공지에 근로자의 날이 아닌 노동자의 날로 바꿔 달라는 멘션을 보냈고, 이에 국립국어원은 노동자는 근로자로 순화하여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답변을 남기게 됩니다.

출처 - 트위터

이에 많은 트위터 사용자가 즉각적으로 반발합니다. 노동자가 어째서 순화대상 용어냐며 비판이 쏟아진 것이죠.

누리꾼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ir*****는 트위터에서 "노동자를 근로자로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국립국어원 트윗. 아닙니다. 근로는 노동으로 근로자는 노동자로 다듬어 써야 합니다. 근로는 힘들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노동은 육체와 정신을 써 일하는 것을 말하죠. 근로는 사용자 입장입니다"라고 지적했다. @na******도 "시와 때와 내용을 좀 가려서 말씀하시고 잘못했다 싶으면 빨리 정정하시고 책임지셨으면 좋겠네요. 업무에 고충이 있을 땐 이거 관리자분도 노동자니 노동조합 가입해서 싸우시고요. 근로조합 아니고 노동조합입니다"라고 꼬집었다.


게다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외래어 표기법에 보면 메이데이를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절로 순화하여 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노동절이 고쳐야 할 순화 대상어라고 하고, 홈페이지에서는 노동절이 적절한 외래어의 순화어라고 하니 사람들은 코웃음이 나올 수밖에요.

출처 –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결국 국립국어원은 이날 오후 노동자도 쓸 수 있는 말이며, 1993년에 노동자를 순화 대상어에서 제외한 바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자료도 수정하겠다고 다시 공지하며 일단락되었습니다. 비록 한순간의 해프닝이었지만 정부가 노동자를 대하는 민낯을 보게 되었는데요. 생각비행은 '근로자와 노동자 논란'이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물론 시민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를 대하는 잘못된 관념이 뿌리 깊은 대한민국의 현실이 과연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절, 이승만과 박정희에 의해 근로자의 날이 되다

노동자를 근로자로 순화해야 한다며 국립국어원이 든 근거는 1992년에 나온 국어순화자료집입니다. 이때는 노동자를 순화대상 용어로 지정해놓고 근로자로 순화해 쓰도록 권고했습니다. 언어 순화 대상이 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 경우입니다. 어려운 한자어이거나 일본식 표현 혹은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을 경우인데요, 국립국어원은 당시 노동자라는 용어에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에 근로자로 순화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3년 판 국어순화자료집에는 노동자라는 용어를 그대로 써도 무방하다고 하여 수정합니다. 애초에 노동과 노동자라는 단어에 편견을 덧씌워놓았던 셈입니다. 근로자는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으로 모든 근로자가 국가와 기업을 위해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죠.

'근로자'와 '노동자'는 얼핏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단어들입니다. 정부나 기업 쪽에서는 '노동자'라는 말 대신 '근로자'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일반적으로 '근로자'는 말 그대로 '근면 성실하게 국가나 회사를 위해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노동자'는 '스스로 힘써 주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노동이 더 가치 중립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부가 두려워하는 의미는 따로 있겠죠. 하지만 솔직히 지금 와서 노동이란 단어에 북한을 찬양하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하겠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끼는 국민이 대체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출처 - 한겨레

사실 노동이란 단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용어의 의미가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8만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 단행한 총파업에서 유래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각비행이 2012년 노동절에 쓴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노동절에 우리 주변에서 어떤 행사가 열릴까요?)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5월 1일 조선노동총연맹이 2000명의 노동자를 모아놓고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 방지를 주장하며 노동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1958년부터 1993년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절은 5월 1일이 아니라 3월 10일로 바뀝니다. 세계 노동자들의 상징적인 날과 관계없이 이승만 정권의 우익 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재발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박정희는 1963년 이날을 근로자의 날로 이름마저 바꿔버립니다. 박정희 정권이 생각하는 불순한 노동이란 단어 대신 산업역군 근로자가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에 이르러서야 근로자의 날은 제 날을 찾아 5월 1일로 개정됩니다. 하지만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로 이름이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번에 일어난 국립국어원 해프닝을 별것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엿보게 합니다. 국가와 기업을 위해 순종하는 근로는 긍정적이지만 자아실현과 주체적인 노동은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독재정권은 물론이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별다를 바가 없네요. 강요된 순종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 우리는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순화어로 지정되었다 해제된 지 20년,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노동절이 아닌 근로자의 날을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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