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의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뜻합니다. 1930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소설가로 알려진 심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는데요,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오이다.
출처: 《한국대표시선》, 참한문화사, 1983년/ (원서:《그날이 오면》,漢城圖書株式會社, 1949년)
1901년에 태어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어 퇴학당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그날이 오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이라는 구절에서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그날’은 그가 죽은 지 9년 후에 도래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했기에 뼈아픈 역사의 길로 이어지고 맙니다. 해방 후 좌우의 사상대립, 동족끼리 총칼을 겨눠야 했던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성취하기까지 흘린 국민의 피... 이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친일인사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된다고 하지요.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채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맺은 ‘한일기본조약’은 지금까지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을 가로막는 지나치게 친일적이고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문학계도 친일논란에서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일제 때 학도병 자원을 독려하는 내용의 시를 썼던 모윤숙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외교관으로, 박정희 정권에서는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시인으로 알려진 서정주는 훗날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습니다. 이처럼 친일 인사는 사회 기득권과 연결되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를 이어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친일 문학인 31명의 작품은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글만 잘 쓰면 반민족 행위인 친일을 했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선례로 남아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을 흐리고 있습니다.
김기진(金基鎭) 김동인(金東仁) 김동환(金東煥) 김문집(金文輯) 김억(金億) 김용제(金龍濟) 김종한(金鍾漢)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박영희(朴英熙) 백세철(白世哲) 서정주(徐廷柱) 유진오(兪鎭午) 윤두헌(尹斗憲) 이광수(李光洙) 이무영(李無影) 이석훈(李錫(水+熏))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장덕조(張德祚) 장은중(張恩重) 정비석(鄭飛石) 정인섭(鄭寅燮) 정인택(鄭人澤) 조용만(趙容萬) 조우식(趙宇植) 주영섭(朱永燮) 주요한(朱耀翰) 채만식(蔡萬植) 최재서(崔載瑞) 최정희(崔貞熙)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합니다. 작가 심훈은 그런 점에서 삶 가운데 온 힘을 다한 예술인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친일의 도구로 사용했던 여느 예술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였습니다. 특히 그가 쓴 대표적인 장편소설인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사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그해 9월 10일~1936년 2월 15일까지 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들의 강한 저항의식과 휴머니즘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계몽운동은 러시아의 브나로드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브나로드’는 말기 러시아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입니다. 1874년에 많은 러시아 학생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 계몽운동을 브나로드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운동은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으로 발전해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담은 작품 <상록수>는 리얼리즘 농촌문학을 여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제의 억압으로 신음하는 민중을 깨우치는 역할을 잘 담고 있습니다. 심훈은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가 살면서 <상록수>를 집필했는데요, 이런 농촌의 경험이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심훈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의 ‘그날’은 67년 전에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6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친일,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그날은 오지 않을까요? 많은 국민의 바람인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완성되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본명은 심대섭이며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으로 활동했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영화, 소설 등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7년 결혼한 왕족 이해영(李海暎)과 1924년 이혼했다. 1925년 번안한 소설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했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하여 제작했으며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성공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으로 영화제작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는 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했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했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했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무산되고,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두 번에 걸쳐 연재가 중단된 소설 <동방의 애인><불사조>와 애국 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는 가난한 인텔리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다. 대표작인 <상록수>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해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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