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마저 관조하는 시, 함민복의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더위도 한풀 꺾여 곧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이제 좀 살만하다고 느껴야 할 텐데, 그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오르는 물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경제위기와 관련된 불안한 소식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건들만 보도하는 뉴스와 신문 때문에 국민의 속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뭔가 기분 좋은 소식이 없나 싶어 눈을 굴려보지만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값 등록금 논의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고, 중국과 FTA를 한다는 소식만 무성할 뿐 잘나가는 공기업을 민영화하겠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주는 언론이 없네요.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설 용역회사의 문제,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목소리와 현장의 투쟁상황을 주요 언론이 외면하는 가운데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드는군요. 

누구를 위한 FTA이고 누구를 위한 민영화이며 누구를 위한 해군기지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고도 위정자들은 오늘도 국민의 뜻대로 정치를 펼치겠노라고 헛소리만 해댑니다. 참 슬프고 우울한 세상입니다. 일찍이 함민복 시인은 사회적 소통이 단절된 공간 속에 은거하고 있는 현대인의 소외된 삶을 <우울氏의 一日>이라는 연작시에 담아낸 바 있습니다.

단지 공짜라는 이유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나와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했지만 기계와 대면하는 삶이 힘들어 4년간의 근무를 끝으로 서울예전 문창과에 늦깎이로 들어간 함민복. 그는 2학년 때인 1988년에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슬픔마저 관조하는 여유로움을 보여줍니다.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삭월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이 땅에 많은 사람이 현실에 순종하며 살면서 저마다 행복을 꿈꿉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만 있다면 참을 수 있는데, 그 희망마저 빼앗는 세상이라니 사는 게 고역입니다. 졸업과 동시에 등록금 대출이라는 빚을 떠안고 사회로 나와 좁은 취업문을 두드리다 희망보다 절망에 익숙해지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 그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 게 바로 앞선 세대와 국가의 의무가 아닌가요? 

과연 누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라는 시를 쓴 함민복 시인 자신도 이처럼 미래를 논할 수 없는 곤궁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등록금을 대기 위해 형은 전세에서 사글세로 옮겨야 했고, 그런 형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의 심정은 참혹했습니다. 

그런 일상 가운데 함민복 시인은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의 삶을 보았습니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고 하면서 그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함 시인은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실낱같은 희망에 행여 그림자라도 드리울까 염려하여 이미 물배가 찼으나 마지막 면발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함 시인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 사회엔 아직 무수한 희망이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건설 현장에서 뜨거운 태양에 굴하지 않고 빗물 같은 땀방울을 흘리는 노동자의 모습에서, 날품팔이 재래시장에서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노파의 모습에서, 국가 폭력과 공권력 폭력이 난무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남의 고통을 제 것인 듯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슬픔으로 배부른 세대, 좌절에 익숙한 세대에게 그저 기다림이 희망의 묘약이 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젊은 중국집 부부처럼 작은 일에 감사하며 하루를 온 힘으로 버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젠가 일어설 것입니다. 들풀처럼 민중은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함민복
1962년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 근무하다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했다. 1988년 《세계의문학》에 <성선설>로 등단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강화도에서 전업시인으로 살고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받았다. 그가 펴낸 책으로는 시집 《우울씨의 일일》《자본주의의 약속》《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 에세이집 《눈물은 왜 짠가》《미안한 마음》《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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