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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금주의 시(詩)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에게 권하는 시, 윤동주의 <참회록>

by 생각비행 2012. 8. 6.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최근 각 당 대선주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정치인들이 내놓는 과거사 관련 견해가 구설에 오르는 일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한들 독재를 미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이 있을 수 없겠지만 군사독재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민주주의적 가치가 더 충만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라니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아 끔찍합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이 합법적이었다고 말하는 일본 우익의 역사 인식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습니다. 역사의 향방을 걱정해야 하는 이때에 윤동주의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_1942. 1. 24.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살면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노래한 시인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란 무엇에 관한 걸까요?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때인 1942년에 썼다고 합니다. 1941년에 일제는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각종 악법을 공포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라 식민지 현실은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윤동주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 절차를 밟기 위해 창씨개명을 합니다. <참회록>에 나오는 참회의 내용은 그 일에 관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념과 양심을 저버리고 참전을 독려하는 글을 썼던 문인 가운데 해방 후 누가 참회의 글을 썼던가요? 군부독재 시절에 독재자를 찬양하는 시를 썼던 시인 가운데 누가 참회의 글을 썼던가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은근슬쩍 넘어가는 행태 아니던가요? 우리는 해방 후에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군사독재 시기가 끝났어도 그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모순된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장관이나 대법관 같은 요직의 인사청문회 물망에 오르는 사람 가운데 편법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8대 국회의장 김형오, 여권 대권주자 박근혜, 경기도지사 김문수 등 많은 정치가가 공공연하게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윤동주의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읽었다면 당연히 <참회록>이라는 시도 읽었을 테지요. 그들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회의 뜻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비 오는 날의 인사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나이를 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은 채로 당신의 나라에 와 버렸고

잊은 채로 당신의 학교에까지 와 버렸습니다

팔짱을 끼고 독수리상을 지나서 좀 왼쪽으로 올라가면

당신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를 넘은 제 삶을

여기에 옮긴 것은 옳았던 것인지


―여기는 윤동주 선배님의 조용한 안식처입니다. 담배 꽁초를 버리지 맙시다.

오늘은 비가 지독하고

팻말은 풀숲 속에 쓰러진 채 비에 젖어 있었지만 후배들은 여기서 담배 따위는 피우고 있지 않아요

여기 올 때마다 조그마한 꽃다발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이 시인이라는 것만으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라고 일본의 한 뛰어난 여성시인이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저의 어머니의 시대 할머니의 시대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점으로부터 출발해 왔습니다

언제나 종점으로부터 출발해 왔습니다

이제 폭풍우는 우상을 뒤집어서

저는 당신의 말 앞에 서 있습니다

실현될 때 말은 빠릅니다

빛처럼 실현될 때

말은 운명입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지상에서

녹지 않는 별의

그 딱딱한 눈동자의 빛에 비추면서

저의 부끄러움과 당신의 부끄러움은

서로 얼굴을 맞을 수 있는 것인가요


비가 그치면

<사람이 되지>라 대답한 

수없는 당신의 동생들이

뛰어다니는 이 대학가 상공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최루가스가 자욱하게 있습니다

 이 시는‘사이토우 마리코’라는 일본인이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쓴 시입니다. 내용에도 나오지만 시인 윤동주에 관해 쓴 시입니다. 이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녀는 윤동주 시인이 죽은 곳에서 출발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이 시인에게 저지른 만행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이 시인이라는 것만으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라고 일본의 한 뛰어난 여성시인이 쓴 적이 있습니다/당신에 대해서입니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처럼 일본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말합니다. 

시인 윤동주의 종점에서 출발해 시인 윤동주의 출발점에 선 시인 사이토우 마리코의 시선에 들어온 연세대학교 하늘은 최루가스가 자욱했습니다. 그녀는 시인 윤동주의 출발점에서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참회를 요구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지 않는 기득권층을 향해 시위하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이 시가 발표된 지 근 20년이 흘렀습니다. 대학가에서 최루탄은 사라졌지만 공권력은 시위 진압현장에서 여전히 최루액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부끄러움을 모르던 기득권층은 여전히 '참회'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같은 하늘을 지고, 같은 바람을 느끼고, 같은 별을 보고, 같은 시를 읽으며 살면서 말입니다.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하고, 광명중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조선일보》《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자화상><쉽게 쓰여진 시>를 발표했고, 대학시절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후 1948년에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을 모은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짧은 생애 동안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빼어난 서정성이 담긴 시를 써 '서정적 민족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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