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많은 직장인이 근로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당하게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징계를 당하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많은 근로자가 자신에게 그런 부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늘 사건은 예상치 못할 때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근로자의 권리를 이해하는 일은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대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비행 편집자 중 한 명도 예전에 외국계 출판사에 다니다 속한 부서가 6개월 후에 사라지는 바람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퇴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부당한 해고를 당했지만 나중에야 근로자의 권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의 충격이 《입사부터 퇴사까지 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근로자의 권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생각하며 <고난의 길>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이소선 여사가 그 어머니고
전태일 열사가 그 아들입니다
나는 혹사의 노역장으로 노동자를 내모는 자본의 세계에 살면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상복을 입고
불에 타 죽은 아들의 사진을 껴안고 오열하는 이 여인이 그 어머니인가
목놓아 흐느끼는 모습이
험한 세상에 자식을 빼앗기고
가파른 인생을 사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여
자식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여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식이 굴리다 굴리다 힘에 겨워 못다 굴린 삶의 무게를
그 무게를 머리에 이고 당신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그 길의 시작과 끝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길에는 끝이 있습니다 나도 가렵니다
자본의 무게에 짓눌린 노동자의 틈에 끼여 어깨동무하고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을 함께 가렵니다
노동자가 여는 해방의 길이 인류해방의 길과 맞닿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한테 배워서
이런 사실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자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임금과 노동시간,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입니다만, 일이 확대되기를 싫어했던 박정희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또한 사용자들은 삼동친목회를 빨갱이 조직으로 몰아 근로자들로 하여금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하고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사용자들과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끝나려 할 때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내달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나마 누리고 있는 것은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희생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노동자의 현실은 더 열악해지고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알리려고 했던 노동자의 권리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상 앞에 놓인 이소선 여사의 영정사진
시인 김남주의 시적 주제는 현실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은유나 상징보다는 직설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는 예리한 육성으로 현실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1980년대에 문학의 보편적 주제는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통일논의와 노동자들의 권익향상 같은 문제였습니다. 시인 김남주는 철저하게 1980년대 상황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시인이기보다 전사로 불리기 원했고 자신이 쓴 시가 부조리한 현실에서 혁명의 도구로 쓰이길 원했습니다. 그는 <나는 나의 시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 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 끝이 되기를
김남주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를 사용했습니다. 시가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지만 어두운 현실조차 미화한다면 아름다움의 진정성은 빛을 잃고 맙니다.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시는 아무도 읽지 않는 언어의 낭비입니다.
이런 김남주 시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시가 있습니다. <법 좋아하네>의 한 구절입니다. “이게 법이지요/목에 걸면 그것은/부자들에게는 목걸이가 되고/가난뱅이들에게는 밧줄이 되지요.” 시를 통해 시인은 현실에서 법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의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는 현실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의 표현은 불행하게도 2012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온갖 비리를 저지르다 심판대에 선 대기업 총수나 정치가들에겐 면죄부를 주는 법,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땐 밧줄로 목을 조이는 법.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끝까지 행동하며 온몸으로 시를 쓴 이가 바로 시인 김남주입니다.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김남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처럼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가졌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아니라 힘 있다고 국민을 무시하는 세상이 아니라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나누는 세상, 힘이 없어도 도와가며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요즘 '경제민주화'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경제민주화입니까? 헌법 제119조 1항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런 법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런 법이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전태일과 이소선이 앞으로 또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헌법이 규정한 소득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날로 팽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이소선과 전태일 모자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업의 목적이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땀 흘린 노동자가 생존을 위협받지 않고 행복한 경제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본을 지키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를 위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알고, 법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일터를 사랑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1946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9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라남도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3선개헌 반대와 교련반대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1973년 유신반대운동을 하다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2년형을 받고 8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1974년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습작생활을 하다 그해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1978년 서울로 올라와 남조선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7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88년 12월 가석방됐다. 그는 살아서 "시인이라기보다,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전사"라는 말을 즐겨 말했다. 시집으로 《진혼가》《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사상의 거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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