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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시민 죽인 범죄자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나라?

by 생각비행 2021. 10. 29.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습니다.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이자 그를 뒤이어 대통령을 해먹은 그가 말입니다. 노 씨의 죽음으로 12.12 쿠데타를 모의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책임자 한 사람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묘하게도 이전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 박정희가 총을 맞은 날과 같은 10월 26일이었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노 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국회 운영위훤회 국정감사에서는 국가장 여부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국가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 반면 청와대 유영민 비서실장은 법적으로만 따지자면 유족 측이 원할 경우 국가장을 막을 수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노 씨가 전두환과 내란 모의로 실형을 선고받긴 했어도 사면이나 예우 박탈 등을 국가장 시행의 제한 사유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을 했던 사람에 대한 국가장을 막을 수 있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죠. 이에 대해 국민 동의와 관련 절차가 필요하다고 단서를 붙였으나 일사천리로 국가장 결정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반란군 수괴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5.18기념재단과 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등 5월 단체는 "국가의 헌법을 파괴한 죄인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한 정부의 결정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출처 - 시사위크

출처 - 연합뉴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국립묘지법에 따라 노 씨는 국립묘지의 안장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유족들이 파주 통일동산에 고인을 모시길 원한다는 뜻을 내비쳐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한 논란이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파주시가 한 차례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가 재검토 의사를 밝힌 상태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여론이 분분합니다.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우려처럼 국민이 준 국가권력을 국민을 학살하는 데 쓴 권력 찬탈자이자 독재자가 실형을 받아 예우를 박탈당했는데 단지 전 대통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장을 치르는 건 대부분의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죠. 더구나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 아닌 노 씨를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나면 국가장을 치렀다는 요식에 따라 다시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출처 – 청와대 청원게시판

 

이 때문에 청와대 청원 게시판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는 노태우의 국가장 취소를 요구하는 국민 청원이 동시다발로 올라왔습니다.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자 5.18 광주항쟁 무력진압에 관여한 범죄자 노태우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것은 전방에서 묵묵히 군 복무를 하고 있는 군인들에 대한 모욕이며 우리 헌법 가치에 대한 부정이라는 주장입니다. 국가장법 개정 요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장법에 실형 등 전과가 있는 자,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한 자 등의 법적 제외 요소가 명확히 있었다면 이번과 같은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얘기입니다. 향후 신군부 최대의 학살자이자 주범인 전두환을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일은 없게 하자는 국민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출처 - MBC

 

특히 5.18 학살로 엄청난 피해를 본 광주는 노태우의 국가장을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생전에 노 씨의 아들이 5.18에 대한 사죄를 했고 전두환과 달리 선고받은 추징금을 성실히 납부했다는 고려 사항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두환과의 상대 평가에서 조금 낫다는 수준입니다. 노태우 본인이 직접 사죄를 하거나 5.18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지도 않고 떠난 것은 큰 문제입니다.

 

출처 - YTN

 

이런 여론에 따라 광주시와 전남도는 노태우의 국가장 결정을 내린 정부의 결정에 반해 분향소 설치와 조기 게양을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검찰청과 경찰청 등 광주 공공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 28일부터 조기를 게양해야겠지만 광주는 평소처럼 태극기를 게양한 상태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희생에 대한 책임, 미완의 진실에 유감을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노태우 본인이 남긴 유언의 영향도 있고 해서 이전 국가장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이긴 합니다. 정부도 정부 차원의 분향소는 설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코로나19 방역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정입니다.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의 결정으로 분향소를 서울광장에 차렸습니다. 방역수칙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서울시는 분향소 설치 자체는 방역수칙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출처 - KBS

 

노 씨의 영결식은 오는 30일 오전 11시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있으며 유해는 파주 검단사에 안치된다고 합니다. 민주화의 주역들이 먼저 떠난 자리를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하나둘 따라가고 있습니다. 시간의 걸렸지만 역사의 흐름은 제 길을 찾아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습니다. 학살의 수괴 전두환이라는 족쇄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거나 진실을 밝힐 것 같지는 않으니 그의 죽음을 두고 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법적, 제도적 준비를 끝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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