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독립, 하셨습니까?] 연재도 어느덧 네 번째를 맞이했네요. 오늘은 패션 사진가 한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패션 사진가' 하면 과장된 환상을 보여주어 잠재된 욕망을 이끌어내고 소비를 부추기는 작업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진가로서의 본업보다 지구환경과 동물복지를 생각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친환경 잡지를 만드는 일에 더 열심인 사진가가 있습니다. 《오보이!》의 발행인, 사진가 김현성 씨를 이은 씨가 만나고 왔습니다. 

패션지, 동물복지와 환경을 만나다, 
《오보이!》 발행인, 사진가 김현성 

한때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이 더 훌륭하고 고상한 삶이라 믿었다. 내가 행복해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존재에게 자신의 이기심으로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하기도 하는데 사실 반려인과 반려동물은 한끝 차이일 수도 있다. 종(種)이 달라도 얼마든지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다. 김현성 편집장은 표정이 그다지 없는 얼굴이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동물이란 존재를 위해 있는 힘껏 살고 있는, 그러니까 행복한 사람이었다. 

동물, 사지 말고 입양해요 

그는 잘 나가는 유학파 포토그래퍼였다. 10년을 훌쩍 넘겨 패션 사진을 찍으며 스튜디오를 차려 실장 직함도 달았고 크게 남부러울 일 없이 살았다. 특유의 감성이 엿보이는 사진과 일에 안달하지 않는 그의 시크한 태도가 도리어 차별화 전략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럭저럭 잘 나가던 어느 날, 삶이 바뀌었다. 남보다 잘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와 생명을 돌보는 일에 대가 없이 자신을 쏟아붓게 됐다. 자식처럼 키우던 개 '먹물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모델과 연예인이 표지를 장식했지만오보이!》의 주인공은 반려동물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잡지도 생겨나지 않았을 테니.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전에는 잘난 척하면서 제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제 인생과 앞길만 위해 살았어요. 상업 사진 찍으면서 제 감성을 팔았는데 자식처럼 키우던 먹물이의 죽음이 (《오보이!》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어요.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제 자식이었거든요. 저보다 일찍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아니까 미리 준비했는데, 그래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힘든 일로만 지나가 버리면 먹물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하게 된 거죠. 갑자기 성자가 된 건 아니지만 이대로 사는 건 무의미하고, 돈 벌어서 땅 사고 건물 짓고 이름 알리는 일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보이!》를 만든 거지요. 욕심이 없어져서 옷도 안 사요. 예전 같으면 인터뷰하는 자리에 옷도 신경 쓰고 나왔을 텐데 지금은 예의만 차리는 정도죠." 

사진가이긴 해도 '찍히는' 일도 더러 있다. 인터뷰하던 날 그는 무늬가 없는 단색 티셔츠에 무채색의 팬츠, 운동화 차림이었다. 최신 유행 아이템을 입지 않아도, 차림이 캐주얼해도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이 격식 아닐까.
    
이렇게 2009년 말에 등장한 무가지 《오보이!》 창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이런 변화는 잡지 시장의 다양화, 양적인 팽창과 수익구조의 악화로 거품이 꺼지면서 무가지가 속속 등장하던 배경에서 시나브로 일어났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동물 복지를 이야기하는 패션 매거진'이라는 다소 급진적(?)으로 보이는 메시지를 담은 잡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 거의 3년 동안 31권을 만들어오면서 그간 공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고, 패션 사진이 단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오보이!》에 나름의 원칙은 있다. (기존의 패션 화보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가죽으로 된 신발이나 소품은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모피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잡지 말미에는 유기동물을 스타가 안고 있는 화보를 실어 분양을 부추긴다. 잡지의 권수가 늘어난 만큼 아무 대가 없이 《오보이!》에 등장한 스타의 수도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톱스타라도 촬영 때는 개나 고양이의 컨디션이 우선이다. 고양이는 특히 예민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화보가 예쁘게 나와야 녀석들이 좋은 곳으로 입양될까 싶어서다.
 
이런 마음으로 만들어서인지 잡지의 인기는 나날이 상한가다. 매월 초 서울 도심 곳곳에 있는 배포처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오보이!》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동나곤 한다. 지난 9월호도 그랬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f(x)의 멤버 크리스탈이 표지 인물로 나온 고양이 특집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10여 페이지가 넘는 화보, 이름난 글쟁이들이 고양이에 관해 쓴 글로 가득 채워져 고양이 애호가 사이에서 구하기 어려운 '희귀템'이 되었다. 잡지는 별다른 꾸밈없이 세련된 디자인으로 패션 리더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화려하고 멋진 것이 다가 아니라는 인식도 심어주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아끼는 것 또한 아주 멋진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물권'이란 단어조차 생경하게 느끼는 이가 여전히 많지만,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유행을 선도하고 남보다 앞서갈 수 있다고 사람들이 공감하는 데는 분명 《오보이!》 같은 잡지와 이효리 같은 톱스타의 영향이 존재한다. 

《오보이!》에 실린 기사와 화보는 누리집에서도 볼 수 있다.

"벌써 3년 가까이 됐네요. 생계를 위해 촬영하면서 틈틈이 잡지 만들고. 한 달에 열흘은 계속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고, 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어요. 매달 기획과 섭외를 하고 촬영을 부탁하는 일이 힘들긴 해요. 다행히 화보를 찍겠다고 먼저 연락하는 스타가 늘었어요. 효리 씨도 화보 촬영으로 처음 만났고요. 기획사나 방송국도 그렇지만 요즘 연예권력이 엄청나잖아요. '누가 입었다' 하면 완판되고 산업 자체가 연예인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잖아요. 이왕이면 그런 유명세를 긍정적인 쪽으로 활용해보고 싶었어요. 잡지를 만들면서 동물복지에 관심 있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됐지요."  

《오보이!》 그리고 《그린보이》  

그에게 동물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본능과도 같은 일이다. 버려지는 동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머니 덕에 언제나 동물로 넘쳐나던 집안 분위기도 큰 몫을 했으리라. 수없는 만남과 이별을 겪었음에도 유독 잊을 수 없는 반려견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처음으로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했던 개, ‘레니’ 그리고 결혼 후 처음으로 키운 개 ‘밤식이’와 ‘먹물이’. 10년이나 자식처럼 키우던 밤식이와 먹물이가 차례로 곁을 떠난 후, 세상은 텅 빈 굴처럼 공허했다. 하지만 잡지를 창간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고, 지금은 잡종 개 ‘뭉치’가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흔히 이야기하듯, 그네들이 주는 사랑은 조건 업고 절대적이다. 그래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굳이 비싼 품종일 필요는 없다. 개는 사람에게 좋은 반려자가 되어준다. 애정을 쏟을 사람이 있으면 개는 행복하지만 철창에 갇힌 개는 그렇지 않다. 

"더는 안 키우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얘가 잡종이라 입양이 안 되면 안락사당할 확률이 높아 보호소에서 데려왔어요. 자기 배가 고픈데 동물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요.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지만, 지구나 환경 측면에서 보면 인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죠. 출산율이 낮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럴수록 환경과 동물엔 피해가 가니까요. 할 일이 많죠. 동물을 '같이 사는 존재'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아이들이 반려동물을 자연스럽게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식을 개선하는 교육도 하고 싶어요. 하루아침에 바뀌길 바라는 건 아니고, 작은 영향이라도 조금씩 일어나길 바라요. 보신탕 먹는 사람을 비난하는 식이 아니라, 공장식 축산의 폐해를 알려주면서 천천히 인식이 바뀔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는 몇 년을 썼는지조차 가물가물한 ‘017’로 시작하는 피처폰을 쓴다(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고장 나기 전에 물건을 사는 일이 없으니). 배터리 수명이 다된 탓에 충전기에 늘 꽂아두지 않으면 통화가 힘들 정도지만, 굳이 ‘스마트’한 새 전화기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다. 철 따라 싫증 나면 바꾸는 세태 속에서 이런 삶의 방식이 대단한 실천으로 보일 지경이다.

꾸준히 책을 내면서 미약하나마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덕분에 반응이 좋아져 광고 수익과 정기구독을 통해 어느 정도 유지도 가능해졌다. 아직은 1인 매체지만 장기적으로는 필자들에게 고료도 지급하고, 함께 일할 사람도 고용할 계획이다. 원고 쓰는 일은 물론 촬영과 메이크업, 스타일링까지 주변인의 '재능기부'에 기대어 계속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게 본인의 인건비를 고려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전 같으면 집에 틀어박혀서 책을 보거나 게임에 몰두할 시간을 지금은 온전히 《오보이!》에 들인다. 이는 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지켜봐주는 아내 덕이기도 하다. 잡지를 만들며 틈틈이 쓴 글들에 살을 붙여 《그린보이》란 책도 냈다. 이래저래 바쁜 일상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감지하며 힘을 내는 수밖에.

"주로 동물이나 문화 관련 특집이 중심이기 때문에 틀은 빤한데 어떻게 포장해 보여주느냐가 관건이죠. 기획은 다 제 머리에서 나오고 큰 틀에서 글은 자유롭게 쓰도록 해요. 애초 전하고자 한 것과 다른 방향의 글이 들어오는 것도 재밌고요. 만든 지 3년 가까이 되었는데 달라진 걸 많이 느껴요. 객관적인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반응들이 오니까요. 좋아하는 스타가 나와서 우연히 책을 접했다가 동물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는 글을 받으면 참 뿌듯하죠. 죽을 때까지 해야 하고 그 이후에도 이어져야죠. 미스코리아에게 소원을 물으면 '세계 평화'라고 하는데, 제 소원도 마찬가지예요. (웃음) 사람이 평화로워야 해요." 
  
동물 문제 실상 알리고 환경에 기여하고파 

열심히 책을 만들면서 이를 알리는 일에 나서다 보니 패션지를 벗어나 시사잡지, 각종 학보(學報)와 문화면까지 등장하게 됐다. 환경이나 동물복지 이슈를 알리기 위해 인터뷰나 강연은 가리지 않는다. 말수가 적고 능변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대답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았다.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육식과 공장식 도축의 폐해를 줄이는 일이라 했다.

(이하 사진) 개인 전시 혹은 사진집의 형태로 곧 만나게 될 그의 사진들. 무심히 보면 건조해 보이지만 언뜻언뜻 세세한 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저도 완전한 채식주의자는 못 돼요. 아예 먹지 말자는 게 아니라 육식을 줄이고 되도록 건강한 고기를 먹자는 거예요. 다국적기업의 대규모 축산과 도축은 환경을 파괴하고 가난한 이들을 더 굶주리게 해요.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고통받을 때도 잦아요. 개한테 염색을 시키거나, 억지로 교배시켜 작게 만들어 컵 안에 넣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요. 동물을 생명이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예요."

그가 늘 입바른 이야기만 하고, 메시지가 있는 사진만 찍는 것은 아니다. 15년간 작업해온 사진가로서 잡지와 무관한 사진집과 전시도 준비하고 있다. 꾸밈이 없어 건조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진은 동물보다는 덜 오래되었으나 그의 절친한 친구다. 누구도 보지 못한 결정적 순간을 놓칠세라 재빨리 셔터를 누르기보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피사체와 느릿느릿 호흡을 맞추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특별한 기술이 요구되기보다는 특유의 감성이 필요한 사진. 담백한 시선에 솔직함이라는 양념을 가미한 그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다.

"메시지와 무관한 일상이나 아무것도 아닌 걸 찍어요. 결정적 순간에만 집착하지는 않아요. 기록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세트나 조명을 복잡하게 꾸미지 않은 솔직한 사진을 좋아하거든요." 

그는 자기만의 메시지나 이야기를 가질 틈조차 없어 보이는 젊은 세대를 만나면 또 할 말이 많아진다. 세상을 숫자로 환원하고, 조금이라도 덜 가지면 불행하다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서 벗어나면 동물도 사람도 더 행복해질 텐데. 가난해도 힘써 살아온 이들이 부자들보다 남을 돕는 일에 지갑을 더 잘 여는 것을 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누군가가 더 잘나가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바꿔야 해요. 나보다 힘겨운 존재를 알고 그들을 위해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 행복해진다고 봐요. 실제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기부도 많이 하고 마음이 더 여유로워요. 주식이나 부동산, 자기 앞날만 생각하면서 각박하게 사는 것보다는요." 

김현성은 남다른 이상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아끼고 사랑하던 이가 죽은 후에 그 죽음을 되새기며 삶의 전환점을 찾고, 소소한 자신의 삶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그 꿈은, '너무 어려워요' '난 못해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삶의 자그만 태도나 습관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배우게 해줬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힘겹고 지난하지만 각자가 삶의 태도를 바꾸기란 훨씬 쉬우니까. 얼핏 보기에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애정과 의지가 있다면 자신만의 타협점이나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얼마 못 가리라고 많은 이가 걱정하던 도전을 멋지게 지속 가능한 현실로 만든, 그처럼 말이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독립, 하셨습니까?] 연재물의 두 번째 주인공은 얼마 전 홍대 스몰톡프로젝트(홍대 인근의 창작문화공간)에서 창고전을 연 이수지 작가입니다. 

주유소, 다단계회사, 동대문 도매상, 홍대 옷가게, 클럽, 커피숍, 비디오 대여점, 바(bar), 편의점, 음식점 써빙, 골프캐디, 핸드폰 검수원 등을 거쳐 미술계에 입문한 뒤 여전히 워킹푸어로서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흔치 않은 작가입니다. "자본으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대중성 없음, 알아주는 이 적으나 열광적"인 사람을 찾아 인터뷰하겠다는 [독립, 하셨습니까?] 연재물 성격상 주인공으로 모시기에 적합한 분이죠. 

1.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2.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결한장> 
3. <오늘의 노동으로 작품을 쓰다, 이수지 작가와 나눈 이야기>


오늘의 노동으로 작품을 쓰다,

이수지 작가와 나눈 이야기

인터뷰를 곰삭이며 글을 쓰는 동안 저널리스트이자 운동가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르포르타주 <노동의 배신>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백인이자 지식인이지만 자신이 가진 자원을 가능한 한 숨긴 채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같은 일을 전전하며 몸으로 겪은 워킹푸어의 현실을 생생히 그린 문제작이다. 쌍팔년도 식으로 말하면 '위장취업'인 셈인데, 아무리 노동계급 안에 들어가 있어도 그의 시선은 지식인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터에서 순전한 노동자였다 할지라도 근무가 끝난 후에는 매일의 노동을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만 했다. 분명한 목적이 있고 기한을 정하고서 시작한 일이었음에도 그 모든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입맛에 따라 직장을 고를 여지조차 없다는 현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몸으로 하는' 노동의 가치가 폄훼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주로 여성의 몫인) 가사노동이 사실상 정당한 대우를 받은 일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최근 들어서야 이혼할 때 재산의 50퍼센트 정도를 전업주부에게 지급하는 추세다. 그러나 여성의 급여평균이 남성의 64퍼센트밖에 안 되는 것에서 드러나듯, 노동의 가치가 대등하지는 않다. 비정규직 여성의 급여가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성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시장, 신자유주의와 '고용 없는 성장'은 여성과 청년 세대를 옥죄는 굴레와 같다.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 해도 그럴진대,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원하는 바대로 살아온 사람에게 이 사회가 얼마나 가혹했을까.

오늘의 인터뷰이에게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작가(예술가)이며 노동자인 이수지에게 선택할 수 있는 노동의 조건이란 애초 없었다. 대부분의 순수미술 작가가 그렇듯, 작품활동만으로 생계를 담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창작활동을 제한하는 덫이기도 할 것이다. 파트 타이머이면서 작가란 타이틀은, 원하는 일과 돈이 되는 일, 당장의 성취나 재화를 창출하거나 하지 않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 하는 청년 세대의 표상 혹은 그 암울함과 직결된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먹고살기 위한 일과 창작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자화상>이란 제목이 붙은 목탄화에 등장하는 비틀린 육체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손은 끊임없이 작품을 매만진다. 또 그 손으로 우리가 육체를 지탱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먹는 식료품을 오리고 붙여 작품을 만들어낸다. 미술에 전혀 조예가 없는데도 굳이 인터뷰를 청한 까닭은 이수지의 작품에 시대와 작가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어서였다. 지독스럽게 선명한 은유로서의 작품은 유명세를 떠나 그 자체로 시선을 사로잡고, 공감을 자아내고, 말을 건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자화상] (2007~) 개인을 판가름하는 보편적 지표로 작용하는 얼굴과 성별, 개성을 제거한 뒷모습을 차용하였으며 그로 인한 개체의 익명성은 한 개인의 자화상 연작에서 군상으로 확장된다.


제주에서 프랑스, 호주까지
이수지의 공간

비바리(아가씨를 일컫는 제주 방언) 이수지가 달랑 10만 원 들고 서울로 상경한 것은 여러모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트렁크 하나 달랑 끌고 학교까지 휴학한 채 서울로 올라온 내 기억과 겹쳐지는 지점도 있다. 일, 그리고 꿈을 찾아 바다 건너 서울행을 감행한 십대의 이수지는 '탈학교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때부터 영 적응할 수 없었던" 학교를 때려치웠다.

"학교 갈 생각을 안 했어요. 수중에 돈이 없으니까 밥도 굶고, 종일 있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뿐이라 거기 눌러앉아 몇 권이고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 집에 들통 나면 맞고, 학교에 강제로 보내지면 틈을 타서 빠져나와 바닷가를 걷거나 다시 도서관에 갔어요. 결국은 학교를 그만두게 된 거죠."

미술의 꿈을 한 번도 버린 적은 없었지만 남들처럼 미대에 가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진학을 위한 그림을 잘 그리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는데, 거기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집을 버리듯 나와 서빙, 주유소 아르바이트, 동대문 옷가게 등 갖은 노동을 했다. 학력도 나이도 기준에 미달하는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새로운 가능성이란 한국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2007년, 해외로 진학할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가난한 노동자에게 재료가 많이 드는 물감 작업조차 버거웠지만 손에 잡히는 재료를 이용해 자신을 쏟아내듯 그리고 또 그렸다.
말을 깨치기라도 한 것처럼 봇물 터지듯 진행한 작업의 결과들을 추려 순수미술로 유명한 프랑스의 국립미술대학(보자르)에 응시했다. 3차 최종 면접까지 갔으나 낙방한 건 순전히 어학실력 탓이었다.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실력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전시한 작품들도 대부분 프랑스 가기 6개월 전에 그런 거예요. 예상 답변만 달달 외워서 갔는데 '이건 크기가 얼마지?’ 이런 질문에 답을 못 한 거죠. 그 정도 불어도 영어도 못 했거든요. 달달 외운 질문은 막상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고요. 나이 제한이 있어서 마지막 기회를 어이없이 날린 셈이었지만 아쉽지 않았어요. 심사위원들이 관심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인정받은 기분이었거든요. 호의적으로 그림을 보다가 제가 어눌한 발음으로 대답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웃음)"

국경이란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이수지는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체류하며 돈을 벌면서 어디나 가지고 다닌 노트 두 권에 틈틈이 작업했다. 그렇게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주(노동)'과 '여행'이 잦았던 그에게 서울에 체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떠났다 돌아올 장소가 아니라 그저 조금 덜 외로우면서도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고, 일자리가 더 많은 도시일 뿐, '타자의 공간'이란 점은 변하지 않았다.

"개인이 문화나 언어의 범주로 묶일 수는 있지만 공간과 국가에 따라 나뉘는 건 부당하다고 봐요. 어쩌면 모두 타자인데 인지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 외국에서 생활할 때가 참 편했어요. 최저임금도 높고,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니까요. 물론 여행을 할 때 소속감을 느끼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돌아갈 곳이 있느냐 없느냐로 많은 것이 갈려요. 한국의 존재들에 폭 안겨서 쉬고 싶다는 생각은 그저 환상에 불과해요.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쁘잖아요. 지쳐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어디 있어요? 매 순간 나를 내던져야 했어요. 적어도 처음처럼 쫓기듯 도망치지는 않는데 무엇 때문에 항상 어딘가로 가야 하는지, 의문은 풀리지 않아요. 왜 항상 그래야 하는지."


'2말 3초'를 살아가는 이수지의 시간,
혹은 작가라는 정체성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과 노동을 하는 사이, 이수지는 서른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지난해 4월, 호주에서 귀국한 후 그간의 작업을 갈무리하는 데 집중했고 생애 첫 개인전까지 무사히 치렀다. 하지만 바닥을 드러낸 통장 때문에 조만간 노동시장으로 복귀해야 할 타이밍이다. 작가로서 일종의 데뷔 무대를 치른 그에게 식상한 질문이지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존재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저답게 하는 건 혼자 있는 거예요. '당신이 영감을 받는 것은 무엇이냐?'란 질문에, '영감을 받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고 답한 후세인 살라얀(국제 패션계에 급부상한 터키 출신 디자이너)의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생각하는 동안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무수한 것들 중에 특정한 영감을 인지하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안목은 다양한 경험과 독서를 통해서 쌓거나, 혹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인내심을 갖고 파고드는 거지요. 소설과 시를 많이 읽어왔는데 여행을 하며 만나는 이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인문, 사회, 정치 비평을 망라해서 읽어요. 그래도 밑바닥부터 고갈되는 느낌이 들 때면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지요."

그의 영감은 이미 갖고 있지만 모를 수도 있던 존재를 독서 혹은 사유를 통해 인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뜻한다. 그 사유가 매일 노동을 하는 육체에 덧씌워졌을 때 비로소 이수지다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의 작품에 작가의 의도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무엇이다.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 보면 돼요. 예술은 자기표현에 앞서 미학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남의 평가를 듣고 고치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요. 모두가 좋아하는 걸 할 수는 없어요.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좋아하는 작업을 하면 안 돼요." (전시를 찾은 어느 시인 지망생에게)  

이수지 '창고전'은 미술작품에 부여된 권위를 애써 배제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평소 모임이나 상영 공간으로 이용되는 내부를 활용해 바닥에 세우거나 벽면에 원래 있었던 양 작품을 걸어놓거나, 심지어 테이블 위에 쌓아놓고 들춰볼 수 있도록 했다.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감상법을 제안한 것이다. 문턱을 낮춰 누구나 쉽게 미술을 향유하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세상에 존재하나 어떤 면에서 존재성이 없는 아티스트들에게 건네는 응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작업자들은 예술에 함몰되지 않고 예술과 객관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거나, 예술과 인생을 동일시하거나 하는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할 거예요. 현실의 벽으로 힘들어 하는 아티스트들이 이 질문에 직면하기도 전에 인생에 함몰돼 버리는 게 문제라고 봐요. 힘들더라도 분투하면서 견고하게 작업하시기를 바라요."

[네가 무엇을 먹는지 얘기해주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주겠다] (2007~) 프랑스의 한 미식가가 이 시대는 무엇을 소비하느냐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한다고 했다. 소비할 물건은 넘쳐나지만 이상하게도 선택의 자유는 점점 좁아지고, 몰취향이 취향의 모습을 띄기까지 한다. 얇은 전단 안에서 가격이 매겨진 식료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살아간다는 생각보다 그 돈의 가치를 지탱하는 사회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전시는 끝났지만
계속될 이야기

작품을 보는 안목이라는 게 거창하게 느껴진 탓도 있고, 그림을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탓에 무얼 어찌 골라야 하는지 잘 몰랐는데, 이수지 작가의 작품은 덜컥 들여놓고 싶어졌다. 좁고 온갖 잡동사니로 틈도 없이 빽빽한 벽면에 억지로 그림을 구겨 넣을 순 없으니 자주 가는 공간에라도 걸어놓으면 탐미욕이 조금이나마 충족될 것 같아서다. 그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거창한 의미는 아니더라도 내일 여전히 다른 작품을 그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경계를 오가는 그의 '여정'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아쉽게도 이수지 창고전은 지난 8월 앙코르 전시까지 끝난 상태다. 작품으로 만나길 원한다면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듯. 작품과 노동, 그리고 자화상을 그리는 일도 진행형일 테니 작가로서의 다음 행보는 천천히 생각해도 좋겠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지난번에 새로운 연재물 [독립, 하셨습니까?]의 기획의도를 소개했습니다.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인 글을 쓰겠다고 밝혔는데요, 오늘부터 본격적인 연재가 시작됩니다. 첫 순서로 <조선명탐정> <의뢰인>의 제작자이자 첫 장편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감독, 19살 연하의 동성애인과 결혼선언을 하여 주목받고 있는 김조광수 씨의 삶을 소개합니다.

 1.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2.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결한장>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 이 글에는 영화 내용에 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성애가 멜로와 만날 때

김조광수 감독의 공식적인 프로필 사진. 사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보기 드문 편이다. 변화무쌍한 표정을 볼라치면, 한때 그가 배우를 꿈꾸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다.

김조광수는 "퀴어영화는 멜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계급과 출생의 비밀, 집안의 결혼 반대, 불치병과 시한부 등 소위 '막장' 코드는 조만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시효가 다할지도 모른다고요. 이런 막돼먹은 요소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사랑과 드라마에는 '장애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넘지 못할 것 같은 벽에 부닥쳐 수없이 좌절하다가도 절대 좌절하지 않는 주인공이 보란 듯 역경을 넘어설 때의 쾌감과 대리만족은 현실세계에서 그만한 기염을 토해야 할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절대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판타지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드라마의 결말이 예측 가능해지니 정황을 뒤집는 '반전코드'는 물론, 개연성도 없는 황당한 결말로 모두를 배반하는 일까지 생기는 것이지요. 뻔한 이야기 전개를 비틀고 또 비틀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입니다. '갈 데까지 가는' 상황이 점점 임계치를 높여가면서, 막장이나 반전을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고 봐야겠지요.

사실 동성애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식'이나 '감초' 캐릭터로 쓰인 건 꽤 오랜 일이지만, 동성애자의 사랑을 전면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안방극장에 최초의 본격 동성애를 등장시킨 신호탄이자 논란의 불씨를 댕겼지요.

동성애가 옳은지 그른지는 논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에 이유가 없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범죄가 아닌 한에서야) 누군가의 허락이나 재단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일부 기독교인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 믿고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깁니다만,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퀴어신학(동성애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다루며 테드 제닝스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 태동하는 걸 보면 동성애를 탄압하는 것은 꽤 정치적인 측면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동성애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위기를 면하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섣부른 '정죄'가 교회 내에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을 도리어 시험에 들게 하고 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한 것이 작금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동성애를 전면으로 다루는 퀴어영화는 이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 자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도전이며, 때로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해주는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자체가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닿아있지요.) 퀴어영화는 야오이(게이 판타지를 그린 만화의 일종)에 열광하는 '빠순이'들이나 향유하는 하위문화의 일종으로 여겨져 왔지만, 근래 그 관객층이 넓어지며 작품 또한 다양해지는 추세입니다. 퀴어영화의 대중화와 함께 성소수자의 사랑을 무조건 슬프거나 절망적인 상황으로 그리지 않는 '힘 빼기'의 흐름 또한 뚜렷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화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을 겸업하는 김조광수(청년필름 대표)가 있습니다.

그의 첫 장편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대중적입니다. 저예산영화로 많은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개봉  개봉 3주 만에 퀴어영화로는 최다 관객 기록을 돌파해 8월 초순까지 5만 명이 넘는 관객과 만났습니다.  
 

<두결한장>의 성취, 퀴어영화를 보는 즐거움

감독은 관객이 퀴어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결혼과 죽음이라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통해 성적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기쁨과 슬픔, 아픔을 덤덤한 시선으로 조금은 밝게 그려냅니다. 감독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민수'는 의사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지만, 그가 게이라는 사실은 부모조차 알지 못합니다.

김남길, 이제훈, 유아인 등 남자 스타를 발굴해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제작가 겸 감독인 만큼, 그간 배우로서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던 김동윤을 '재발견'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범한 삶을 원하는 부모님의 열망 앞에 못 이기는 척 결혼하지만, 그 결혼은 실은 동료 의사이며 레즈비언인 '효진'과의 계약에 의한 것입니다. 오랜 동성연인이 있는 효진은 이성애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정식으로 아이를 입양해 키울 수 없어 결혼관계에서 입양하는 것처럼 꾸미려는 것입니다. 적당한 시기에 이혼하고, 아이 양육권을 효진이 가지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이 결혼에 잠재된 폭탄이 있으니, 그것은 민수의 부모님입니다. 휴일 아침,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살림살이를 헤집고 아들에게 밥을 제대로 해먹이는지 점검하는 시어머니 덕분에 이 가짜 결혼생활은 언제 들통 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눈에 반한 연인 '석'을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챌까 두려워 사랑을 드러낼 줄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는 민수의 '비겁함'입니다. 물론 쉬이 그럴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민수의 그런 행동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친구 '티나'는 결국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민수와 티나에게는 한국판 '섹스 앤드 시티'를 연상시키는 일군의 게이 친구들이 있으니, 그들이 생전의 티나를 추억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헛갈리는 상황에 봉착해요.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티나의 성정체성은 가족에게 '커밍아웃' 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친구를 보내며 민수와 다른 이들도 한 발짝씩 자라나게 되지요.

원초적인 생활의 모습에서부터 흥겨운 피날레 결혼식 장면까지, 그의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과 판타지를 넘나들면서도 생의 무게와 삶의 흥겨움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는 장점이 있다.

퀴어영화는 다양한 사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데서부터 출발해, 누군가를 사랑함에도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과 맞닿은 지점에서 긴장감이 생겨나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드러내 소개하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과연 축복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때론 소중한 사람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비로소 직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영화 <두결한장>은 흥겹고, 페이소스마저 예쁘게 포장되어 이야기에 폭 빠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김조광수가 처음부터 감독으로 데뷔한 것이 아니었고 제작자로 오랜 기간 일한 덕분에 균형감각(대중의 취향과 감독의 의도, 투자자와의 조율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을 찾는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요.

정작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못 하고 글을 끝맺어야겠군요. 저는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맨 마지막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연하인 연인과의 결혼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받게 된 대중의 관심을 도입에서부터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가 누구보다도 당당한 이유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행복을 성취한 게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단지 그 이유로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는 게이 역할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수없이 거절당했습니다. 어떤 배우는 굳이 만남을 청해 그의 면전에서 "동성애는 죄라서 이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답니다. 종교적인 이유나 신념으로 그를 비난하는 일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요.

아무튼 내년 즈음, 그는 결혼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굳이 청첩장이 없어도 갈 수 있고, 게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춤과 음악이 있는 흥겨운 축제로 만들려 한답니다. 축의금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쓰겠다고 하네요. 같이 가서 축하해주지 않으실래요?
 
* 이 글은 김조광수 감독을 인터뷰하고, 그의 인터뷰집 《나는 게이라서 행복하다》도 참조해 썼지만 인터뷰를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검색하면 손쉽게 여러 매체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른 시각에서 쓰고 싶었거든요.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저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이은 씨와 함께 <독립, 하셨습니까?>라는 꼭지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꿈을 펼치는 일의 연장선에서 글을 써보려 한다...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여 모호하지만, 어딘가로부터 독립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글이랄까. 내가 면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본으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대중성 없음, 알아주는 이 적으나 열광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보편에 기대는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다"라는 기획의도에서 앞으로 어떤 글이 나올지 짐작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달에 대략 두 명 정도를 인터뷰하여 다양한 문화계 인사가 살아가는 모습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독립, 하셨습니까?> 꼭지의 기획의도를 풀어낸 글을 싣습니다. 다음 주엔 영화 <조선명탐정> <의뢰인>의 제작자이자 첫 장편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감독, 19살 연하의 동성애인과 결혼선언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조광수의 삶을 소개합니다.

 1.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2.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결한장> 

흔해빠진 세 개의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넌 꿈이 뭐니?"
"한 해 수입이 얼마나 되시나요?"
"그렇게 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겠어?"

첫째 질문의 유효기간은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는 즈음까지일 것이다. 대체로 20대 중후반, '어른이 되어 자신의 두 발로 서기'를 강요(?)당하는 시기. 이 질문을 더 받지 않게 된 시점을 돌이켜보면, 아마 무언가를 전업(그러니까 풀타임)으로 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밥벌이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붓고, 그 대가로 보통의 삶을 영위하고, 또 그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과정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야 하는 굴레'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 기준이 늘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인데, 늘 묘한 박탈감 혹은 경쟁심이 짝패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질문은 요즘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묻는 말이란다. 선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대놓고 이런 질문을 하거나 받은 적이 없지만 이 질문이 오가는 장면을 떠올릴라치면 시쳇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 판에 서로의 외모와 조건(연봉부터 가정환경까지)을 검증한 다음 결혼을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은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사실 셋째 질문은 둘째 질문을 거쳐 결혼에 골인한 이후에도 수시로 들어야 하는데, 다년간 여성들이 주로 보는 잡지에 글을 써온 입장에서 '적어도 남들만큼'이라는 강박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서 극대화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아이를 잘 키우는 비법이나 필수품 같은 것들은 맞벌이로 아이를 충분히 돌보지 못하는 양육자의 부채감을 한껏 자극하는데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한 꺼풀 벗기면 탐욕스레 벌어진 현금투입기와도 같더란 말이다. 끊임없이 돈을 버는데도 늘 가난하다고 느끼고 자산만큼 빚도 늘어나야 신용등급이 올라가는 기묘한 세상.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데 꼭 저래야 하나, 싶었다.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어쨌거나 세간의 질문에 동의하거나 적당히 순서를 밟으며 살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씩 다른 선택을 시작했고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내가 유일하게 묻고 또 답하는 질문으로 1번이 남아 있다. 사실 한순간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일을 멈추지 않은 것뿐인데.

대학 진학을 계기로 원 가족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갖게 된 지 대략 수년, 어느 때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사람을 만나 글을 썼고, 또 몇 년이 지나니 인권단체의 활동가가 돼 있었으며 언젠가부터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돈 안 되는 일만 하면서도 먹고살 돈은 열심히 벌었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고 (사교육 전무에 등록금 대출도 다 갚은 지 오래니 부채감이 없다) 2년마다 이사를 하면서도 내 공간만큼은 꾸려가고 있다.

세상엔 뼛속 깊이 존경할 만한 사람도, 무조건 경멸할 만한 사람도 드물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절감한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내겐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열린 결말에도 익숙해졌다.

세상에 당연한 일만 있는 건 아니더라는 아주 새삼스러운 기분.
새삼 뒤집어보기 시작했는데 크게 위험할 것도 없던데 뭘.
이렇게 나는 다소간 위험한 여자가 되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대체 뭐가 되고 싶은데? 묻는 이들을 위해 대답을 해야겠다. 글쎄, 십 년쯤 후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겠지만 지금 주로 쓰는 인터뷰보단 조금 더 창의적인 작업이었으면 한다. 직접 쓴 글로 연극무대를 꾸미고, 영화작업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란다. 연기도 계속하고 싶고 그때엔 고료도 (제발 좀!) 올라서 부업으로 가끔 기고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길. 더 넓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 여전히 옳다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손발을 놀리면서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몸도 마음도 건강했으면. 사실 이게 거의 전부다. 실은 욕심이 없는 게 아니고 아주 많은 거다!

자본, 가부장제가 쓴 각본 뒤집기 

어쨌거나 꿈을 펼치는 일의 연장선에서 글을 써보려 한다. 꼭지명은 <독립, 하셨습니까?>.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여 모호하지만, 어딘가로부터 독립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글이랄까. 내가 면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본으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대중성 없음, 알아주는 이 적으나 열광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보편에 기대는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뒤집어보는 경험에서부터 사람은 성장하고, 무언가를 보는 안목 또한 길러진다고 믿기에 나는 가능한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것이고,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글을 쓸 것이며, 나 역시 그렇게 살 것이다. (드문 가능성이지만) 돈을 많이 벌거나 더 이상 누군가의 불편함을 살피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서게 된다 해도 이 글을 시작하는 마음만은 절대 놓지 않으리란 다짐도 더해서.  

무가지에 공짜로 안겨주는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평론가라도 되는 양 날카로운 관점이나 전문 지식에 기대기보다는 조금 더 의미가 있고 마음을 울리는 것들에 대해 써보련다. 작지만 소중하거나 더 아름다운 가치에 대해 한 겹의 소박한 포장만 하는 글을 쓰리라. 그것이 읽는 이들에게도 자그마한 공명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이 글이 누군가의 꿈에 밑그림이 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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