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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일본 경제보복 핑계로 주52시간제 풀어달라는 기업들

by 생각비행 2019. 8. 19.

일본의 경제보복과 그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처가 강경해지는 가운데 우리 경제 내부를 돌아보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용렬한 일본의 경제보복 앞에서 이를 핑계로 완장질을 하거나 약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출처 - 시사저널


이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은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노동자 쥐어짜기입니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시민들은 이성적이고 세련된 방법으로 일본의 경제 보복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데 반해 일부 기업과 정부 기관은 국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란 식의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이죠.


출처 - 프레시안


기업들로부터 제일 먼저 나온 요구는 일본의 경제보복의 첫 타깃이 된 반도체 소재개발 부문의 주52시간제를 예외로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7일 열린 기업과 기술단체의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연구 개발을 위한 정부의 규제 완화 요구가 쏟아졌죠. 하지만 근로시간 제한이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마지막 발언은 해서는 안 될 소리였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이 거쳐야 하는 절차를 간소화하고 특별연장근로까지 허용해주기로 했는데도 기업들은 아예 주52시간제의 예외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TV조선


보수 언론들은 대기업 위주 광고주의 비위 맞추기에 혈안입니다. 주52시간제와 관련된 보도를 연이어 내놓고 있죠. 일본의 경제보복 이전인 5월부터 교섭 중이던 현대차노조와 관련해서 TV조선은 마치 좋은 실적을 올리던 차종의 생산 지연 책임이 노조에 있는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불법파업을 하고 있는 양 기사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생산 지연의 정확한 원인은 해당 차종이 생각보다 훨씬 잘 팔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석 전까지는 현대차노조와 사측 모두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큽니다. 그런데도 언론이 노동법을 준수한 노조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단체행동권에 대해 마치 빨갱이들이 불법 파업을 저지르는 양 여론을 호도하고 있죠.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급한데 파업이나 하고 있는 불법 노조라면서요.


출처 - MBN


MBN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뭉쳐도 힘든 시기에'라면서 노조가 일본보다 더 나쁘다는 식으로 부정적 시각을 따로 따서 인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도요타는 57년간, 닛산과 혼다는 40여 년간 파업이 없어 우리보다 경쟁력이 우위에 있다는 식으로 덧붙였죠. 생산량과 판매량이 단순히 노조의 파업 유무에 달려 있다면 독일의 폭스바겐은 망해도 벌써 망했어야 맞겠죠. 폭스바겐은 수년간 자동차 판매량 부동의 1위 기업이지만 때마다 심각한 파업 사태를 겪었습니다. 현재는 노사가 매주 한 번씩 회동하는 적극적인 노사 정책으로 파업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죠. MBN의 보도대로라면 폭스바겐보다 도요타 같은 일본 기업이 1위여야 할 텐데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문제는 노조의 파업이 아닙니다. 파업을 안 해야 선이고 파업하면 악이라고 보는 이분법적이고 후진적인 문화가 훨씬 큰 문제입니다. 파업 하나만을 놓고도 은근한 일본 올려치기가 느껴집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현재 우리나라는 EU로부터 국제노동기구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충분치 않다며 전문가 패널 소집을 공식 요청받은 상태입니다. 2011년 발효한 EU와의 FTA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요. EU가 FTA를 체결한 국가에 노동 조항 미이행을 이유로 소집을 요청한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EU가 지적한 총 8개의 핵심협약 중 비준하지 못한 것이 바로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조항입니다. 한국 정부의 노조 탄압과 공익근무요원 등을 비롯한 용도 외 강제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 제도를 문제 삼은 겁니다.

 

출처 - 연합뉴스

 

특히 EU는 자유한국당과 기업단체 등이 주장하는 시기상조론과 한국적 특수성을 운운하며 비준을 반대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패널 소집은 사실상 무역 제재를 위한 절차입니다. 통관 강화 등 여러 비관세 제재를 받을 우려가 있으며, FTA 역사상 최초로 노동 조항 위반으로 제재를 받은 노동권 후진국이란 오명까지 받게 될 우려가 있죠. 일본의 경제보복을 핑계 삼아 노동자와 노동권을 후퇴시키면 EU의 제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출처 - 한국일보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협의회 2차 회의에서 노동계는 주52시간제 지연 움직임을 성토했습니다. 이날 참석한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은 최근 여당에서 발의한 주52시간 유예 법안에 대해 "다시금 노동자의 일방적인 희생과 양보만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한국 사회는 회복 불능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출처 - 데일리안

 

주52시간제는 이미 지난해 관련 법이 개정돼 상시노동자 300인 이상인 모든 사업장에 적용 중인 상황이고, 내년 7월에는 50인 이상~300인 미만 사업장에, 2021년 7월에는 5인 이상 사업장에도 적용될 예정이었죠. 그런데 지난 11일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원내수석부대표가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에 대한 주52시간제 도입을 늦추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주52시간제 논란이 불거진 겁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일본 수출규제 대상 3개 품목 관련 기업에는 '무제한 노동'이 가능한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동계는 여당의 일부 의원들이 제대로 시행도 하지 않은 주52시간 제도를 유예하는 법안을 제출했다면서 기업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동 기본권, 생명권, 안전하게 살 권리를 훼손한다고 일본의 경제보복 위기가 극복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탄력근무제와 재량근로제의 확대 시행 등 근로시간 단축으로 야기되는 부작용에 대한 해결책 없이는 시한폭탄이 터지는 시점을 조금 늦추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죠.

 

출처 - 이데일리

 

노동권은 인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한 사회에서 노동자가 받는 대우가 바로 그 사회의 사람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본 제국주의 전쟁범죄들은 세계의 보편적인 눈높이에서 모두 인권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의 경제보복을 핑계 삼아 또 다른 인권 문제를 양산해서야 되겠습니까? 일본처럼 국수주의에 갇혀 자기 점검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수준 높은 시민들의 행동처럼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도 차분히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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