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을 기다리며 매일 야근에 시달리시는 직장인분들, 지금도 모니터를 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계시겠지요? 예전에 '독수리타법'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않는 어린 분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네요. 과거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나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았던 기성세대가 손가락 한두 개로 겨우겨우 키보드를 치던 모습을 묘사한 단어입니다.
주판알을 튕기고 펜글씨 교본처럼 반듯한 글쓰기가 사회인의 무기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업무 환경의 변화는 기성세대에겐 가혹했습니다. 대기업 고위직들은 처음엔 손으로 쓴 종이를 부하 직원에게 입력하게 하며 버텼으나 결국엔 말단 직원한테 키보드로 입력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퇴출당하기 일쑤였죠.
출처 - 연합뉴스
생각비행이 속한 출판업계만 놓고 봐도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업무 환경의 변화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원고지 더미가 작가의 방을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디지털 원고로 출판사에 입고되고, 편집-디자인-출력 등 작업 대부분이 컴퓨터를 통해 이뤄집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주문 접수, 출고, 재고 관리 등을 컴퓨터의 도움 없이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 세대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책을 둘러싼 업무 환경이 이전과는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좋은 만년필이 작가의 필수품이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좋은 기계식 키보드, 스캐너, 스마트폰, 태블릿 등 다양한 디지털 도구가 이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게 작가와 편집자의 미덕인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캘리그라피가 아닌 이상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서로의 필기체를 확인할 기회가 드물어지는 세상이니까요.
출처 - 연합뉴스
입력 방식의 차이가 어쩌면 사람과 업계의 세대를 가르는 척도가 될 수 있겠군요. 일본에서는 이 문제가 나름 이슈입니다. 작년에 저명한 비즈니스 주간지 《다이아몬드》에 '「젊은 세대의 컴퓨터 이탈 현상」이 시사하는 두려운 미래’라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독수리타법을 쓰는 기성세대를 은근히 깔보던 자신이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의 핸드폰 입력과 스마트폰 터치 입력 때문에 기성세대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한 글입니다.
「若者のパソコン離れ」が示唆する恐ろしい未来(원문) : http://diamond.jp/articles/-/98503
「젊은 세대의 컴퓨터 이탈 현상」이 시사하는 두려운 미래(번역문) : http://isao76.egloos.com/2592896
물론 이는 일본의 문제입니다. 일본에서 키보드로 글자를 입력하려면 영문 발음을 쳐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때문에 효율적인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이 더 빠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입력은 이와는 다르죠. 현재로는 키보드 입력이 스마트폰 터치 방식보다는 훨씬 빠릅니다. 일부 엄지족이 웬만한 성인의 키보드 입력 속도를 웃도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직업 현장에선 여전히 마우스와 키보드를 통한 입력 방식이 최적의 조건입니다.
출처 - 기즈모도닷컴
애초 효율이나 속도만 따진다면 '쿼티' 방식이 아닌 '드보락', 즉 두벌식이 아닌 세벌식 자판 입력 방법을 써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방식이 제일 효율적인 업무 환경이 되는 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도도한 시대의 변화는 우리에게 익숙함과의 결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 시대적 화두인데요, 이런 조류에서 우리나라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죠.
지난해 처음으로 모바일 기기의 인터넷 트래픽이 PC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은 스마트폰 사용률이 90퍼센트를 넘은 지 오래됐습니다. 이런 접속 환경의 변화는 세계적인 추세이며 앞으로도 가속화할 겁니다. 지금도 회사 업무 외에는 PC를 쓰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키보드보다 스마트폰 입력에 더 익숙합니다. PC보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고 스마트폰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진 세대가 회사에 입사할 때쯤이면, 한국에서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은 뒤처진 기성세대가 되어 퇴출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출처 - 디지털데일리
2016년 딥러닝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나온 후 업계 판도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신경망 인공지능을 적용하여 모바일 기기의 음성 인식과 번역의 완성도는 이미 놀라운 수준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바둑은 이미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고, 올해는 고도의 전력이 중요한 프로포커판을 인공지능이 휩쓸기도 했죠.
출처 - 경향신문
타이핑의 시대가 저물고 말로 인공지능 기반의 기계와 소통하는 일이 대세가 되는 시대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싶군요. 이런 변화의 흐름에서는 키보드도 터치스크린도 아닌 인공지능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소양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에 두서가 없고, 우주의 기운 운운하는 사람은 퇴출 대상 제1호가 되겠죠. 이런 변화를 마냥 좋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말의 무게는 동일할 겁니다.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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