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살 활명수로 살펴보는 한국 근현대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 잘 쇠셨는지요? 가족, 친지를 만나 쌓인 회포도 풀고, 아이들의 재롱도 보면서 정을 나누는 명절에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평소와 다른 기름진 식단과 과식 때문에 배탈이 나기 쉽기 때문이지요. 설과 한가위 다음 날에 가장 잘 팔리는 약이 소화제이기도 합니다. 먹을 게 없어 명절 때만 되면 배가 터지도록 먹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아무래도 설의 분위기와 오랜만에 모여 같이 밥을 나누는 정 때문에 평소와 달리 과식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식이나 소화불량으로 약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약방은 설 특수를 맞기도 한답니다.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소화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궁중 무관인 선전관(오늘날의 대통령 경호관) 출신 노천 민병호에 의해 1897년 탄생한 활명수는 한국 최초의 브랜드이자 최장수 의약품이기도 합니다. 활명수가 세상에 나온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약은 구하기가 어려워 급체나 심한 설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활명수는 조선 민중의 아픈 속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 그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조부모님 때부터 마셔온 활명수는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역사와 궤를 같이했습니다. 오늘은 120년간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를 통해 지난 역사를 한번 돌아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

 

 

활명수의 발상지, 정동


정동과 서소문 일대는 한국 최초(最初)이자 최고(最古) 브랜드인 활명수의 발상지입니다. 정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급변하는 한국 근현대사가 오롯이 압축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비롯한 일제의 무력시위가 진행된 가운데 아관파천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 또한 정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2대 주인인 민병호의 아들 민강의 지원 아래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결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연통부가 비밀리에 설치되기도 했죠.

 

서울연통부 기념비

 

활명수의 아버지 민병호는 고종의 어의이자 제중원 의사였던 알렌과의 인연으로 서양의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서양의학과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궁중 비법과 한의학 지식을 융합하여 활명수를 만들어냅니다. 최초의 현대식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 이야기가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활명수'의 탄생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드라마 29회에 등장하는 '박하맛 나는 소화 물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 활명수 탄생 이야기를 드라마의 배경에 맞춰 각색한 것이긴 하지만, 활명수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비교적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으로 다뤄질 정도로 의미 있었던 최초의 서양식 국립 의료기관 제중원은 조선 사람과 서양의학이 만나는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만남과 관계 속에서 탄생한 활명수는 한방과 양방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낳은 옥동자와 같았죠. 하지만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많은 백성이 본토를 떠나 중국 만주로, 러시아 연해주로, 미주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갓 태어난 활명수 앞에는 나라 잃은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과 동행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활명수와 조선 독립 그리고 경제자립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 궁궐의 용도를 마음대로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창경원으로 바꾼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일본은 헌병경찰 제도를 시행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잡아들였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민족지사들의 활동을 탄압했습니다. 또한 농업과 상공업 등에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합니다.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허물고 상업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오늘날의 산업박람회)를 개최한 일은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행사였습니다. 조선 기업인들은 이 공진회 참가를 두고 고민이 컸습니다. 조선에서 벌인 첫 박람회였지만 동시에 일제 식민통치를 만방에 알리는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밉지만 사업의 홍보와 판촉을 위해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은 공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마련된 수익금은 그가 설립한 소의학교에 기부했으니 동화약방으로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나름의 방법으로 이용한 셈이죠. 이 공진회를 계기로 조선의 지식인층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독립과 경제자립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민강 사장은 약업으로 이룬 집안의 부를 사회를 위해 사용해왔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경성부 내의 동화약방 점포는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과 연락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엔 그의 과감한 행동이 기업의 자랑이 되었으나, 일제치하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은 물론 사업과 집안의 몰락을 불사한 용단이었죠. 독립운동에 참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회사는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못하고 투옥되어 있거나 해외로 나가 있으니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활명수뿐 아니라 동화약방의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활명수의 모기업 동화약방에 큰 위기가 닥친 1920년대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치만 놓고 보자면 분명 마이너스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동화약방은 무형의 자산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동화약방이 힘쓰는 노력이 알려지자 해외 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만주, 미국 하와이에서 활명수를 찾는 이가 늘었다는 자료도 있으니까요. 오늘날 활명수 브랜드에 깃든 무형의 자산 가치는 그때 그 시절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활명수,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


조선 유일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에서 1936년 한 경기가 생중계됐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경기였습니다. 비록 일제 식민치하에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경기였지만, 손기정 선수는 자신을 'Korean'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승 후 작성한 방명록에도 기테이 손이 아닌 ‘손긔정 KOREAN’이라고 써서 떳떳한 조선 남아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힘으로 약소민족을 짓밟고 있던 군국주의에 대한 그만의 저항이기도 했지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후 여러 기업에서 그의 승리를 모티브로 활용해 광고를 했습니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도 우승 다음 날인 1936년 8월 11일 《조선일보》에 우승 축하광고를 게재합니다.

 

반도남아의 의기충천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축하


건강한 체력, 견인불발하는 내구력에 근원은

오직 건전한 위장에서 배태된다.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 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하여

활명수를 복용합시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고 건강한 위장을 위해 활명수를 마시자는 기업 이미지 광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이나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이상 가는 민족적 경사 앞에서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이 사망한 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와중에 과감히 축하광고를 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 조선 선수의 세계 제패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막힌 속을 뚫어주는 청량제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세를 과시하던 히틀러는 3년 뒤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세계를 다시 한 번 참혹한 전쟁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역사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한여름 시원한 냉수와도 같았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는 정확히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달린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 다시 한 번 재현됩니다. 1936년 암울했던 시절 광화문 광장에 모여 손기정과 남승룡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손자, 손녀들이 66년 뒤인 2002년 여름 광화문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을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손기정의 세계 제패를 기념하던 활명수의 광고 문구인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은 그렇게 실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활명수 광고 속 전화기와 자동차


1950년 안타까운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는 일은 국가적인 과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수출 전략과 민족 특유의 근면성을 바탕으로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제개발을 이뤄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정치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경제가 점차 발전하자 우리 정부는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이 다 이때 만들어졌죠. 생활수준이 조금씩 향상됨에 따라 나름의 소비문화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자식 교육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에 대한 욕망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고 계층을 형성함으로써 가치와 부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960~1970년대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전화기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손에 하나씩 들고 있지만, 그 당시엔 동네에 전화기 한 대 있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전화 신청이 밀려 백색전화 한 대 값이 250만 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유할 수 있어 사고팔 수 있는 백색전화는 투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한 가마니 가격이 6만 3000원 정도였고 서울 시내 집 한 채 값이 250만 원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전화기 값이 비쌌는지 알 수 있죠. 


"하루가 끝나도 내일의 일이 또 남아 있습니다. 전화연락할 일, 만나야 할 중요한 약속시간 때문에 대식가로서 또는 애주가로서 먹고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다?"라며 활명수를 권하는 광고가 신문에 게재됩니다.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였습니다. 1968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활명수 광고에 처음으로 다이얼 전화기 그림이 등장하는데요, 이는 아직 전화기가 일반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전화기 옆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전화 그림을 넣은 것이었죠. 활명수의 전화기 그림 광고에서 현대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문명의 이기인 전화기를 사용하는 타깃 고객인 직장인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 동화약품의 고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70년 8월 17일 《동아일보》 활명수 광고에는 자동차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03년으로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드 자동차를 들여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하지요. 선택받은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당시 자동차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 우리나라는 미군이 남기고 간 자동차의 부품을 활용하여 조악한 디자인과 성능이긴 해도 운행에는 문제가 없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시발(始發)’ 즉,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죠. 이 시발 자동차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언젠가 차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1968년 전화기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와 1970년 자동차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는 당시 보통 사람이 소유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가치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화기와 자동차가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활명수 광고에 담겨 있던 이상이 실현된 것이죠.  


 

과음, 과식의 시대에도 활명수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어느 정도 먹을거리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것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던 고단백 고칼로리 음식을 평소에 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과음과 과식을 하는 이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활명수도 이런 시대적 변화에 발맞췄습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과음'과 '과식'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5월 13일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과음 과식을 하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성 광고가 실립니다. 광고 문구를 보면 "언제나 튼튼하고 건강한 위를 위해서는 위에 부담을 주는 과음, 과식을 피하고 항상 알맞는 양의 음식을 규칙적으로 드시도록 하십시요.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반드시 규칙적인 식생활만을 하기란 어려운 일! ― 뜻밖의 과음, 과식을 하셨을 때는 곧 알파활명수를 복용하십시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현대인의 과음, 과식에 적절히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활명수 복용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과음, 과식 그리고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경제 발전으로 예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물질적 풍요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바쁜 생활 속에서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한 끼 식사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2010년에 이르러 활명수는 가족식사를 제안하는 '맑은 바람 캠페인'을 제안합니다. 광고는 "하루 한끼, 가족이 밥상에서 만나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출처 - 동화약품

 

한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소비자들은 편의점에서도 간편하게 활명수를 구매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2011년에 드링크제, 액제 소화제, 외용연고 등 48개 품목의 일방의약품을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의약외품으로 지정합니다. 소비자의 구매 편의성에 대한 요구가 이어지자 동화약품은 이를 수용하여 의약외품으로 전환된 제품 중 부채표 '까스활'을 출시합니다. 까스활의 탄생은 편의점과 대형마트의 대중화로 인한 소비 형태의 변화와 이에 따른 액제 소화제 시장의 트렌드와 현행법에 맞게 활명수의 브랜드를 적절하게 공유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죠.

 

활명수 하면 자연스럽게 부채표 상표가 떠오릅니다. 부채표는 활명수의 초창기부터 함께했습니다. 부채표 상표는 활명수 병 라벨에 브랜딩되어 100년 이상을 우리와 함께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활명수 하면 곧 부채표를 생각하는 것이죠. 동화약품이 최근에 출시한 미인활명수의 병 디자인을 보면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위에 새겨진 부채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디자인 안에 담긴 활명수의 가치를 음미합니다. 활명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소비자의 요구와 감각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10년 뒤 20년 뒤 활명수의 병과 라벨 그리고 부채표 상표는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출처 - 동화약품

 

2016년 올해로 딱 119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겪어온 활명수의 나이입니다. 근 120년간 활명수는 한국인의 지친 속을 달래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 중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소비자의 99.8퍼센트가 활명수를 알고 있으며 연간 1억 병이 생산됩니다. 한마디로 활명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입니다. 활명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혼란과 전쟁,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화와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주었습니다.

 

1897년 이래 활명수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처음 등장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활명수는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할 것입니다. 활명수가 미래가치를 담아 소비자와 사회에 더 많은 일을 할 때입니다. 120년간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동고동락한 활명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에 오늘 전하지 못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꼭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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