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보도

저성과자 낙인, 당신도 해고당할 수 있다!

by 생각비행 2016. 1. 28.

지난 25일 월요병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큰 짐이 부과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을 담은 이른바 "양대 지침"을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일반해고 지침입니다. 일반해고는 징계해고와 정리해고뿐 아니라 저성과자도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월급쟁이이면서도 일반해고에 찬성하는 분도 계시더군요.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하시는 건 다 옳고 기업이 잘되어야 나라가 잘되고 개개인은 죽도록 노오오오력 해서 성과만 잘 내면 되는 것 아니냐면서요. 그분들에게 직장이란 기본적으로 이윤 추구를 위해 모인 집단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전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이 문제는 제외하고 생각해보려 합니다. 과연 월급쟁이가 일만 잘하면, 성과만 내면 저성과자의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출처 - 파이낸셜뉴스



인터넷 강국 한국을 만든 사람도 희망퇴직 시킨 KT


한국은 세계적으로 초고속 인터넷망이 잘 구축된 나라입니다. 그 혜택을 우리는 매일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라면 분명히 초고속 인터넷망을 쓰고 계실 겁니다. 컴퓨터를 오래 사용한 유저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초고속 인터넷의 첫걸음 중 하나는 바로 ADSL이었습니다. IMF 시절 ADSL은 기존 전화선을 이용해 컴퓨터의 데이터 통신을 할 수 있게 해준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당시 피시방 열풍이 일어났고 전 국민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출처 - MBC


ADSL은 당시 KT에 재직 중인 공규식 씨가 아이디어를 내고 상품화한 것입니다. 공 씨는 인터넷 초창기 멤버로 KT 인터넷 계통의 기초를 구성하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고,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와 KT에 접목한 실력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당시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도 잘 모르는 직원들에게 해당 기술 교육을 하고 교재를 작성한 분이기도 하죠. 온 국민이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하고 KT에 막대한 부를 안긴 이분의 삶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요?

 

마크 저커버그나 스티브 잡스만큼은 아니어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2014년에 공 씨는 KT의 희망퇴직 예정자였습니다. 그런데 안 나가고 버티다 하던 일과 전혀 상관없는 업무를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돌아다니며 잘못 설치된 전봇대 사진만 찍어서 보내는 일입니다. 20여 년 전 초고속 인터넷을 개발할 때 훗날 그 망을 통해 자신이 전봇대 사진이나 보내게 될 줄 과연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KT는 나이 들고 고연봉자인 초기 직원을 필요 없는 존재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KT의 핵심 두뇌이자 전 국민이 쓰는 서비스를 개척하고 만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처우하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MBC 다큐스페셜을 통해 이분의 기가 막힌 현실을 보고 함께 분노한 분도 많으실 줄 압니다.


일반해고에 찬성하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공규식 씨처럼 전 국민이 쓰는 기술과 서비스보다 더 큰 성과를 낼 자신이 있습니까?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나요? 헬조선에선 공 씨 같은 분조차 희망퇴직 대상자일 뿐인데, 일반해고가 본격적으로 시행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래도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회사에 850억을 벌어줘도 정규직 될까 말까 한 현실


'모뉴엘'이란 이름은 다들 한 번쯤 들어본 일이 있을 겁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이 극찬할 정도로 잘 나가던 기업이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폐컴퓨터를 HTPC로 둔갑시켜 가격을 부풀려 2009년부터 6년간 3조 원이 넘는 수출 실적을 위조한 사기 기업이었습니다. 결국 모뉴엘은 법정관리 신청에 들어갔습니다. 속칭 잘 나가는 기업에 돈을 빌려준 금융권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은행은 산업분석팀의 강윤흠 씨의 선견지명으로 추가 대출을 거절하고 기대출금 850억 원마저 조기 환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영업부는 황금알을 낳는 기업이라며 강 씨의 조처에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강 씨는 국내외를 망라한 심층적은 조사를 통해 심사부와 함께 대출했던 850억 원을 전액 환수하는 결정을 끌어냅니다. 모뉴엘의 사기가 드러나 망한 건 그로부터 1년 후였습니다. 한 개인의 실적으로 보자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을 한 겁니다.


회사에 850억을 벌어준 강윤흠 씨는 과연 과연 어떤 보상을 받았을까요? 성과를 못 내면 자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면, 이 정도의 성과를 낸 사람에게는 막대한 보너스 혹은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길에서 주운 돈도 주인을 찾아주면 정당하게 10퍼센트를 요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강 씨의 경우 적어도 85억 정도는 보너스로 받는 게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었습니다. 강윤흠 씨가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은 표창장과 보너스 300만 원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정규직 전환"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놀랍게도 경쟁이 치열한 금융권답게 마흔두 살까지 강 씨는 허울만 좋은 "전문계약직", 다시 말해 비정규직이었습니다. 회사에 850억 원을 벌어준 이에게 돌아온 건 푼돈과 정규직 전환에 대한 약속뿐이었습니다.


일반해고에 찬성하시는 분께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한 번에, 아니 평생 동안 회사에 850억 원 이상을 벌어줄 능력이 있습니까?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조차 비정규직 인생이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회사가 공정한 평가를 할 것이란 환상


영업직처럼 개인의 판매고가 곧 성과로 드러나는 직군도 있지만, 사무직과 생산직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개인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보통 상사가 하지요. 그들은 대개 관리직일 텐데 소위 사측 인간입니다. 회사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란 얘깁니다. 인사고과에 관한 법령과 시스템이 확고하지 않을 경우,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사의 판단에 좌우될 뿐입니다. 상사가 저성과자로 분류하면 당사자는 저성과자가 됩니다. 현재 기업들의 행태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수치를 제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희망적으로 보는 분도 간혹 계실 겁니다. 하지만 대기업은 해고 자체를 프로그램화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두셔야 합니다. 가혹한 방법을 쓰지만 법망은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교묘한 방법이 고안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형식적으로는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사람은 손쉽게 자를 방법이 무궁무진한 것이 현실입니다.

출처 - 국민일보


LG전자 사례를 비롯해 생각비행이 지난번에 알려드린 바 있는 두산인프라코어 같은 대기업부터 병원, 마트 등 생활 속 직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업이 소위 '공정한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을 해고로 내모는 현실입니다. 언론에 공개된 수법만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선진국도 저성과자 해고 엄격 제한


한국은 규제를 풀려고만 하는 데 반해 일반해고를 도입한 선진국은 저성과자 해고를 아주 엄격하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 진행하도록 규제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의 해고를 예고한 경우 당사자와 노조 대표의 이의제기권이 보장될 뿐 아니라 성과 판단 기준, 절차, 영향 등 전반에 노조 대표의 참여권과 결정권이 보장됩니다. 법적 소송에서도 저성과 요인이 현저하고 계약 위반 사항이 분명하게 발생했다는 점을 사용자 측이 입증해야 합니다. 독일 사회를 볼 때 노조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일반해고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악의적인 것입니다.


프랑스는 성과 부족을 이유로 한 해고를 엄격히 규제하는 편입니다. 성과 부족만으로는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성과 부족이 정당한 해고 사유 요건이 되려면, 노동자에게 주어진 목표가 실현 가능해야 하고, 성과 부족이 직무능력 부족이나 비행으로 인해 발생해야 하며, 이러한 사유가 중대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요건에 해당할 때라야 저성과자로 해고할 수 있습니다. 실력 있는 교수를 전봇대를 타게 하고, 무인도에 파견 보내놓고 영업 할당량을 못 채웠다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행태는 애초에 저성과자를 운운할 수준이 아닌 겁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대기업 총수이거나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갑부라면 외면해도 괜찮습니다. 혹시 전 세계인에게 통용될 혁신적인 서비스나 기술을 내놓을 수 있다거나 기업에 1000억 원 정도를 쉽게 벌어줄 수 있는 능력자라면 외면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월급쟁이로 근근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또한 여러분의 친구와 자식들이 비슷한 삶을 살아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면, 일반해고를 정당화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 '개악'에 반대함이 마땅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대한민국이 삽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