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의 또 다른 면모

'가족의달'인 5월, 어린이날 잘 챙기셨나요? 아이들이 있는 곳에 웃음꽃이 만발했길 빕니다. 어린이날 하면 소파 방정환 선생을 떠올리는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한 분이기도 하죠.

 

지금은 어린이날이 5월 5일이지만 원래는 5월 1일이었습니다. 1922년 5월 1일에 제1회 어린이날(소년일) 기념식이 열렸죠. 1923년에는 방정환 선생이 소년운동 활성화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색동회를 창립했습니다. 이후 노동절과 겹쳐 5월 첫째 일요일로 옮겼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5일이 어린이날로 재지정되었습니다. 어린이날이 휴일로 지정된 건 1975년부터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분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방정환 선생이지만, 그분의 면모를 단순히 어린이에 국한해서 볼 일은 아닙니다. 그는 편집자, 기획자, 시사평론가이자 문화운동가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생각비행은 출판사로서 방정환 선생의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 문화인으로서의 면모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어린이는 물론 여성지부터 영화잡지까지, 미다스의 손


방정환 선생을 논하면서 어린이 관련 잡지를 빼놓을 순 없겠죠. 그가 내놓은 잡지 《어린이》는 당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고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소년운동에 불을 지폈고 나라 잃은 설움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겐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한편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를 통해 시대를 풍미한 많은 작가를 길러냈습니다. 윤석중, 마해송, 이원수, 최순애, 윤극영, 박목월, 정순철, 서덕출 등 국어책에서 한 번쯤 들어본 분이 즐비합니다. 당시 《어린이》는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통할 정도의 양인 10만 부를 발행했습니다. 그때 서울 인구가 32만 명이었다고 하니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인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출처 - 동심넷


출판 문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재능을 발휘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당시 독립운동 활동을 알리는 지하신문 《독립신문》을 직접 제작해 몰래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습니다. 또한 그가 창간을 주도한 《신청년》은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로 알려진 《창조》와 앞뒤를 다투던 잡지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 최초의 영화잡지인 《녹성》을 창간하기도 했고,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성》, 그리고 《학생》 같은 잡지의 주필과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계급투쟁부터 양성평등까지 아우르다

― 작가, 번역자, 시사평론가, 저널리스트로서의 방정환


소파 방정환 선생은 현진건, 염상섭 등이 소설을 기고한 것으로 유명한 잡지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습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인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며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일본 유학 기간에는 <안데르센 동화> <그림 동화> <아라비안 나이트> 등의 외국 소설을 선별해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해당 작품의 우리말 첫 번역임과 동시에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방정환 선생은 <왕자와 제비> <잠자는 왕녀> 등 우리에게 친숙한 동화의 번역자이기도 한 셈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어린이 문학이 발전한 일본에 비해 누릴 것이 없었던 조선의 어린이들을 위해 동화집까지 냈으니, 그의 어린이 사랑은 참으로 깊고 넓다 하겠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한편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뿐 아니라 양성평등을 이야기하며 여성에 대한 기고를 많이 했습니다. 여학교 동창회의 풍경을 그림 <여학생과 결혼하면>이란 글에선 "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 아니라 아무거래도 가지를 말아요. 사람이 그냥 썩어요 썩어!"라고 쓰거나 "혼자 살면 혼자 살지 누가 그런데로 가!"와 같이 직설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가족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조선사람의 가정은 하루종일 직무에 충실하느라고 피곤해 가지고 돌아와서 평안히 쉴 수 있는 재미있는 가정이 아니라 커다란 객주집 여관"이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모를 보면 오늘날 남성들보다 더 진보적인 말을 거침없이 한 시사평론가이기도 한 셈입니다. 하긴 100여 년 전에 이미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역설하신 분이니까요.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방정환 선생은 동요, 동화극, 동화, 번안동화, 논문, 탐사기, 수필 등 800편에 이르는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글을 기고하기 위해 쓴 필명도 한두 개가 아닙니다.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 등이 모두 방정환 선생의 필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제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할 때까지 해마다 70회 이상,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 구연과 순회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 대상 강연회에서 <난파선>이란 이탈리아 동화를 번안해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야기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눈물 바다에 빠졌고, 심지어 감시하러 온 일본 경찰까지 눈물을 훔치느라 바빴다고 합니다. 1967년 《신동아》 기사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는 방정환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출판 문화계의 큰 별, 방정환 선생

 

이처럼 작가이자 편집자, 기획자, 번역자, 저널리스트,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 시사평론가 등등 초인적인 활동을 했던 방정환 선생은 안타깝게도 과로와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33세에 요절했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한 위인으로서뿐 아니라 출판 문화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 방정환 선생의 작품과 연보는 한국방정환재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소파 작품 연보 : http://www.korsofa.org/sub_2_2-b1.php

소파 발굴 작품(동화, 동요, 시, 수필, 교양 등) : http://www.korsofa.org/sub_3_1.php


앞으로 어린이날이 돌아오면 출판 문화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긴 방정환 선생의 업적도 되새겨보면 어떨까요? 어린이들에게 물려줄 가장 큰 유산은 곧 선생이 지키려 했던 우리의 문화일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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