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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통진당 해산 결정의 후폭풍

by 생각비행 2014. 12. 25.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헌재)에 의해 정당이 해산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19일 헌재의 결정으로 통합진보당(통진당)이 해산되었는데요, 다소 놀라웠던 점은 재판관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8 대 1의 압도적인 의견으로 해산 결정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보수 진영은 헌재가 정의를 구현했다며 일제히 쾌재를 불렀고, 일부 진보 진영과 법률가들은 일단 헌재의 판단을 존중하긴 하지만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문은 법률에 대한 지나친 과대 해석과 사실관계 왜곡으로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며 저항하는 모양새입니다.


출처 - 기자협회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주목하라


헌재는 통진당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된다며 대한민국 정부(법무부 장관)가 청구한 통진당 해산 청구에 대해 재판관 8 대 1의 의견으로 해산 및 소속 국회의원 5인의 의원직 상실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안 검사 출신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나 이처럼 압도적인 의견차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출처 - 서울경제


헌재의 다수는 통진당의 주도 세력이 이념 활동을 해왔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당이며 폭력에 의한 이념 실현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며, 이는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했습니다. 현재 내란음모 및 내란선동죄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이석기 전 의원 등 이른바 RO조직과 활동이 통진당의 주도 세력이며 의지인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심대한 위협을 끼치는 종북정당으로서 폭력에 의한 북한식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정당이니 이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 해산 결정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논리입니다.

출처 - 한국일보


이에 반해 유일하게 소수 의견(마이너리티 리포트)을 낸 김이수 재판관은 이석기 등의 일부 세력의 활동을 통진당이라는 정당 전체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며 기각 의견을 냈습니다. 생각비행은 일전에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사회 변화의 씨앗 있다>라는 기사를 통해 법리적 판단이 상식적이지 않을 때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것만은 아니며 소수의 의견이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김이수 재판관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김이수 재판관은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 그리고 그 의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해석 방법론에 의해 확정돼야 하고 또 정당 해산의 요건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는 어떤 논리적 오류나 비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진당에 은폐된 목적이 있다고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말도 엄격하게 증명되어야 할 사항인데, 통진당 해산을 청구한 정부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통진당은 당비를 내는 진성 당원만 3만 명이 넘는 탄탄한 정당인데 문제를 일으킨 몇몇의 행동을 통진당이라고 하는 3만 명 전체의 의지라고 생각하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논리입니다. 또한 단순히 기존 체제에 도전한다는 것을 민주주의를 향한 전복적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체제에 대한 비판은 민주국가 어느 곳에서나 세대별, 계층별로 늘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통진당 해산 헌재 결정의 후폭풍


출처 - SBS


많은 이가 비판한 내용처럼 법률을 논리적 비약 없이 엄정하고 합리적으로 적용한 판단은 소수 의견에 가까웠습니다. 다수 의견의 논리 비약과 끼워 맞추기식 해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재화 변호사는 최종 변론 이후 한 달도 안 돼 정당 해산 결정이 났다는 건 재판관들이 17만 쪽 분량의 증거 자료를 안 봤다는 이야기라고 비판했습니다. 민사든 형사든 재판이라면 응당 판사가 선고하기 전에 증거 자료를 보고 어느 주장이 옳은지 판단해야 하는데, 이런 기초적인 과정을 생략하거나 무시했다는 얘기입니다. 1950년대에 있었던 독일 공산당 해산도 심리 기간이 4년 7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출처 - 국민TV


미심쩍은 면은 한둘이 아닙니다. 헌재 결정문에 쓰인 A씨는 형사소송에서 검찰과 국가정보원이 회합 참석자로 한 번도 거론하지 않은 사람이고 현재 당원도 아닙니다. RO모임 참석자로 언급한 B씨도 형사소송에서 거론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회합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결정문에 등장합니다. 헌재는 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없다며 사실상 오류를 시인했습니다. 이쯤 되면 헌재의 정당 해산 결정은 애초에 무리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 국민TV


사안에 비해 지나치게 짧은 결정기일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 2주년 선물로 일정을 짜 맞춘 게 아니었느냐는 추측마저 나돌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인혁당 사건에 이은 사법살인에 가깝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통진당 해산 결정의 후폭풍이 크고 다양합니다. 일단 일반적인 해석은 이번 결정이 오히려 민주주의에 심대한 타격을 안길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수 의견인 김이수 재판관은 해산 결정은 비례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며 해산 결정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이익이 크지 않은 반면 해산 결정으로 초래될 사회적 불이익은 민주 사회의 순기능에 장애를 줄 만큼 크다고 했습니다. 정당 해산 결정이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보호해야 할 사상의 다양성, 특히 소수자의 정치적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훼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자의 정치적 자유를 위협하는 일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통진당 해산 결정이 나자마자 고영주 변호사 등은 통진당 당원 전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고영주 변호사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의 주요 사건으로 등장한 부림사건을 담당한 검사였습니다. 누구든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던 검사 출신 변호사인 것이죠. 지난 9월 부림사건이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자 사과나 반성도 없이 좌경화된 사법부가 자기 부정을 했다며 비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없는 간첩도 만들어서 족치던 군부독재 시절을 생각할 때 신유신 정국의 박근혜 정부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검찰은 한술 더 떠 통진당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에 대해 일반 당원들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총 13만 명입니다. 통진당 거리 집회를 모두 촬영해 검토 후 수사에 착수한다고 합니다. 일사천리로 '모조리 꼼짝하지 마'라는 위협이자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지나친 헌재 의존도 문제,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사실 통진당 해산 문제는 헌재가 해결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적으로 해결할 문제였지요. 만약 정말로 통진당이 사회에 타격을 입히는 정당이고 민심이 돌아섰다면 다음 총선에서 국민의 손으로 정당의 존재 유무가 판가름 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무슨 문제만 벌어지면 정부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사법부, 특히 헌재에 대한 의존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다 결국 정당 해산 결정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삼권분립이 명확해야 하는데 행정부나 입법부의 문제마저 사법부가 판단하다 보니 헌재가 필요 이상의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된 꼴입니다.

 

출처 - 문화일보

 

국민의 지지가 없는 정당이라면 어떤 활동 근거가 있겠습니까? 그런 정당이라면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석기 내란 음모와 폭력 사태, 투표 조작 등 갖가지 의혹으로 누가 봐도 국민의 마음이 통진당에서 다소 멀어졌다고 볼 수 있는 때였습니다. 통진당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을 때 정부가 청구하고 헌재가 결정한 강제 해산으로 통진당은 탄압받는 피해자의 지위를 재차 획득했습니다.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엇갈림이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이러한 때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일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을 두고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했다지요. 박근혜 정권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대한민국 헌법과 민주주의의 근간과 참 멀어 보입니다.

 

정치판의 혼돈 상황이 극에 다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진보 정당'을 창당하려는 진보 진영 일각의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명진 스님 등 진보 성향의 학계·종교계·문화계 인사가 주축이 된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모임(국민모임)'은 지난 2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보적 대중정치' 복원과 '평화생태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을 촉구했습니다. 통진당 해산이라는 정치권의 큰 문제와 맞물려 신당 창당 움직임이 어떤 효과를 자아낼지 궁금해지는군요.

 

이번 통진당 해산 결정이 알려진 이후 《뉴욕타임스》와 BBC 등 외신은 박근혜 정부가 정치인을 종북으로 몰고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며 비판했습니다. 이 가운데 세계 헌법재판기관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는 헌재 해산 결정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999년에 베니스위원회는 정당 해산의 근거를 폭력의 행사 등으로 엄격하게 하고 당원 개별 행위에 대해서 정당에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는 등의 규정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과연 베니스 위원회는 이번 통진당 해산 결정문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정부와 기업에 이어 이젠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마저 국제적 망신거리가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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