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시위 문화에 영향을 끼친 영화들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부정선거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심판한 4.19 혁명.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 정신의 기둥 중 하나입니다.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역사적 이정표로 기억되는 4.19 혁명은 같은 시기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주도의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일본의 안보투쟁과 대만의 민주화운동은 4.19 혁명에 큰 영감을 받은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한 나라의 시위가 다른 나라에 영향을 준 사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지구촌이 된 오늘날 전 영역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으니까요. 최근 세계 각국의 시위 현장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중문화, 특히 영화의 영향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최근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시위 현장에 영향을 끼친 영화를 주목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의 '촛불집회'와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에 등장한 가면 - 〈브이 포 벤데타〉



출처 - 한겨레


"우리는 상위 1%의 탐욕에 저항하는 99%다"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점령하라' 시위는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했습니다.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에서 청년들이 행진하며 99퍼센트를 위한 사회를 요구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인에게 친숙한 가면도 보였습니다. 콧수염 난 하얀 광대 가면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굴욕적인 외교의 결과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이 쓰고 나왔던 바로 그 가면입니다.



출처 - 워너브라더스


한국과 미국, 유럽의 시위 현장에 자주 등장한 이 익숙한 가면의 실체는 바로 '가이 포크스 가면'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독재사회를 방불케 하는 부패권력에 대항해 시민의 저항과 궐기를 촉구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인 '브이'가 쓰고 나오는 가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 1퍼센트의 독재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99퍼센트의 시민이 브이 대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 앞을 가득 메우는 장면은 참으로 장관입니다. 그 이후부터 익명의 99퍼센트를 자처하는 시위 현장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태국 반쿠데타 시위대의 세 손가락 – 〈헝거게임〉



출처 - 연합뉴스


입헌군주제 국가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태국은 안타깝게도 쿠데타가 끊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1932년부터 총 19차례 쿠데타가 일어나 12번 성공했다고 하니 올림픽처럼 4년에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난 꼴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태국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유난히 잦은 이유는 형식적으론 입헌군주제 체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군사정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국은 예로부터 주변국의 침략이 잦았기에 군의 위상이 막강합니다. 국군통수권이 국왕에게 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국방장관이나 각 군 사령관이 행사하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더구나 군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상원의원의 55퍼센트가 전, 현직 군부 인사라는 점도 입헌군주제의 취지를 무색하게 합니다.

이번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의 시위에서 지난 18차례의 쿠데타 때와는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요, 세 손가락을 붙여 하늘로 곧게 드는 행동이 그것입니다. 지난 6월 1일 태국 수도 방콕의 번화가 아속역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세 손가락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모여든 반쿠데타 시위대는 민주주의 회복과 군부 퇴진 같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출처 - 뉴스1


태국 반 쿠데타 시위대가 왼손 검지, 중지, 약지 이 세 손가락을 붙여 번쩍 들어 올린 몸짓은 영화 〈헝거게임〉에 나옵니다. 주인공 캣니스는 12개국을 식민지로 거느린 독재국 판엠의 식민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심점이 되는데요, 이때 12개 식민지 시민이 캣니스를 지지하며 제국주의 독재자인 판엠의 국왕을 규탄하는 의미로 이런 행동을 취합니다. 태국 반 쿠데타 시위대는 군부의 야욕에 반대하는 의미로 이 동작을 가져다 썼습니다. 이런 행동은 시위대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가 군부는 이런 몸짓을 한 채 침묵시위하는 사람마저 체포해 갈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홍콩 우산혁명으로 드러난 민주주의 요구 – 〈변호인〉



출처 - 뉴시스


경찰의 최루탄과 물대포를 우산으로 막아내는 시위대의 모습에서 이름을 따온 홍콩의 우산혁명. 홍콩의 우산혁명의 발단은 행정장관 선출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일국양제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홍콩 반환 후에도 중국 본토와는 다른 체제를 유지해온 홍콩이지만 중국 중앙정부의 간섭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중국 중앙정부가 약속했던 홍콩의 행정수반인 행정장관 선거를 직선제가 아닌 친중국계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선거로 시행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전두환의 체육관 선거 같은 폭거에 대항하여 수많은 홍콩 시민이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섭니다. 체육관 선거로 얼룩진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직선제 쟁취를 추구한 면, 17세 학생인 조슈아 웡이 이 혁명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1980년대 민주화 요구 운동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실제로 홍콩 시민의 상당수가 한국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림사건'을 모티프로 제작되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군부독재 시절 인권을 유린당한 한 학생의 변호를 맡으며 인간적인 변호사로 변모하는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 영화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직선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군부에 맞선 홍콩 시민의 눈에는 영화의 상황이 자신들의 현재 모습과 겹쳐 보였나 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영화 '변호인'을 보고 한국 국민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는지를 알았어요. 민주화를 위해 희생을 치른 한국 국민이 홍콩의 민주화를 더 많이 지원해주길 바랍니다." 30일(현지시간) 홍콩정부청사 부근 타마르공원에서 만난 도리아 허는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한국과 홍콩의 민주화 과정이 유사하다며 반가움을 표했다. 도심 점거 시위를 주도하는 시민단체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의 회원인 그는 '변호인'이 홍콩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전했다. 실제 최근 집회에서 일부 연설자들이 영화 변호인을 언급하며 홍콩 시민이 독재정권에 저항한 한국 국민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현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르포> 홍콩시위대 "한국처럼 민주화 위한 희생 각오"(연합뉴스)


영화 <변호인>은 홍콩 개봉 첫 주에는 흥행 성적이 저조했으나 위와 같은 입소문을 타며 셋째 주에 홍콩 박스오피스 6위에 오르는 상승세를 탔습니다. 인터뷰한 저 시민뿐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에서도 <변호인>이라는 영화에 드러난 한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큰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출처 - 트위터


한 트위터 이용자가 남긴 민주화가 선거의 결과가 아니냐며 그들도 그런 선거를 하고 싶다며 남긴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홍콩 우산혁명이 한국 영화 <변호인>에 영감을 받았다고 하지만, 퇴행하는 한국의 민주주의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문화가 국경을 뛰어넘어 다른 사회에 끼치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생각할 때, 지금 현재 한국의 상황이 주변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고민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변호인>의 명대사를 인용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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