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소개해드린 스코틀랜드 독립 찬반을 묻는 투표처럼 의미 있는 주민 자치 투표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한글날인 지난 10월 9일 강원도 삼척에서 진행된 원자력 발전소 유치에 대한 찬반 투표였는데요, 어지간한 지방선거 투표율에 버금가는 68퍼센트를 기록했으며 그 결과는 85.6퍼센트의 압도적인 반대였습니다. 강원도 삼척 주민은 당장 눈에 보이는 돈보다 장기적으로 환경과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의사를 투표를 통해 드러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삼척 원전 유치 찬반 투표의 결과가 앞으로 우리나라 탈핵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 SBS
삼척 원전 주민투표 압도적 반대의 의미
박근혜 정부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대재앙을 보고도 원전 확대 의지를 표명해왔습니다. 후쿠시마의 대재앙을 목도한 세계 최대의 원전 국가 프랑스는 75퍼센트인 원전 비중을 10년 내 50퍼센트까지 파격적으로 낮추기로 결의습니다. 독일, 벨기에, 스위스는 모든 원전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런 세계적인 추세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원전 마피아들의 비리로 그간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에 가짜 부품과 불량 부품이 들어가 있어도, 안전 기준에 미달이어도, 심지어 일시 가동 중단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도 원전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시각으로 일관했습니다. 정부는 노후된 고리, 월성 원전에 이어 경북 영덕과 강원 삼척을 신규 원전 건설 예정지로 지정했습니다. 정부는 2011년 강원 삼척 주민들의 96.9퍼센트가 원전 신규 유치에 찬성했다면서 원전 추진 서명부를 증거로 내세웠는데요, 이번 주민투표 결과 삼척 주민 대부분이 반대하는 마당에 대체 과거 96.9퍼센트의 찬성 의견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의구심이 드는군요.
출처 - 경향신문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로 말미암아 인구 10만 명이 채 안 되는 삼척시에 전국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주민투표는 다른 투표와 마찬가지로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공공기관이나 학교 등에 마련된 44개 투표소에서 엄정한 관리하에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표 결과 원전 유치 반대 85.6퍼센트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삼척 주민은 원전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 결과는 이전에 신규 원전 유치에 찬성했다는 민의와는 사실상 정반대의 의견입니다. 이를 근거로 강원도와 삼척시는 정부에 원전 철회를 강력히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출처 - 강원일보
하지만 이런 시민의 뜻에 반해 정부는 삼척 원전을 강행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원전 유치 반대라는 압도적인 주민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산업통상자원부는 이 투표가 법적 효력이 없다고 밝히며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주민투표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겁니다. 삼척시는 정식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원전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공식적으로 요구했으나 선관위는 원전이 국가사무로 주민투표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내 거부했습니다.
지역의 안전을 위해 그곳에 사는 주민의 뜻을 물어 따르겠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요? 2012년 10월 석탄화력발전소 유치를 추진하던 경남 남해군이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사업을 백지화한 전례도 있는데 말입니다. 반핵을 기치로 이번에 당선된 김양호 삼척시장과 삼척시 의회까지 만장일치로 원전 유치 철회를 정부에 요구한 데다 주민의 뜻까지 모였는데 정부는 지방자치와 민의를 무시하고 그저 원전 건설을 강행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삼척 원전 유치는 애초에 조작 의혹이 커
2011년 삼척 원전 유치에 결정적 근거가 되었던 삼척 원전 유치 신청 서명부. 당시 삼척시 유권자 5만 8339명 중 96.9퍼센트에 해당하는 5만 6551명의 서명이 담겨 있어 삼척 시민이 원전 유치에 열렬히 찬성한다며 삼척원전유치단체가 국회와 청와대, 산업부, 한수원 등에 제출했던 자료입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이 서명부와 관련해 조작 의혹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주민들의 동의를 받고 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대리, 중복, 위조 서명하여 날조된 서명부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척 원전 유치가 결정된 후 이 서명부가 절묘하게도 사라져서 그동안은 사실관계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출처 - 아시아뉴스통신
행방불명되었던 삼척원전 유치 신청 서명부가 최근 정의당 김제남 의원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실체가 드러난 서명부에는 한눈에도 동일인이 일괄 서명한 것으로 보이는 대리 서명이 다수 발견되었고, 신상 정보가 빠져 서명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허위 기재도 상당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냥 동그라미만 친 서명부도 찬성으로 인정했다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원전 유치로 돈 좀 만질 것 같은 일부 세력과 원전 확대 강행을 천명한 정부의 이해가 맞물려 벌어진 더러운 수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작된 서명부에 근거를 둔 삼척 원전 유치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됨이 마땅합니다. 서명부가 조작된 것임은 이번 주민 투표를 통해 정반대의 결과인 압도적 유치 반대가 나온 것으로 명명백백히 증명되었습니다.
원전 마피아부터 척결하라
2014년 국정감사가 시작된 가운데 부실한 원전 안전과 비리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수력원자력(주)의 비리를 보면 가관입니다. 소방차 기름을 훔치다 적발되거나 사택관리비를 횡령하고 부하 직원에게 향응을 제공받은 간부가 생기는 등 불법 행위가 도를 넘었습니다. 더욱이 정작 중요한 원전 안전과 비리 척결에 대한 법안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드러난 원전 공공기관과 유관 납품업체들의 유착, 이른바 원전 마피아 문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줍니다.
출처 - 세계일보
후쿠시마처럼 한 지역, 나아가 국가를 궤멸시킬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위험 앞에서 책임 기관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온갖 비리와 불법을 자행하는 한편 유착관계에 있는 업체로부터 향응과 이익을 맞바꾸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고도 원전 마피아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태연합니다. 마치 세월호 참사 이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원전 마피아의 폐해를 목소리 높여 지적하지만, 이를 척결할 법안 처리에는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 원전 마피아 사건이 터진 후 규제 법안이 발의되었으나 법안소위에 올라있을 뿐 심사조차 미뤄진 상태에 있습니다. 기적적으로 올해 통과가 되더라도 시행은 내년 6월이나 되어야 할 판입니다.
출처 - 그린피스
이번 강원 삼척의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압도적 반대로 결론이 남에 따라 삼척시 주민들은 다음 달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또한 삼척과 함께 원전 신규 건설 예정지였던 경북 영덕은 군의회가 나서 주민투표를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 환경단체들은 이 두 지역뿐 아니라 고리, 월성 등 노후 원전 건설 반대 운동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많은 지역이 원전에 전기 수급을 의존하고는 있지만 그 이전에 원전은 지역주민의 생존과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안전을 무시할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히 목도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며, 민주주의제를 채택한 이상 투표로 결정된 민의에 따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대에 어떻게 민주국가 운운하겠습니까. 이번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 결과를 놓고 우리는 후대에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삼척의 투쟁은 이제 지역만의 싸움이 아니라 생명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국적인 움직임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