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과 닥터후의 각본가가 말하는 혁신과 지혜

세계 3대 SF 영상물 중 하나로 알려진 <닥터후> 시리즈와 세계 최고의 탐정물인 <셜록 홈스>를 공히 오늘날에 부활시킨 각본가이자 제작자 스티븐 모팻(Steven Moffat)이 아내이자 제작자인 수 벌츄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서울디지털포럼에서 강의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요, 생각비행이 그 현장을 찾아가 봤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닥터후>와 <셜록>을 부활시키다

<스타워즈> <스타트렉>과 더불어 세계 3대 SF 영상물로 알려진 닥터후는 1963년 첫 방송을 시작한 영국의 SF 드라마 시리즈입니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방영되고 있는 SF 드라마 시리즈죠.

출처 - BBC

<닥터후>는 '닥터'라고 알려진 외계인이 지구인 한 명과 전화박스 모양의 타임머신인 타디스를 타고 여행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지금도 시즌을 갱신하며 계속되는 인기 시리즈지만 1989년에 위기를 겪었습니다. 20년 넘게 방영되다 보니 소재 고갈과 시청률 하락으로 휴방에 들어갔던 것이죠. 십수 년의 공백을 깨고 2000년대 들어 이 <닥터후> 드라마를 부활시킨 사람 중 한 사람이 각본가인 스티븐 모팻입니다. <닥터후>의 손꼽히는 에피소드인 '공허한 아이(The Empty Child)' '깜빡임(Blink)' 등의 각본을 써서 휴고상과 영국 아카데미 최고작가상 등을 휩쓸기도 했죠.

출처 - BBC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탐정이자 한국에서 수많은 폐인을 양산한 영국 드라마 <셜록>은 또 어떤가요. 스티븐 모팻은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빅토리아 시대 사람인 셜록 홈스와 왓슨을 21세기 현대에 들어맞는 캐릭터로 완벽히 되살려냈습니다. 새로 시작된 TV 시리즈 <셜록>에서 왓슨은 크림전쟁이 아닌 이라크전쟁에 참전했던 군의관이며, 일기 대신 블로그에 글을 씁니다. 이 시리즈에서 셜록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무명 배우에서 세계적인 대스타로 발돋움했고 왓슨 역을 맡은 마틴 프리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티븐 모팻은 SF에서 탐정물까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장르 영상물을 2개나 부활시킨 사람인데요. 그런 사람이 서울디지털포럼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참으로 기대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영국 드라마는 영국답게, 한국 드라마는 한국답게


서울디지털포럼 2014 이튿날인 5월 22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셜록 홈즈, 다시 태어나다: 혁신적 지혜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SBS 8시 뉴스>의 김성준 앵커가 셜록 홈스 복장으로 등장해 진행을 맡았고, 무대 한쪽에 설치된 221B 문을 열고 스티븐 모팻과 수 벌츄가 등장했습니다.

스티븐 모팻은 <닥터후>의 책임제작자 겸 수석 작가이며, <셜록>의 공동 크리에이터이자 책임 제작자 겸 작가입니다. 수 벌츄는 스티븐 모팻의 부인이자 셜록의 제작자입니다. 이들이 무대로 걸어 나온 문에 적힌 221B는 셜록 홈즈가 사는 베이커가에 있는 하숙집 주소죠.

"왜 셜록을 만들기로 했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한국을 정복하려고요"라고 대답하며 스티븐 모팻은 특유의 영국식 조크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답변은 위트가 섞여 부드러웠으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창작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써야 하며 그 나라 특유의 문화를 담는 편이 낫다고 발언한 부분입니다.

아시다시피 <셜록>은 스티븐 모팻과 배우인 마크 게이티스가 셜록 홈스 원작 소설의 영광적 팬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드라마입니다. 그들이 <셜록 홈스>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이제 현대에 맞춘 새 드라마를 누가 만들 때가 됐는데... 라고 매번 얘기하자 부인인 수 벌츄가 "그럼 당신들이 만들지그래?" 하고 등을 떠밀어 <셜록>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국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자: 세계적인 작가이신데 글로벌한 공감 요소는 어떻게 찾는가?

스티븐 모팻/수 벌츄: 예전에는 실패한 적도 있으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해 줘서 현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만든다. 제작 시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기보다 자국에 초점을 맞춰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무대에서 사람들이 영국적인 코드를 좋아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자국의 코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국적 요소가 보고 싶으면 영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적 요소가 보고 싶으면 한국 드라마를 볼 것이며, 미국적 요소가 보고 싶으면 미국 드라마를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미국 드라마 <24>가 이번 시즌에 무대를 영국 런던으로 옮겼는데 영국 드라마연 하려는 점 때문인지 재미가 예전만 못 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글로벌 시장을 노린답시고 무미·무취한 상품들만 찍어내는 문화 시장에 일침을 가하는 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하나 친절히 영어로 옮긴 원더걸스의 <노바디>보다 철저하게 한국적인 코드로 일관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에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뒀죠.


내가 재밌는 것부터 발견하고 동료와 함께하라
 
스티븐 모팻의 성공의 근원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인기를 얻고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겠다는 열정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얘깁니다. 모팻 자신도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좋아하는 것, 재밌어 하는 것을 만든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닥터후>와 <셜록 홈스>가 그를 각본가로 성장하게 했고 나아가 그 시리즈를 부활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하자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학생들의 어린 시절에 주입식 공부만을 강요하며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자체를 막기 바쁩니다. 모든 것을 대학 이후로 넘기면서 아이들이 훗날 상상력과 창의력의 꽃을 피울 씨앗을 사전에 다 짓밟고 있는 겁니다. 좋아하는 것을 금지당한 채 비슷비슷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닥터후>나 <셜록>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요? '게임중독법'이란 악법으로 최대 수출 문화 산업인 게임을 죽이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인 만큼 스티븐 모팻의 이야기를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티븐 모팻의 부인인 수 벌츄의 발언을 통해 동료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셜록>을 만들면서 각본은 스티븐 모팻이 쓰지만, 실행은 주로 제작자인 수 벌츄가 한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출처 - SBS


스티븐 모팻: <셜록> 각본을 쓰는 중에 비행기가 등장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각본을 쓰다 이렇게 말했죠. 이번엔 비행기가 필요하겠는데?

수 벌츄: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비행기? 그래. 알았어. 잠깐만. 섭외할 수 있나 알아보고... 예비까지 2대 준비할게.

두 사람은 부부이지만 다른 이들의 성공담을 들어보아도 서로의 장점을 증폭시켜주고 단점은 커버해주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그저 생각에 그쳤다면, 무엇이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나 현실화할 멋진 이야기가 없었다면, 과연 <셜록>이라는 재미있는 시리즈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서로 돌보는 동료 관계의 중요함은 백번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이었던 혁신과 지혜의 관계도 이 동료 관계를 달리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티븐 모팻은 둘 사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지혜는 우리가 뭘 필요로 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혁신은 그 필요로 하는 것을 가져다준다고 말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혁신이 의미가 있으며 혁신 없는 지혜는 공허할 뿐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출처 - SBS

이외에도 <셜록> 시리즈의 주인공인 셜록 홈스처럼 한 장의 사진을 놓고 실제로 추리를 하는 '셜록 놀이'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스티븐 모팻과 수 벌츄는 협업에 어려움은 없지만 작업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너스레를 떨어 좌중을 흥겹게 했습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강의를 마치고 스티븐 모팻과 수 벌츄는 사인회로 한국의 팬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보다 재미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셜록>에서 뭔가를 꼭 추출하려 한다면 사람의 사고력과 우정이라는 메시지를 봐주기를 바란다고 하더군요. 스티븐 모팻의 창작론을 곱씹으면서 <닥터후>와 <셜록>의 새 시즌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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