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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제주4.3의 시대적 아픔을 다룬 영화와 다큐

by 생각비행 2014. 4. 4.
2014년 4월 3일은 첫 국가기념일로 치러진 제66돌 4.3희생자추념일이었습니다. 제주4.3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넋을 달래는 4.3희생자추념식은 이전까지는 자치단체에서 치렀습니다. 70년이 다 된 지금 국가기념일이 되었다는 건 다행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통합진보당 도당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한 일은 뒤늦게나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을 사죄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통진당은 "오늘 진행된 제66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은 과연 국가가 봉행하는 추념식과 자치단체에서 봉행하는 위령제의 차이가 무엇인지 전혀 구분이 안가는 행사였다"며 "오히려 기존 위령제보다 못한 국가추념행사였다"고 혹평했다. 통진당은 "국가의 이름으로 봉행되는 4.3희생자추념은 분명한 반성과 더불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분명한 다짐이 있어야 한다"며 "오늘 추념식에서 국무총리는 '제주는 이제 아픔을 말끔히 씻었다'는 말로, 알맹이 없는 4.3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고 지적했다.

 
출처 - SBS

정부가 우선 정비하기로 했던 제주4.3사건 유적 19곳 가운데 11곳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6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정부 지원은 2010년부터 끊겼습니다. 이제야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첫 추념식에 박근혜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대체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날 정부대표로 참석한 정홍원 국무총리는 뜬금없이 이제 제주의 아픔이 말끔히 씻겼다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습니다.

역사적 아픔을 아직 씻어내지 못한 제주로 3박 4일 동안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은 정작 이날이 무슨 날인지 알지 못합니다. 4월 3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묻자 식목일? (수학여행에서) 집에 돌아가는 날? 잘 몰라요. 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반쪽짜리 국가기념일에 젊은이들에게 점점 잊히는 제주4.3사건... 아쉬운 마음에 이번 주말에 제주4.3사건을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소개합니다.


<레드 헌트>, 제주도판 홀로코스트를 폭로하다

출처 – 조성봉 감독의 유튜브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은 나치나 일제에 의해서만 자행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남단 제주도에서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 군정 치하이던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이 일으킨 무장봉기를 군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도민 최소 3만 명이 죽음을 당한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5월 10일 남한은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민감한 때에 일어난 사건을 미 군정은 좌익 공산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뒤로 제주4.3사건의 실체는 은폐됐습니다. 오랜 침묵의 틀을 깨고 조성봉 감독은 <레드 헌트>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대중에게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1996년에 공개된 <레드 헌트>는 1992년 북제주군 조천읍 구좌면의 한 굴에서 11구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부터 다룹니다. 조성봉 감독은 이들은 굴 밖에서 토벌대가 피운 연기 때문에 질식해서 죽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후 다큐멘터리는 제주4.3사건의 본질을 미 군정 보고서, 당시 신문 보도, 연구자들의 학술적 설명, 목격자 인터뷰, 다양한 자료화면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결국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제주4.3사건의 진실이 빨갱이 사냥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레드 헌트>의 앞길은 부침이 심했습니다. 1997년 이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려던 인권영화제의 서준식 집행위원장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 의해 이 다큐멘터리가 국가의 존립, 안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판시가 나와, 제주4.3사건의 진실 규명과 표현의 자유를 재확인한 중요한 선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성봉 감독은 이후로도 제주도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강정 해군기지 건설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구럼비–바람이 분다>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조성봉 감독이 페이스북에 제주도와 자신의 깊은 인연을 이야기한 내용을 2013년 4월 4일 기사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기사: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 24] 4.3은 말한다)

<비념>, 4.3과 강정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출처 – 전주국제영화제 유튜브

제주시 애월읍 납읍에 살고 있는 강상희 할머니는 4.3으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2013년 해군기지 문제로 떠들썩했던 강정마을의 시위 현장에는 '4.3의 원혼이 통곡한다' 같은 글귀가 적힌 수많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시간은 다르지만 제주4.3 사건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문제가 큰 맥락에서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주얼 아티스트인 임흥순 감독이 2년 4개월 동안 담아낸 제주의 모습, <비념>은 4.3사건부터 강정마을까지 제주도에서 현재 진행형인 슬픔을 카메라에 오롯이 담아냅니다. 제주도의 생활 모습과 풍경 곳곳을 담아내어 제주도가 아름다운 관광지임과 동시에 현대사의 비극으로 만들어진 큰 무덤임을 묵묵히 풀어냅니다. <비념>은 주장하는 영화라기보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다가가는 영화입니다. 제주도 사람이 일생을 통해 겪은 제주도의 풍경을 통해 말이지요.


<지슬>, 세계가 인정한 제주4.3사건 영화

출처 – Daum 영화

2003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으로 사과한 지 10년 만에 나온 영화 <지슬>은 제주4.3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의적 성격의 영화입니다. 제주도 말로 감자를 뜻하는 말인 '지슬'은 제주도 출신 감독인 오멸이 제주 사람들과 함께 찍은 지역 밀착형 영화입니다. 그 때문인지 제주4.3사건이라는 비극을 다루면서도 역사성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흑백화면 속에 대단한 영상미와 해학을 담아내고 있는 걸작입니다.

<지슬>은 제주 주민과 토벌군이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그날을 살아야만 했던 모든 사람의 모습을 하나하나 세심히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구성조차 제사를 연상시켜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제주4.3사건으로 희생된 모두의 원혼을 달래는 씻김굿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습니다. 인류애적인 감성은 만국 공통인지 그해 1월 세계 최대의 독립영화 페스티벌인 제29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최고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습니다.


끝나지 않은 그날, 제주 4.3

4월 3일은 이토록 가슴 아픈 날이건만 그날의 일을 여전히 폭동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도 사회 중추부에 말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제주 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3일 66주년 희생자 추념식이 첫 정부 주관행사로 치러진 가운데 법원내부통신망에 4.3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한 글이 올라와 파문이 일고 있다. 3일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법원내부통신망인 코트넷에는 '폭동을 항쟁이라 부르는 기막히고 비통한 현실'이라는 제목이 글이 게시됐다.


좌익이란 소릴 들은 한 명의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제주4.3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한 후, 우익이란 소릴 듣는 한 명의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 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음에도, 사람들의 인식은 그리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주도의 4월 3일이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날은 언제쯤 올까요? 답답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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