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 - 사랑의 승자 3] 독서광

독서광

좋은 문학작품은 메말라가는 정서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정신에 활기와 탄력을 주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김대중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알겠지요?
오 기자   기자, 특히 사진기자들도 아주 바쁩니다. 이리 보내지고, 저리 보내지고…….
 김대중  서로 다 해야 할 일이지요. 국민을 위해서.
오 기자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나요?
 김대중  그럴 시간이 있나요. 하지만 그냥 서재에 넣은 책은 없습니다. 대충이라도 훑어는 본 책들입니다. 읽은 책이 상당수 됩니다.
오 기자  도서관에 들어온 기분입니다.‘문학’예술’철학’종교’처럼 색인표가 있고, 책마다 번호가 붙어 있던데, 누가 하신 건가요?
 김대중  내가 직접 한 겁니다.

사진을 찍기 전, 비서가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동교동 집 지하엔 서재가 있다. 그의 서재를 두고 나는 두 번 놀랐다. 예전에 중학생 시절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났다.‘서재엔 김대중의 개인 금고가 있다.’ 이걸 찍을 수 있게 되다니, 아니 찍게 놔두다니, 해서 놀랐다. 다음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책에 놀랐다. 옆으로 밀 수 있게 만든 겹겹의 책장은 비디오 가게 진열장처럼 한 권이라도 더 쌓아놓으려는 소장자의 뜻이 엿보였다. 책은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작은 도서관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무려 40여 분간 그곳에 혼자(약 30분쯤 지나니 광고 회사에서 일한다는 여자가 한 명 들어왔다) 있었고, 나는 당연히 서재를 뒤졌다. 그의 금고를 찾으려고. 하지만 다른 데로 옮겼는지, 안 보이는 곳에 숨겨뒀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40여 분간 기다리던 나에게 김대중 씨가 꺼낸 첫 얘기가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알겠지요?”였다. 적어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들을 줄 알았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기자 앞에서 싹싹하게 구는 정치인과 비교하면 역겨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인 금고는 그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했다. 기자들은 없는 금고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며, 어떻게 그런 기사를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말도 했던 것 같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71년에 김대중의 금고에 대한 기사는 무척 자주 보도되었더랬다. 모두 부정적인 기사였는데, 언론에 의해 형성된 부정적인 이미지가 여태껏 국민에게 고착되어 있지 않나 싶다. 언론의, 언론에 의한, 언론을 위한, 질 나쁜 보도. 언론이 자만을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권력을 경계해야 할 언론을 제4정부라고 일컫기도 하니, 권력기관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인 셈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배운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되었건만, 언론과 언론을 보는 국민의 의식이나 인식은 왜 이리도 후진만 하는지.

오 기자  1980년에 전두환의 정치적 야욕이 김 후보님을 사형 선고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무기로 감형은 됐지만, 그때 망월동에 억울하게 묻힌 그분들과 운명을 함께 하셨다면 과연 국민이나 역사는 김대중이란 인물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김대중  우리 국민은 죽음에는 관대하지요. 지금까지 제 곁을 맴돌았던 모함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 지금 살아 있으니, 삶의 의미를 새기며 참으로 국민과 역사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오 기자  죄송합니다만, 정말 죄송스러운 질문이지만, 만일 그때 사형을 당하셨다면 망월동에 모셔졌을까요?
 김대중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에게 별 질문을 다 합니다. 다 찍었지요? 그만합시다. 내가 무척 바쁘다는 걸 보셨잖아요.
오 기자  마당에서도 찍어야 하는데요…….

그 뒤로 한참 시간이 흐르고 김대중 씨를 다시 잠깐 만날 기회가 생겼다.

오 기자  문득 최근의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강준만 씀, 1995년 발행)이 떠오릅니다. 읽어보셨는지요?
 김대중  그 책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해도 내 이름에 ‘죽이기’라는 듣기 싫은 말이 붙어 있어서 차마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오 기자  김대중과 전라도 사람에 대해 편파적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김대중  네, 알고 있습니다. 고맙지만 왠지 꺼림칙합니다.


인동초의 삶을 지탱한 양분

사진 뒤로 보이는 엄청난 양의 책이 꽂힌 서재가 인상적입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것을 모두 견뎌낸 덕분에 그의 삶을 '인동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엄혹했던 시대에 고난의 시간을 김대중과 함께한 벗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고인은 독서광으로 유명합니다. "그냥 서재에 넣은 책은 없습니다. 대충이라도 훑어는 본 책들입니다." 하고 기자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는 독서광이었기에 자신만의 정치적 신념을 만들어나갔고, 힘겨운 삶 속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요?

김 대중 대통령은 평생토록 책을 놓지 않았으며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며 "책을 읽기 위해 감옥에나 한 번 더 가야 할 모양"이라고 얘기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실제로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유독 책을 넣어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81년 2월 21일에 청주교도소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말미에 책을 요청합니다.

다음 책을 넣어 주시오.
1) 칸트, 《실천이성 비판》
2) 갈브레이드의 《불확실성의 시대》와 《경제학과 공공무역》
3) 솔제니친의 《암병동(영문)》. 집에 있소.
4) 기타 신앙관계 체험 서적(특히 공산권에서)

1981년 3월 19일 편지 말미에도 책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다음의 책들을 넣어 주시오.
1) 월터 닉, 《프리드리히 니이체》(분도출판사)
2) 〃, 《도스토예프스키》(〃)
3) 〃, 《위대한 성인들》(〃)
4)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문예출판)
5) B. 러셀, 최민홍 역, 《서양철학사》 상·하(〃)
6) 마루야마, 《일본의 현대사상》(종로서적 출판부)
7) 존 힉, 《종교철학》(〃)
8) 최명관 역, 《플라톤의 대화》(〃)
9) 지베스, 《과학정신과 기독교신앙》(〃)
10) W. 리프만, 《민주주의 몰라과 재건》(대한기독교서회)
11) 진단학회, 《한국사》(전7권, 을유문화사)
12) 《일본문화의 원류로서의 비교 한국문화》(삼성)
13) 버클리, 《바울로의 인간과 사상》(기독교문화)
14) 로빈슨, 《신에게 솔직히》(대한기독교서회)
15) 코헨, 《만인의 탈무드》(〃)
16) 노만 제이콥스, 《대중시대의 문화와 예술》(〃)
17) 버논, 《다국적 기업》(현암사)
18) 변형윤,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지식산업)
19) 임종철, 《국제경제론》(일신사)
20) 토인비 저, 강기철 역, 《도설 역사의 연구》(〃)
21) 《신전략 사상사》(기린원)
22) E. 카잔, 《아메리카 아메리카》
23)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문학부문
1) 도스토예프스키, 《백치》《악령》《미성년》
2) 톨스토이, 《부활》
3) 고골리, 《죽은 넋》
4) 까뮈, 《이방인》(신문출판사)
5) 디킨스, 《크리스마스캐롤》(〃)
6) S. 모옴, 《인간의 굴레》(〃)
7) 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
8)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왕문사)
9) 니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인문출판사)
10) 司馬遼太郞, 《德川家康》상·하(〃)

《옥중서신》에서 옮긴 이 내용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가 또 있을까요? 고인은 "독서는 정독하되, 자기 나름의 판단을 하는 사색이 꼭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저자 또는 선인들의 생각을 넓고 깊게 수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김대중 대통령의 독서법을 잘 소개한 글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오늘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역대 대통령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책을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독서의 달인’으로 꼽을 만한 주인공은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저서인 ‘옥중서신’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른바 내란음모사건으로 인한 오랜 수감생활에서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가 섭렵한 서적들은 철학, 경제, 역사, 문학 등의 분야를 두루 망라한다. 대통령 휴양지였던 청남대에 그의 동상이 독서하는 모습으로 세워진 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없지 않다.
특히 그의 독서법에서 특이한 대목은 ‘대차대조 메모법’이라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선 책의 여백에 대차대조표를 그리듯이 왼쪽에는 책의 내용을, 오른쪽에는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고 현실 상황에 대입하곤 했다는 것이다. 책을 읽더라도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
허영섭, 《내일신문》, 2010년 8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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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승자 - 김대중, 빛바랜 사진으로 묻는 오래된 약속



댓글(3)

  • 2011.08.25 22:08

    이정도로 독서를 많이 하던 분이라는건 모르고 있었네요. 대통령이라는 자리,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는 사람이 가져야할 안목과 식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 2011.08.26 13:24 신고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지만 책은 여전히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펴내는 출판사로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 2011.12.12 10:19

    청원'이라는 책도 서재에 담겨있길 바래요. ㅎ 요새 읽는 책인데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고, 볼만하더라구요. 안락사라는 주제에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좋은 기회인듯. 님들도 한번 도전해 보세요. 출판사에 영화랑 책에 대해 자세히 소개 되어 있더라구요. 참고들 하세요. http://blog.naver.com/editor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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