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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사적 제재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기보다 사법 체계 정비해야

by 생각비행 2024. 6. 14.

2004년 고교생 등 44명이 울산에 사는 여자 중학생을 밀양으로 유인해 1년간 집단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울산지검 밀양성폭행사건 특별수사팀은 44명 가운데 10명만 특수강간 및 강제추행 등 혐의로 기소하고 20명은 소년부로 송치했습니다. 합의해준 가해자 등 13명은 기소되지도 않았습니다. 기소된 10명도 이듬해 법원으로부터 소년부 송치 결정을 받아 전과도 남지 않는 보호관찰 처분 등을 받는 데 그쳤습니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범죄 행위에 가담한 이가 44명, 망을 보거나 범행을 촬영하는 등 간접적으로 가담한 이가 75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00명이 넘어가는 직간접적 가해자 중 어느 누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셈입니다. 그런 밀양 성폭행 사건이 20여 년이 지나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한 유투버가 가해자 신상을 폭로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 YTN

 

당시 10대이던 가해자들은 이제 30대가 됐습니다. 한 유투버가 가해자들의 실명, 직장 등을 공개하면서 밀양 성폭행 사건에 대한 관심이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는 결혼해 자식을 낳고 누구는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한 가해자가 근무하던 식당은 불법 건축 문제까지 엮여 문을 닫았고 수입차 전시장에서 딜러로 일하던 한 가해자는 해고됐습니다.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던 가해자 한 사람은 대기 발령됐다고 하고, 또다른 한 가해자가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진 공공기관 홈페이지에는 각종 항의 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출처 - 뉴스1

 

밀양 가해자들이 지금 당하는 일을 사필귀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피해자는 1년 간의 집단 성폭행만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보이지 않는 범인 식별실이 있는데도 형사과 사무실에서 성폭행 피의자 41명과 피해자를 직접 대면하게 하고 피해자에게 범인을 지목하도록 했습니다. 또 한 경찰관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X들이 남자 꼬시려 밀양으로 가느냐. 내 고향이 밀양인데 너희들이 밀양물 다 흐려놓았다. 내 딸이 너희처럼 될까 봐 겁난다"라고 모욕적인 말까지 했다고 하죠. 전학 가려는 피해자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교육청에 항의한 끝에 고등학교로 전학할 수 있었습니다. 가해자 부모들은 피해자가 겨우 전학 간 학교까지 찾아가 고소 취하를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직접 당한 성폭행 피해뿐 아니라 2차 가해까지 피해자가 겪은 고통이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다 보니 유투버의 가해자 신상 폭로로 불이익을 받는 일을 보면서 꼴좋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출처 - MBN

 

하지만 현 상황은 명백하게 사적 제재를 부추기고 있어 우려스럽습니다. 폭로 유투버는 피해자로부터 메일 동의를 받아 가해자들 신상을 공개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현재 여론을 폭발시키고 있는 폭로전에 피해자 본인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첫 번째, 두 번째 가해자 신상을 공개하던 최초 유투버 외에 세 번째 가해자 신상을 공개한 다른 유투버까지 나타나며 피해자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사적 제재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입니다. 진짜인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정보 공개로 애먼 사람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밀양에서 네일숍을 운영 중인 한 시민이 엉뚱하게 가해자의 여자친구로 지목돼 영업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경찰에 진정서를 접수하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출처 - 네이버

 

최초 폭로 유투버가 피해자의 동의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했다는 논란이 일자 "피해자들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라며 관련 영상을 내리고 계정 폐쇄 조치에 들어갔다가 잠적한 지 하루 만인 지난 8일 가해자들의 신상 영상을 다시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영상을 내렸다는 것도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폭로 유투버는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다는 둥 피해자와 연락했다는 둥 그저 자신이 편리한 대로 거짓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가해자 신상 폭로의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일으켜 유튜브 영상 조회수를 높여 돈벌이를 하려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적 제재를 부추기는 유투버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 면은 또 있습니다. 

 

출처 - YTN

 

지난 9일 유투브 통계분석 사이트 녹스인플루언서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밀양 성폭행 가해자 신상 폭로 영상을 올린 유투버의 예상 월수익이 4896만 원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유투브 통계분석 사이트 블링은 최근 한 달 수익을 6667만 원으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밀양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사법기관의 보호는커녕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가해자에게는 적절한 사법적 처벌이 이뤄지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어도 억울하고 화가 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이 사적 제재를 용인하는 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억울한 피해자의 심정에 대중이 공감하는 뜻이 자칫하면 사적 제재를 옹호함으로써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피해자에게 어떤 지원을 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 더 나아가 다시는 이런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해자를 일벌백계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요즘 사람들이 사적 제재라는 이른바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면에는 공적 제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OTT에 공개되어 우리나라를 휩쓴 <더 글로리>나 <모범택시> 등은 공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개인이 사적으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사법계에서는 법원의 사건 처리 속도가 상당히 떨어졌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올해 2월 특허법원의 이형근 고법판사의 기고문에 따르면 1심 형사합의 사건 미제는 2017년 8993건에서 2021년 12630건으로 40% 늘었고, 2년 초과 사건은 398건에서 735건으로 80%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수사기관의 처리 속도가 하락세라는데 1심 형사합의 사건 접수 건수는 2017년 19587건에서 2021 18769건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범죄가 줄어든 것은 아닐 테니 수사권 조정이나 기타 수사기관의 혼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얘기도 나옵니다. 법원 내에서는 판사의 업무를 재조정하자는 제도적 해법에 대한 의견이 계속되고 있고, 심지어 판사들조차 판사 수를 대폭 늘리자는 의견을 내고 있다고 하죠.

 

출처 - MBC

 

제때,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법보다 가까운 주먹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주먹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고요. 현재 유튜브에서 횡행하는 사적 제재가 아무리 시원해 보여도, 한두 번은 정의를 구현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결국 돈을 위한 마녀사냥과 애먼 사람 잡는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 배트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때,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댈 평범한 시민들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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