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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금정굴 이야기> 방송 불가 판정한 EBS, 문화계 블랙리스트 부활하나?

by 생각비행 2022. 9. 7.

이명박근혜 정권 당시 가장 많은 부침을 겪은 곳 중 하나가 문화산업계였습니다. 블랙리스트라는 초유의 사태로 대표되듯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을 고사시키려고 온갖 수단이 동원되던 때였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영화 사전 심의 부활을 노렸고, 세계적인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인 <다이빙벨>을 상영하려고 하자 당시 정권의 하수인이던 서병수 부산시장이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을 자르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천안함 프로젝트가 전주국제영화제에 걸린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웠습니다. 생각비행은 이명박근혜 정부 당시 파행을 여러 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

 

출처 - MBN

 

한국 영화 망치는 박근혜 정부와 영진위 : https://ideas0419.com/533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대통령 탄핵의 강을 건넌 뒤 다양한 창작물을 'K-컬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보급하면서 큰 도약을 이뤄냈습니다. 세계 속에서 '코리아'란 이름이 더는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영화계에 이명박근혜의 망령이 스물스물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공영방송인 EBS가 편성되어 있던 <금정굴 이야기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에 대해 갑자기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출처 – 전승일 감독 유튜브

 

<금정굴 이야기>는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으로 전승일 감독의 작품입니다. ‘한국군과 경찰이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3개월간 최소 10만 명의 국민을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학살했고 미군은 이를 알고도 묵인, 방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EBS는 18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중 딱 한 장면인 이 자막을 문제 삼았습니다. EBS가 방송 불가 방침을 내세운 이유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4조(객관성) 조항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은 충분한 상황과 시대적 맥락을 설명해야하는데 <금정굴 이야기>는 18분짜리 단편이라 객관적 자료 제시나 데이터에 대한 출처 표시가 부족해 시청자들이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유였죠.

 

출처 – 금정굴 이야기

 

<금정굴 이야기>를 만든 전승일 감독은 자신의 SNS로 황당하다며 항의했습니다. 전승일 감독은 시중에 출간된 서적과 위키백과 보도연맹사건 내용 등 참고한 내용의 출처를 모두 밝혔습니다. 게다가 지난 2007년 7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혹은 과거사위)도 금정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한 바 있습니다. 당시 과거사위는 금정굴 사건에 대해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의 고양지역 주민들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고양시 소재 금정굴에서 집단총살 당하였다"며,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 사건'이며,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으므로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골자로 하는 결정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EBS 측이 요구한 공정성과 객관성 모두 학술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이미 증명이 된 사안이었습니다.

 

출처 - EIDF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은 <금정굴 이야기>가 EBS가 주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제 EIDF에서는 상영되었는데 EBS 정규 방송에서는 방영할 수 없다는 겁니다. 감독 측도 같은 작품을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은 문제가 없고 EBS 방영만 불가 처리한 EBS 심의실과 심의위원회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출처 - 금정굴 이야기

 

그래서일까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지난 3월 교체된 EBS 김유열 사장이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고 정치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추측도 파다합니다. 극우가 국부로 추앙하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한 사건이 드러나는 게 불편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EBS 사내 제작 프로그램도 아니고 자기들이 영화제에 일부러 초청해서 건 작품을, 방송 편성까지 마친 상태에서 갑작스레 방송불가 통보를 했다는 점을 납득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출처 - 생각비행

 

EBS가 방송 프로그램에 정치적인 입김이 작용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인 지난 2012년 EBS의 간판 프로그램 <지식채널 e>에서 방송 예정이었던 <지식채널 e>의 '구럼비' 프로그램이 갑작스럽게 EBS 심의실로부터 방송부적합 판정을 받으며 불방된 일이 있었습니다. 구럼비 편은 당시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제작되어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내용과 주변 생태계를 소개하려던 프로그램입니다. EBS 사측은 구럼비가 총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시기라는 이유로 방송부적합 판정을 내렸습니다. 생각비행에서는 그 당시 제주 강정마을을 직접 답사하며 해군기지 건설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전체 기사를 보시거나 생각비행 블로그 시사/보도 카테고리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를 클릭하셔도 전체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 : https://ideas0419.com/category/%EC%8B%9C%EC%82%AC/%EB%B3%B4%EB%8F%84/%EA%B0%95%EC%A0%95%EB%A7%88%EC%9D%84%20%ED%95%B4%EA%B5%B0%EA%B8%B0%EC%A7%80%20%EA%B1%B4%EC%84%A4%EB%B0%98%EB%8C%80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 <공범자들>의 감독이자 1995년 PD수첩에서 금정굴 학살과 발굴 과정을 취재한 최승호 뉴스타파 기자는 이번 소식을 접하고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네요"라는 한탄 섞인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1995년 취재 및 방영 당시에도 학살에 참여한 우익단체의 항의는 있었지만 공중파로 방송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2022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면서요.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여태껏 잘 일구어놓고 자기네 손으로 망치려는 EBS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출처 - YTN

 

시민이 든 촛불로 탄핵의 강을 건넜는데 새로 뽑힌 뱃사공이 떠나온 강기슭으로 배의 방향을 되돌리고 있습니다. 선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팩트' 없이 '선전'과 '선동'을 일삼는 극우 유튜버들에게만 있나 봅니다. 앞으로 몇 년간 펼쳐질 윤석열 정부의 문화 정책을 벌써 걱정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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