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6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병사나 사고사가 아닌 총기 테러로 사망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습니다. 총격을 당한 건 사건 당일 오전 11시 30분쯤이었고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진 때는 오후 5시 3분입니다. 하지만 총격을 받은 시점에 이미 심폐정지 상태에 빠졌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사실상 사망이 점쳐졌습니다.
출처 - JTBC
아베 신조는 10일 치를 예정이던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 지지를 요청하는 유세를 위해 8일 나라시에서 찬조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울려 퍼진 총소리와 함께 등 뒤에 총알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구급차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안 돼 심폐정지 상태에 빠졌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나라시에 거주하는 41세 남성 야마가미 데쓰야가 아베 전 총리의 등 뒤에서 총으로 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언론은 애초 아베 신조가 산탄총에 맞았다고 보도했으나 나무에 총목 부분을 테이프로 감아 만든 일종의 자작 총기로 최종 확인됐습니다. 야마가미 데쓰야는 2005년까지 3년 동안 해상자위대 대원으로 복무했다고 알려졌는데요, 개헌이란 카드까지 동원해 자위대를 일본의 정식 군대로 만들기에 혈안이던 아베가 전 자위대원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아베 신조는 전직 총리지만 상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민당 최대 계파를 이끌며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입니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투옥된 A급 전범이었으나 총리가 됐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외무대신이었습니다. 아베 신조는 외무대신인 아버지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고이즈미 총리 시절 관방장관에 오르더니 2006년 53세의 나이로 일본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 이후 7년 반을 연속 재임하며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되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이처럼 아베는 일본 정계의 성골 집안에서 정치를 시작해 일본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최강 권력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출처 - 뉴스1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일 관계를 나락으로 보내버린 극우파로 알려졌죠. 총리가 되자마자 반좌익, 반자유주의를 선언하더니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행보를 보이며 보수 강경파로서 정치 포문을 열었습니다. 외교, 안보에서는 동아시아를 배제하면서도 미국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매달리며 미일 동맹을 강조했습니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맺은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밀어붙인 원흉이 바로 아베 신조이기도 하죠. 한편 아베는 일본 역사 교과서 내용을 뒤바꾸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혐한 기조를 부추긴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군대를 가질 수 없는 패전국으로서의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자위대를 정식 일본 군대로 명기하여 공격 능력을 보유하려는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출처 - KBS
아베 신조의 죽음은 개헌 반대 조직이나 정치적 신념 등을 바탕으로 이뤄진 정치적 테러가 아니라 개인적 반감이 원인이었습니다. 범인인 야마가미는 특정 종교단체(통일교)를 거론하며 어머니가 심취한 종교단체와 아베 신조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해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습니다. 야마가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고를 나왔으나 어머니가 종교 단체에 빠져들어 전 재산을 바치고 파산한 데 대해 원한을 품었다고 하죠. 경찰조사에서 범인은 원래 종교단체의 리더를 노렸지만 아베가 일본 내에 이 종교가 퍼지도록 지원했다고 생각해 아베 신조를 노리기로 생각을 바꿨다고 밝혔습니다. 야마가미의 동창은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애초에 정치 얘기 따윈 한 적이 없다며 대체 졸업 이후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죠.
출처 - 뉴시스
한 가정의 파탄이 어떻게 국가 최고 권력자의 사망으로 비화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정식 조사가 이뤄져야 할 듯합니다. 우리나라와 악연이 깊은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을 두고 기뻐할 수도 없고 기뻐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선거를 이틀 앞두고 유세하던 정치인이 총기 테러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도 아베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번 사건에 대해 규탄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출처 - 동아일보
총기가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일본에서 총기 테러로 최고 권력자가 사망했으니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총기류를 통제할 상당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세계 외신은 일본 내 총기 테러 사건에 대해 집중 보도했습니다. 미국 CNN 방송은 "아베 신조 피격 사건은 엄격한 총기 규제법으로 전 세계에서 총기 범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인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라고 전했습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가디언》은 "일본은 총기 소유가 '무관용'에 가까운 접근 방식을 가졌다"며 "일본에서 총기 범죄율이 극히 낮은 이유"라고 짚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베 전 총리 피격에 사용된 총기가 집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AFP통신은 코리 윌러스 일본 가나가와대 조교수의 말을 인용해 "일본에서 50~60년 동안 이런 사태를 본 적이 없다. 선거를 이틀 앞둔 상황에서 너무 슬프고 충격적인 일"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중동 지역의 알자지라방송 또한 "일본에서 정치적 폭력은 매우 드물다"며 이례적인 상황을 전했습니다.
출처 - 트위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7월 10일 인터넷 포털 증권토론방에서 "아직 6발 남았으니 일단 용산부터 갈 생각이다"라는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됐습니다. 총을 가지고 용산 대통령실로 윤석열을 찾아갈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냐는 겁니다. 그러자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자수하며 인터넷 농담이었다고 진술하여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긴 했으나 과거 우리 사회에서 트위터에 날린 트윗 때문에 압수수색이 실제로 집행된 사례가 있습니다. 지난 2016년 한 트위터 유저가 "총 맞을 때까지 버티고 있는 건 집안 내력인가요?"라는 글이 적힌 사진을 올리며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인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방탄복, 헬멧 등을 착용한 형사 경찰관 7~8명이 영장 없이 가택수사를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SNS에 올린 정치적 농담에 대해 공권력이 개입한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테러는 당연히 막아야겠지만 현시점에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이 정당한 의견 개진을 막고 시위를 탄압하는 핑곗거리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싶어 우려되는 지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출처 - KBS
더 걱정되는 부분은 아베 신조의 죽음으로 그의 정치적 숙원이 그 어느 때보다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입니다. 지난 10일 참의원 선거에 아베 신조 사망에 의한 동정표까지 몰린 탓에 자민당과 공명당은 압승을 거뒀습니다. 과반은 물론 개헌 의석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지난 8일 사망 당시 유세에서도 이른바 '전쟁 가능 국가 일본을 위한 개헌 의지'를 피력하고 있었던 만큼 국민을 대상으로 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린 것도 사실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출처 - 연합뉴스
아베 사망 직전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의 도발,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안보 위협을 느낀 일본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개헌에 찬성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난 4월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60% 이상의 일본인이 개헌에 찬성한다고 답해 201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고 하죠. 지난해 10월 취임한 기시다 총리가 중간평가 성격인 이번 선거에서 신임을 얻음으로써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습니다.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은 일본 민영방송 TV도쿄 프로그램에 출연해 해당 프로그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아베 전 총리 피격 사망 사건으로 자민당 지지로 바꿨다는 결과가 나온 것과 관련해 "13%가 바꿨다면 아베 전 총리의 마지막 목소리가 국민 여러분께 확실히 전달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베 신조라는 최고 권력자의 사망으로 인해 향후 일본 정치판에 계파별 권력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전쟁 가능 국가 일본'의 등장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속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세계 경제 위기, 그리고 이와 맞물려 이웃 나라 일본의 권력자를 향한 테러까지 발생하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대한민국의 안위를 지켜낼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사라예보의 총성이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의 문제를 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되었듯, 일본에 울린 총성이 어떤 세계 문제로 비화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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