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보도

미국의 퇴행적 판결을 보는 우리의 시각

by 생각비행 2022. 7. 13.

지난 6월 24일 미국은 혼돈에 휩싸였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50여 년 '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 여성 수백만 명이 임신중단에 대한 헌법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에 이뤄진 기념비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이때 대법원은 7 대 2로 여성의 임신중단의 권리가 미국 헌법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로 인해 미국 여성들은 임신 첫 3개월 동안 낙태권을 완전히 보장받았습니다. 이후 3개월은 제한적으로 가능했고 마지막 3개월은 임신중단이 금지됐죠.

 

출처 - JTBC

 

그런데 보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수십 년에 걸쳐 12개 이상의 주에서 임신중단 반대 판결을 내리면서 임신중단권은 서서히 축소됐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미국 내 최고 법률 기관인 미 연방대법원이 임신 15주 이후 임신중단을 전면 금지한 미시시피주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6 대 3으로 합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의 의미는 임신중단이 더는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주별로 정한 주법만으로 임신중단을 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상 법적 권리가 50년 전으로 퇴행한 셈입니다. 보수적인 13개 주는 이날 연방대법원에서 합헌판결이 나올 경우 임신중단을 자동으로 불법화하는 방아쇠법들을 통과시켰습니다. 결국 13개주에서 6월 24일부터 주법에 의해 임신중단이 불법이 되었죠. 이 판결로 인해 미국 내 가임기 여성 3600만 명이 임신중단을 할 수 없게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미국은 둘로 쪼개졌습니다. 보수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은 공화당 보수 세력은 50년 만에 정의가 바로 잡혔다며 반색하는 반면 현 집권당인 민주당 진보 세력은 미국의 여성 인권과 민주주의를 반세기 후퇴시킨 판결이라며 개탄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판결이 비극적 오류라며 각 주에서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는 한편 임신중단이 불법이 된 주에 거주하는 여성이 합법인 주에서 임신중단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진보적인 캘리포니아, 미시간 등 주지사들은 주법에 임신중단권을 명시하기 위한 계획을 즉각 발표했습니다. 임신중단권자들은 이번 판결이 불법적이며 파시즘의 한 형태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출처 - 노동자 연대

 

 이와 달리 트럼프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낸 마이크 펜스는 이번 판결을 환영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모든 주에서 낙태가 중단될 때까지 멈추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보수적인 지지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애초에 임신중단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출처 - 노동자 연대

 

사실 미국 국민 대다수는 임신중단권이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2019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62%는 '모든 혹은 대부분의 임신중단이 허용돼야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불법화해야 한다'는 응답은 38%에 불과했습니다. 2021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은 조사에서도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응답자의 62%는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고 38%만이 '뒤집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미국 국민의 과반 이상은 임신중단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 개인의 권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올해 5월 들어서며 뒤집힐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터져 나왔습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 초안에 로 대 웨이드 판례가 터무니없이 잘못됐다며 폐기를 강력히 주장한 엘리토 연방대법관의 의견이 유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판결 초안이 유출된 것도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만 이렇게까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폄훼할 줄 몰랐기 때문에 파장이 컸습니다. 그런데 결국 판결은 초안대로 이뤄졌습니다. 연방대법원이 과거의 판결을 이렇게까지 뒤집는 건 사상 초유의 일이죠.

 

출처 - 로이터

 

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실마리는 연방대법관의 성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총 9명이고 재임 기간은 종신입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연방대법관을 임명할 필요가 없는 때가 있는가 하면 특정 시기에는 무더기로 연방대법관을 임명하는 때도 생기죠. 트럼프는 재임 당시 연방대법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명을 임명했습니다. 모두 보수 성향이었죠. 이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무게추가 보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가 임명한 3명의 연방대법관은 이번 판결에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쪽에 투표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그래서일까요? NPR과 PBS 공동 여론 조사에서 미국 시민의 57%는 연방대법원이 법적인 판결이 아니라 정치를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법리에 따른 판결이었다는 응답은 36%에 불과했습니다. 또 다른 여론조사에 의하면 1년 전 60%였던 연방대법원의 업무 수행 지지도가 올해 5월 44%로 폭락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로 대 웨이드 판결 초안이 유출된 시기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시민들의 의식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일리노이처럼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주들은 주변 주 여성들에게 피난처가 돼주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혼란이 적지 않은 상황입니다. 임신중단이 불법인 주에 사는 여성이 합법인 주에 가서 수술을 받아도 되는 건지, 그리고 임신중단 관련 약물을 합법인 주에서 사서 불법인 주로 배송받아도 되는 건지 등 다양한 법적 분쟁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결국 법원의 정치적인 판결이 온 나라를 분열시킨 형국이죠.

 

출처 - 서울경제

 

이번 판결이 임신중단권에 초첨이 맞춰져 있어서 그렇지 같이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나온 다른 판결도 퇴행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6월 3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환경보호청에 발전소 온실가스 배출 규제권이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환경부가 환경 보호에 힘쓸 권한이 없다고 판단한 것과 같은 상황이죠. 이로 인해 미국에선 의미 있는 친환경 법안 통과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 앞에서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출처 - MBN

 

바이든 대통령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역사적인 총기 규제 법안에 서명한 일을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획기적인 규제는 아니지만 여야가 초당적으로 총기 규제를 이끈 흔치 않은 사례였죠. 하지만 대법원은 여기에도 딴지를 겁니다. 공공장소 총기 휴대를 규제한 뉴욕주의 총기 규정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겁니다. 지난 6월 23일(현지 시각) 연방 총기 규제 법안이 상원을 통과하던 날, 연방대법원은 주법이 총기 소유를 상당히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사실상 박탈해버렸습니다. 여성 인권, 환경 보호, 총기 규제 등 시대적 요구를 연방대법원이 나서서 하나하나 되돌리고 있는 셈입니다.

 

출처 - 로이터

 

연방대법원에 계류된 다음 사안들도 엄청난 여파를 몰고올 것투성이라 국론 분열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에 찬성한 토머스 글래런스 대법관은 향후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을 포함해 앞선 판례 모두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이는 각각 피임, 동성애, 동성혼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입니다. 과연 미국 사회는 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갈까요? 공정과 정의로 사회를 안정시켜야 할 법원이 판결대신 정치를 하며 나라를 분열시키는 모습이 먼 나라 일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