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잘 쇠셨는지요? 우리나라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설 연휴가 끝났습니다. 설을 맞이하여 유통업계는 각종 선 선물 세트를 내놓았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이번 설 선물 중에 눈에 띈 건 이른바 '김영란법 세트'였습니다. 설 대목을 앞두고 대형 마트에는 부정청탁 및 금풍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는 품목과 가격이라는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요, 이 세트의 가격 상한은 20만 원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가 애초 알고 있던 김영란법이 규정한 금액과 꽤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출처 - YTN
실제로 그랬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코로나19로 소비심리가 얼어붙자 민생경제를 활성화하겠다며 명절이 되면 농축수산물에 한해 선물 상한 금액을 기존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올렸습니다. 한시적으로 인상 방안을 추진했다가 자영업자들의 꾸준한 법 개정 촉구로 올해 설부터 명절마다 금액을 완화하는 개정안이 통과된 겁니다. 애초 김영란법 시행 이후 2년도 안 된 2018년 1월부터 한도를 10만 원으로 올린 전례가 있었죠. 그때 명분은 화환, 조화 및 농수산물 소비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심의 반발을 의식해 경조사비 한도는 5만 원으로 내렸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0년 9월 선물 상한액은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두 배가 뛰었습니다. 이번에도 명분은 코로나19와 태풍 피해로 인한 농축수산물 소비 위축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이라고 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두 배로 올리니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것 같군요.
출처 - 뉴스1
특히 올해는 임시 조치가 아닌 법 개정이 이뤄진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법적으로 완벽하게 상한선이 올라간 것이니까요. 관련 업계 사람들은 환영하고 있습니다. 한우를 비롯해 굴비나 견과류처럼 값나가는 1차 산품들은 숨통이 트였으니까요. 홍삼 같은 가공품이라도 우리 농, 축, 수산물이 50% 이상 들어갔다면 20만 원 상한까지 선물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의 실제 소비 패턴을 보면 대형 마트 3사의 설 선물 사전 예약 판매 실적이 늘었습니다. 10만~20만 원 사이 매출 신장률이 큰 폭으로 뛰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매수 경제가 활기를 띄는 것은 좋은 현상이겠죠.
출처 - YTN
그런데 정작 '공직자에게 선물할 때는 이제부터 20만 원에 맞춰라'라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김영란법 제정으로 겨우 공직자들에 대한 선물과 접대에 투명성이 생기려 했으나 이제 그 의미가 퇴색하고 적정 선물 금액마저 정해주는 듯한 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20만 원까진 뇌물 아님~" 하고 국민을 놀리는 것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비정규직법 같기도 합니다. 비정규직 법은 비정규직을 구제하고자 만든 법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비정규직을 자르기 위한 기준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대중의 반발이 없어서일까요? 국회의원들은 현재 3만 원인 공직자들의 외식 접대비도 5만 원까지 올리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내수 진작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통받는 외식 산업을 살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핑계에 불과하죠.
출처 - 경향신문
중고 물품을 파는 당근마켓에 가보면 설 선물을 중고로 사고파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필요 없는 선물을 처리하겠다는 목적도 있겠지만 중고 선물이나마 구하려고 2~3만 원짜리를 찾아 헤매는 서민들의 애환이 묻어납니다. 반면 20만 원짜리는 받아야 선물이라고 여기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김영란 선물 세트'를 보노라면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기준점이 된 듯합니다.
출처 - YTN
국민권익위에 따르면 김영란법 적용대상자는 251만 명입니다. 법률 시행 이후 2020년까지 법 위반으로 신고된 건수는 총 1만여 건이었습니다. 시행 첫해 1568건에서 2018년 4380건까지 늘어난 뒤 2019년 3020건, 2020년 1761건으로 매년 감소하는 추세인데요, 실제로 제재를 받은 사람은 전체 신고의 6% 수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중 대부분은 과태료 처분으로 끝났으니 실제 형사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과연 김영란법이 실효성이 있긴 한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애써 확립하기 시작한 공직사회 기강 세우기가 무덤으로 들어가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될 일입니다. 김영란법은 꼼수를 위해 만든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설 연휴가 끝난 이 아침에 여러분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