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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도서비행

'거품경제'라는 말을 낳은 사건 - 남해 거품 사건

by 생각비행 2011. 4. 12.
지난 글 :꽃 한 송이가 집 한 채 값?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

지난번에 튤립이라는 꽃 한 송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네덜란드 초유의 투기 사건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영국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투기 사건을 소개해 드릴 텐데요,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라는 곳이 벌인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영국 경제가 몰락의 길을 걸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이었죠.

공공부채 정리를 위해 설립한 회사
남해 거품 사건을 풍자한 그림. 나무에 올라간 사람들이 바다로 빠지고 있다.(출처: 위키피디아)
남해회사는 1711년 영국 토리당의 로버트 할리라는 사람이 설립한 회사입니다. 회사를 설립할 될 당시 영국은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요, 지출 가운데 채무상환이자 지급과 군사비가 재정지출의 9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남해회사는 이러한 영국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자 공공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회사 설립 후 영국정부는 부실 채권과 증권 일부를 강제로 남회회사 주식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국고를 지원한 무역으로 이윤을 창출하여 채무를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스페인과 아시엔토 조약을 맺어 아프리카 노예를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수송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했죠.

하지만 이러한 영국정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밀무역으로 말미암아 스페인과 형성한 관계가 날로 악화했는데요, 스페인이 정한 노예 무역량은 영국이 필요로 하는 양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에 밀무역이 성행했습니다. 더구나 빈번한 해난 사고 때문에 노예무역은 남해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1718년에는 스페인과 전쟁이 시작되어 무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이로써 남해회사의 경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국채를 탕진하여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무역회사에서 금융회사로, 어이없는 변신을 꾀하다
경영이 어려워진 남해회사는 현실을 타개할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1718년 시험적으로 복권을 발행했는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영국에서 복권을 처음으로 발행한 시기는 1694년이었는데요, 10파운드짜리 복권을 사는 사람이 1등에 당첨되면 16년간 해마다 100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당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기간 동안 매년 1파운드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수많은 사람이 복권을 사들였고, 수백만 장의 복권이 팔려나갔습니다. 이러한 복권 열풍에 남해회사도 편승하여 수익을 거둔 셈이죠.

복권으로 큰 수익을 거둔 남해회사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무역회사에서 금융회사로 변신을 꾀한 것이죠. 1719년 남해회사는 거액의 채권 인수 대가로 액면가에 해당하는 남해회사 주식을 발행하는 권한을 얻어냅니다. 남해회사가 가진 무역독점권으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리라는 기대심리가 커지면서 투자자들은 보유하고 있던 국채를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데 사용합니다.

'거품경제'의 원조가 되다
남해회사는 주식을 판매할 때 이상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남해회사 주식가격을 부풀려서 국채와 교환을 했습니다. 원래 남해회사 주식가격이 100파운드인데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200파운드라고 가정해봅시다. 주식과 국채를 같은 가격으로 교환하면 남해회사는 100파운드라는 이익을 얻는 셈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편법도 사용했습니다. 주식 발행 허용 수량은 교환 금액에 의해 정한다는 규칙을 적용한 것입니다. 한 번에 판매되는 남해회사 주식의 최소량은 100파운드분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100파운드분의 주식이 실제로는 200파운드에 거래되죠? 남해회사는 주식을 발행할 때는 액면가로 발행합니다. 그런데 200파운드분의 국채를 준 사람에겐 시가를 적용하여 100파운드분의 주식을 줍니다. 결국 남해회사는 시가로 발행한 200파운드 분의 주식 가운데 100파운드 분의 주식이 남습니다. 남해회사는 이것을 또 매물로 내놓아 시가로 팝니다. 그러면 남해회사는 200파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식 발행을 놓고 장난 아닌 장난을 친 남해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얻었고, 남해회사의 주가는 점점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거품이 낀 것이죠.

남해 회사에 투자했던 유명인들. 좌측 음악의 어머니 헨델, 우측 만류인력 법칙의 뉴턴.(출처 : 위키피디아)

남해회사의 주가가 상승하자, 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급등하는 남해회사 주식은 좋은 투자처로 각광받았는데요,귀족, 부르주아 서민 계층을 불문하고 주식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너나없이 무모한 투자, 아니 투기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투기 열풍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당시 허가제였던 주식회사가 무허가로 난립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

거품의 붕괴, 비극의 시작
남해회사의 거품을 시작으로 많은 회사가 난립하고, 주가 상승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1720년 1월 100파운드였던 주식이 5월에 700파운드가 되더니 6월 말에 이르러서는 1050파운드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영국정부가 규제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거품 회사 규제법'을 만들어 무허가로 난립한 회사를 정리하면서 시장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남해 거품 사건을 수습한 로버트 월폴(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순식간에 거품이 꺼지면서 주가가 제자리를 찾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이른바 '남해 졸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산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유명한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남해회사 주식으로 7000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으나 거품이 꺼지자 오히려 2만 파운드의 손해를 보기도 했답니다. 반면 이익을 얻은 사람도 있는데요, 음악의 어머니로 칭송받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남해회사 주식을 매매하여 얻은 이익으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다는군요.

남해 거품 사건이 터지자 많은 투자자가 정치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해회사의 주식을 뇌물로 받은 정치인들이 방만한 경영에 대해 눈을 감아주었기 때문이었죠. 사태가 커지자 결국 당시 수상이었던 스탄호프는 정계에서 물러나 급사하기까지 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수습한 사람은 로버트 월폴이었습니다. 그는 1721년까지 남해 거품 사건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여 다시금 경제를 회복시켰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겐 조사를 느슨하게 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토리당으로 정권을 넘기지 않으려 했던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회계 감사제도의 등장
남해 거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정부는 책임추궁위원회를 꾸리고 조사를 진행합니다. 당시 위원회에 속해 있었던 찰리 스넬은 남해회사의 회계 기록을 자세히 알고 있는 간부가 경영하던 회사인 브리지상회의 장부를 조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브리지상회의 장부에 대한 소견>이라는 보고서가 나왔고, 이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브리지 상회의 장부에 대한 소견>은 세계 최초의 회계감사 보고서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반 대중에게 자금 조달을 하는 사헙 형태인 주식회사는 정당한 제3자에 의한 회계 기록 평가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고, 이로써 공인회계사 제도와 회계감사 제도가 탄생했습니다.

수백년 전 사람들의 모습과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 크게 다를 바 없군요. "인생 뭐 별거 있어? 한탕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나 봅니다.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사회 체계와 법 체계를 탄탄하게 하여 잘잘못을 가리고 사고를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는 일에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적은 노력으로 크게 벌겠다는 심보는 언젠가 화를 부른다는 마음으로 건전한 투자로 경제를 살리고 그 이익을 나누어 가지려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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