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의 장으로 전락한 대학 커뮤니티

“세상 말세다. 예전 같으면 말도 못 섞었을 천민이 쯧쯧.”

 

마치 조선 말이나 일제강점기에나 언급될 법한 말이 2021년 대학가에 나타났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난 4월 14일 고려대학교 학생 커뮤니티 고파스에 올라온 글입니다.

 

출처 - 뉴스1

 

발단은 지난 4월 11일 고려대 세종캠퍼스에 재학 중인 A 씨가 고려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로부터 교육자치국장으로 인준되면서부터였습니다. 고려대 본교인 안암캠퍼스의 총학생회 역할을 하는 비대위 임원을 분교인 세종캠퍼스 학생이 맡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칭 성골인 안암캠퍼스 학생들은 성화를 부렸습니다. 아무리 고대 타이틀을 달고 있더라도 '감히 지방 캠퍼스 천것들이 서울 캠퍼스의 높으신 분들과 맞먹으러 드느냐'는 저급한 발언이 쏟아진 겁니다.

 

“세상 말세다. 예전 같으면 말도 못 섞었을 세종 천민이 고파스에 올라와서 글 싸고 있네 쯧쯧.”

“너희들은 누가 봐도 고대생이 아니다”


“세종 애들은 세종 애들끼리 놀라고 XX, 이번에 요직 하나 세종 XX가 차지했던데, 너희는 누가 봐도 고대생이 아니야 어디서 XX 고대생 흉내를 내고 있어”


“(고대생도 아닌 세종캠 학생을 임원시킬거면) 서울대생을 (임원으로) 시키지 왜 개잡대 XXXX를”

 

상식이 있다면 척 보기에도 어이없는 발언들이죠? 저런 혐오 발언을 일삼는 머리밖에 없는 이들이 어떻게 고대에 들어갔을까 되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는 약과일 정도로 고파스에는 교육자치국장 인준 직후부터 A 씨를 향한 수많은 조롱과 비하, 혐오 발언이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신상을 털어 퍼뜨리는 범죄 행위까지 벌어졌습니다. "서울캠 요직에 세종캠이 들어가는 게 싫은 순 있어도 선은 넘지 말자"는 등 자제를 촉구하는 글도 올라왔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의견은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고대생 커뮤니티에는 혐오와 멸시의 시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출처 - 한겨레

 

A 씨는 고파스에 직접 글을 올리며 서울캠퍼스 학우들의 감정에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회칙에 근거한 정당성은 명시되어 있다며 신뢰를 얻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책임감 있게 활동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인준했던 총학생회 비대위는 손바닥 뒤집듯 3일 만에 인준을 취소해버렸죠. A씨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욕하는 것 같다며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했지만 총학생회도 학교도 고파스의 혐오 발언자들도 마치 없었던 일인 양 뭉개기만 했습니다. 이 고대 사태로 남은 건 한 고대생의 자성 어린 대자보처럼 '학벌주의'와 '차별의식'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 민중의소리

 

사실 대학 커뮤니티가 그들만의 리그이자 차별과 혐오의 장으로 변질된 지는 좀 됐습니다. 이번 고대생들의 커뮤니티인 고파스 이외에도 이른바 '에타'라고 줄여 부르는 에브리타임에서는 사망자까지 나왔을 정도로 극심한 차별과 혐오가 넘치고 있습니다. 에타는 2011년에 만들어져 현재 전국 약 400개 대학 454만 대학생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대 대학생 커뮤니티입니다. 온라인 기반의 익명 커뮤니티이다 보니 누구든 사이버불링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울증을 앓던 서울여대생이 작년 10월 자신의 힘든 심경을 에타에 호소했다가 오히려 약점을 잡혀 "그냥 어서 죽어라"라는 식의 사이버불링을 당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여 세상을 등지기도 했습니다.

 

출처 - YTN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로서 각 학교의 소소한 일상이나 강의, 취업 등의 정보를 나누려는 목적으로 만든 에타가 이제 국가인권위에서 주목하는 대표적인 혐오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에타의 주류문화는 사실상 일베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나 유학생 등 학교 안에서 목소리가 작은 소수자들이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사이버불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N번방 사태 당시에도 에타에는 피해자에 대한 무수한 2차 가해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작년에 코로나19가 확산될 당시에는 중국과 동남아 유학생들에 대한 혐오 발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코로나 재확산의 원인이 성소수자와 노인들이니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이 게재된 적도 있습니다. 고파스에서처럼 에타 내에서 대학 서열화에 따른 지방대 혐오와 비정규직 차별 발언도 난무하는 상황입니다.

 

출처 - 워드클라우드

 

의식 있는 학생들은 몇 번 신고하다 바뀌는 게 없어 포기하고 입을 닫고 맙니다. 뭔가 바꿔보려던 학생들은 혐오주의자들의 집단 신고로 오히려 자신의 계정이 정지되어 에타를 떠나게 됩니다. 혐오 발언을 일삼는 자들이 점점 과잉 대표되며 차별주의자들이 점점 더 모여듭니다. 그러다 결국 에타 전체가 혐오에 물든 커뮤니티가 되어버렸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인터넷 사이트의 일베화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입니다.

출처 - 여성신문

 

하지만 규제와 처벌은 미약한 편입니다. 2020년 3/4분기까지 국내 25개 대학 커뮤니티 게시글을 분석한 결과 600개가 넘는 혐오 표현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만약 400여 개 대학 전체 게시글을 분석했더라면 얼마나 많은 혐오 표현이 쏟아졌을까요?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 정작 에타 운영사는 책임을 회피한 채 침묵했습니다. 보다 못한 여성단체가 에타에서 발견한 혐오 표현 500개를 방심위에 삭제해달라고 신청했는데요, 방심위는 운영사에 자율규제를 강화하라는 권고를 내렸을 뿐입니다.

 

출처 - 민중의소리

 

혐오 발언을 일삼는 학생들이 문제의 근본이긴 하지만 최소한 이를 공공연하게 발설하여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도록 시스템적인 보완이 필요합니다. 현재 정기적으로 인권실태조사를 하는 대학은 절반도 채 되지 않습니다. 혐오 발언이 학교 커뮤니티에 버젓이 게시되어도 학교는 뒷짐을 지고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에타 운영사는 신고 기능만 추가해놓고 돈벌이에 바쁩니다. 결국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체계적으로 혐오 발언을 검출, 제재, 처벌할 수 있는 체계적인 방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최근 20대의 높은 국민의힘 지지율과 이준석을 향한 지지, 점차 수위가 높아지는 각종 혐오 발언을 보면 대한민국이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와대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박성민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을 1급 청년비서관으로 발탁하자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청년층의 반발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출처 - 국민일보

 

각 대학 에타에는 청년비서관 인사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페미니즘 관련 발언을 줄곧 해온 인물을 청년비서관으로 중용하는 것은 20~30대 남성 표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혐오성 발언이 많았습니다. 박성민 비서관의 인사에 대한 공정성을 따지기보다 학벌과 나이,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만 비난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의미한 토론의 장이 형성되기보다는 공무원 시험도 안 보고 1급 상당의 비서관이 됐다는 식의 자격, 자질만이 부각되었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사실 이런 잣대는 남성에게는 적용되지 않죠. 박 비서관 이전에 이 자리에 임명됐던 여선웅(당시 36세), 김광진(당시 39세) 청년비서관은 이런 자격 요건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1급 공무원이라는 지위가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만 보인다"며 "무슨 자격이 필요한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습니다. 1990년생 다큐멘터리 감독 겸 작가 이길보라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성민 비서관 인선에 악플을 달며 여성 혐오를 쏟아낼 시간에 이 사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 나갈지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과잉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혐오 발언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생각비행에서 누차 강조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그 체계적 방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포괄적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요구, 국회는 국민의 뜻을 받들라 https://ideas0419.com/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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