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없는 2021년, 더 개선되어야 할 부분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며 똑같이 암울한 날만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2021년 들어 사회가 나은 방향으로 달라진 점도 꽤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변화로 볼 수 있는 건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고 의료보험, 의료지원 등이 이뤄지는, 온전한 형태의 낙태죄 효력 상실이 아니라는 점은 상당히 아쉬운 대목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2019년 4월 낙태 처벌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낙태에 대한 형사처벌을 규정한 형법 조항은 2020년 12월 31일 밤 12시부로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우야무야 기한을 넘겨 자동으로 사라진 겁이죠. 그사이에 보다 명확하게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입법 과정이 있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처벌과 규제만으로 점철되었던 낙태죄가 사라졌다는 점만큼은 우리 사회가 한발 나아갔다는 의미를 남깁니다.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 67년간 일부 세력들은 낙태죄가 없어지면 세상이 타락하고 가정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낙태죄가 사라진 세상은 그런 염려와 달리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동성동본 결혼금지나 호주제를 폐지할 당시에도 격렬한 반대 여론이 있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가 됐죠. 통계적으로 봐도 인공임신중절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국가와 반대로 합법화한 국가 사이에 임신중절 비율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낙태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효과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정부가 강력히 규제할 경우 불필요한 범죄자를 양산하고 불법으로 위험한 환경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되기 때문에 여성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일 뿐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낙태죄를 폐지한 지 32년이 지난 캐나다를 봐도 그렇습니다. 캐나다는 32년 전부터 임신중단에 관한 어떤 규제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캐나다는 한국보다 낙태율이 낮죠. 일부에서 우려하는 낙태의 남용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낙태에 대한 처벌이 없어진 만큼 경제적 부담이 줄고 안전에 더욱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죠. 임신 중지는 철저히 임신 중인 여성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여성과 의사가 결정하면 주 정부는 비용을 지원할 뿐입니다. 낙태 처벌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도 낙태를 처벌하는 낙태죄라는 방식이 임신중절을 줄이는 데 별로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시대적 인식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데 그간 낙태죄 폐지에 관해서는 정부 내에서도, 정치권 내에서도, 시민 사회 내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있어 왔습니다.


출처 - KBS


정부 부처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입니다. 여성계의 낙태죄 전면 폐지 요구와 달리 임신 14주 이내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입니다. 낙태죄 자체가 의미 없다고 헌법재판소가 판결했고,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도 규제 조항 자체를 폐지하라고 권고하는 상황인데도, 왜 자꾸 정부는 퇴행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신 주수를 한정하고 그 주수를 벗어난 임신중절을 처벌하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건강 보험 적용을 확대하고 낙태 허용 요건에서 배우자 동의를 삭제하고 약물에 의한 낙태를 합법화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나아진 점입니다. 하지만 임신 10주 미만에만 중절 시술을 시행하겠다고 고수하는 산부인과학회의 입장을 보면 여성계의 주장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난항이 예상됩니다.


출처 - 연합뉴스


현 상황만 보면 여성계의 줄기찬 요구를 묵살하려고 한다고 보는 편이 맞겠죠. 정부는 낙태죄 관련 입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임신중지 당사자인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농사 정책을 당사자인 농부들을 빼놓고 멋대로 결정하듯이 말입니다. 서지현 검사(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주수 제한 내용의 낙태죄 부활은 형벌의 명확성, 보충성, 구성요건의 입증 가능성 등에 현저히 반하는 위헌적 법률 개정"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이에 앞서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는 형법에서 낙태죄를 폐지해 여성의 임신·출산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라고 권고한 바 있죠. 그런데도 국무조정실은 여성계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법무부가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권고와 반대되는 형법개정안을 냈고, 보건복지부도 정책자문기구인 성평등자문위원회의 권고와 반대되는 개정안을 내놓았습니다. 정책위원회와 자문위원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을 거라면 자문위를 왜 두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출처 - 한겨레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그래선지 국가인권위원회는 여성의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조항을 그대로 둔 정부의 낙태죄 입법 예고안에 대해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방향으로 재검토하라는 최종 입장을 의결했습니다. 국제사회의 흐름은 형법으로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여성이 임신중단을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출처 - 헤럴드경제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정부안에 대해 낙태죄를 그대로 존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간 사문화되고 위헌성을 인정받은 낙태 처벌 규정을 되살려낸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형법상 낙태죄의 전면 삭제, 모자보건법상 인공임신중절수술 허용 한계 삭제, 약물적 임신 중단 도입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낙태죄 완전 폐지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여성계는 지속해서 유산유도제의 국가 필수 의약품 지정, 임신 중지 관련 의료행위에 대한 건강보험 전면 적용, 출생, 양육, 입양에 대한 법 제도 개선 등을 요구해왔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낙태죄 논란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부장제에 찌들어 있는지, 그리고 여성을 온전한 주체로 대우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남자가 임신을 시키면 실수로 보고 여자가 임신을 하면 몸을 함부로 굴린 결과로 치부하죠. 임신 중지 과정에서 발생하는 책임과 모멸감, 고통을 여성 홀로 짊어지게 강요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일 리 만무합니다. 원치 않는 임신의 상당한 남성의 피임 거부로 생기는 일이 많은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출처 - 슬로우 뉴스


2018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 조사는 보건복지부가 발주하고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를 맡았습니다. 조사 목적은 임신중절 실태 파악 및 여성의 관련 경험에 대한 이해입니다. 조사 대상은 만 15세 이상 44세 이하 여성 1만 명이었고 2018년 3월 28일부터 11월 23일까지 이뤄졌습니다. 조사 결과를 정리한 위 표를 보면 우리 사회가 인공임신중절을 한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비율이 높고, 특히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조사에서 임신중절을 하는 주된 사유는 사회생활, 경제문제, 자녀계획과 관련이 높았습니다. "학업, 직장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가 33.4%였고, 경제 상태상 양육이 힘들어서/고용불안정, 소득이 적어서 등이 32.9%였으며, 자녀계획/자녀를 원치 않아서/터울 조절 등이 31.2%였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남성/남편이 임신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고, 가족이 지원과 응원을 해주는 상황이라면 여성이 굳이 낙태라는 선택을 할 이유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성/남편의 무책임, 가족의 비난,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 때문에 여성이 내몰리듯 도달하는 결론이 낙태라면, 이는 낙태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슬랩


거기에 더해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 당사자인 여성이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렸다면 임신 중지가 가능하도록 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시대의 흐름은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남자와 가족이 정하는 게 아니라 임신 당사자인 여성이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퇴행적인 정부안을 거두고 여성계의 의견을 경청하여 법안을 다시 마련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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