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 배포된 초등학교 성평등 교육용 책 7종 10권이 논란에 휘말리면서 회수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엄마 인권 선언》 등이 그 대상이었죠.
이 책들은 여성가족부가 나다움어린이책 교육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일부 초등학교에 배포한 성교육 서적이었습니다. 2018년부터 여가부와 사회단체, 민간기업이 3자 협약을 맺어 시작된 사업이었는데요, 대상 도서를 초등학교 교사, 아동청소년 문학가, 평론가, 그림책 작가 등 전문가들이 선정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출간된 책 1200여 종 중에서 134권을 지난해 7월 선정했고 시범적으로 전국 5개 초등학교에 책을 배포한 지 9개월이 지났습니다만, 문제가 불거진 건 지난 8월 25일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였습니다.
출처 - 머니투데이
교육위원인 미래통합당 김병욱 의원이 이 책들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에 묘사된 그림이 초등학생들의 조기 성애화를 노골적으로 표현해 성교를 놀이화한다며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다고 했습니다.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은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차원이 아니라 동성애, 동성혼 자체를 미화하고 조장한다고 덧이기도 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자 보수 학부모 단체와 극우 기독교계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아이들을 성애화하는 책을 배포한 여가부를 폐지하라"면서 청와대 청원을 올리는 등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애초 이 책들에 대한 분란을 조장한 것은 지난 6월 전광훈이 이끄는 기독자유통일당 지지 선언을 했던 기독교 극우 단체 중 하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부터였습니다. 여기서 건수를 건진 미래통합당 의원이 논란을 일으킨 것이죠. 전광훈, 극우 기독교, 미통당이 어울려 문제를 제가한 책들이 과연 정말로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출처 - 경향신문
대표적으로 꼽힌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책만 봐도 그들의 모함과는 전혀 다른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50년 전인 1971년에 출간된 책으로, 남녀가 사랑에 빠져 성관계를 맺고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덴마크 문화부에서 아동도서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50년이 넘도록 유아동 성교육 자료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보는 필독서가 됐죠. 덴마크 국립박물관이 ‘덴마크인의 지난 100년 동안의 이야기’ 전시에서 ‘덴마크 역사를 대표하는 100개의 물건’ 중 하나로 선정했을 정도로 덴마크가 자랑스럽게 내놓는 도서입니다. 이런 책을 우리나라 교육위원회는 단순히 야한 책으로 취급해버렀습니다. 이번 논란은 미통당, 극우 기독교, 교총 등 보수 교육단체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의 마인드가 50년 이상 뒤처져 있다는 방증일 뿐입니다.
출처 - KBS
이 책의 저자인 페르 홀름 크누센은 한국에서 책이 세상에 나온 지 50년도 넘은 시점에 벌어진 이번 논란을 전해 듣고는 "구시대적 발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죠. 그러면서 그는 세계곳곳에서 이 책이 출간됐지만 한국처럼 선정성 시비가 제기된 곳은 없었다면서, 그럼 한국 사람들은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할 때 어떤 책을 가지고 무어라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논란이 된 다른 책들은 어떨까요? 《엄마 인권선언》은 국제앰네스티의 추천을 받았고,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은 세계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오랜 세월 교육적으로 검증된 작품들입니다.
출처 - KBS
더 큰 문제는 여가부가 교육위원회의 지적을 받자마자 하루만에 책을 회수하도록 조처했다는 것입니다. 몇몇 극우, 종교 단체가 주도한 선동에 밀려 세계적으로 검증된 도서, 그리고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선별해낸 책에 대한 평가를 하루아침에 뒤집는 게 맞느냐는 비판인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한편에서는 여가부조차 성교육에 대한 기준과 철학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 아니냐 하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정확한 성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성교육을 하자는 현장의 공감대가 형성돼 진행된 사업인데도 해당 도서를 무작정 회수한 조치로 인해 이 시대에 맞는 성교육을 하자는 인식을 퇴행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여성단체들 역시 일제히 반발했습니다. 이번 도서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다양성과 인권을 보장하는 포괄적 성교육은 국가의 책무인데, 여전히 금욕을 바탕으로 한 구시대적이고 폐쇄적인 성교육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정책을 철회한 여가부는 존재 의의를 망각했다고도 비판했습니다. 교육위원회에서 이를 공론화한 김병욱 의원에 대해서도 비판 논평이 줄을 이었죠. 출판협회 역시 여가부의 조치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검증됐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선별한 도서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도 어이없는데, 이를 납작 엎드려 받아들여 마치 문제 도서가 맞는 것처럼 낙인을 찍은 여가부의 조치도 문제가 크다는 입장입니다.
출처 - 한국일보
학부모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여론조사기관 더폴에서 조사한 결과 46.98%의 학부모는 너무 노골적인 묘사는 초등학교 교육 자료로 부적절하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45.65%는 별 문제 없다고 답했습니다. 소수점 자리 정도의 의견 차이일 정도로 찬반 입장이 비등비등했습니다. 한편 학부모들은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대부분 공감했습니다. 더폴 조사 결과 학부모 80.44%가 "예전에 비해 요즘 초등학생들은 굉장히 빠르다. 올바른 성 지식, 관념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출처 - 포괄적 성교육 권리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올바른 성교육이 부재한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부모들이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크면 다 알게 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성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면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아이들을 윽박지른다는 겁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학부모들이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야 할 상황입니다. 성교육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안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다수의 학부모 의견이 일치합니다. 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타성에 젖어 회피하는 것일 뿐이죠.
출처 - 경향신문
서울시 산하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가 2018년 11월 13~18살 청소년 333명(남 124명, 여 199명, 기타 10명)에게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남학생의 27.4%, 여학생의 49.3%가 학교 성교육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교육도 지루하고 피임 등 성행동 준비 및 결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죠.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 청소년의 성관계 시작 평균 연령이 만 13.6세로 드러났고 점점 더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초등학생 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하면 아무런 지식 없이 성관계를 하게 된다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두고 시대착오적인 성교육에 매달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출처 - 한겨레
출처 -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도 계속 되는 n번방 사건의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다수가 20세 미만의 청소년들입니다. 지난 7월 기준 밝혀진 수사 기록에 의거하더라도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1414명 중 442명, 즉 3분의 1이 10대였습니다. 피해자는 3분의 2가 10대였고요. 이처럼 10대는 이미 긍정적인 성행동과 부정적인 성범죄의 주체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앞으로 그 연령은 계속 낮아질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성 친구와 단 둘이 있지 않는다' 같은 성교육이 그 효과는 차치하고 말이 되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크면 다 알게 된다며 방치하는 와중에 어둠의 경로로 성을 경험하게 하기보다는 공인되고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이번에 논란이 된 책의 내용 중에는 일부 번역의 미진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평등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완해야 할 사항이지 교육 현장에서 배제하거나 회수하고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초등학교 성교육 도서와 이를 둘러싼 논란들을 우리 사회가 냉정하게 다시 돌아보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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