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은 홍콩 반환 23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홍콩보안법이 본격 시행된 첫날이기도 하죠. 이로써 일국양제로 아슬아슬 유지해오던 홍콩 자치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홍콩보안법은 외국 세력과 결탁,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리즘 행위 등을 금지·처벌하고 홍콩 내에 이를 집행할 기관을 설치하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보안법은 민주화 사회에 살고 있던 홍콩인들에게는 악몽입니다. 몇 년 동안 조금씩 일상이 무너져왔는데 이제 입이 막히고 손마저 묶이는 형국이니까요.
출처 - 연합뉴스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첫날, 홍콩 곳곳에서 이 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370여 명이 홍콩보안법이 적용되어 체포됐습니다. 이 중 10여 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DNA 샘플을 채취당하기까지 했다고 하죠. 그간 홍콩에서는 성폭행범, 마약 소지 등 중범죄자의 DNA만 채취했다고 하는데, 이번 대응을 보면 벌써 중국 당국의 공포 정치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서는 홍콩 민주인사들의 저서가 보안법 위반 심사를 이유로 도서 대출이 일제히 중단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책만이 아닙니다. 식당이나 벽 등에 시민들이 써 붙인 메모지까지 홍콩 경찰은 조사 대상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으면 보안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항의로 일부 식당은 빈 메모지를 붙여놓기도 했다고 하네요.
출처 - 연합뉴스
21세기에 홍콩보안법과 같은 어이없는 뒷걸음질에 대해 전 세계가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영국, 일본, 독일, 캐나다 등 27개 국가가 인권 침해를 우려해 홍콩보안법 폐지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홍콩에 부여하던 특별 지위를 끝내기 위한 조치를 계속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죠. 그동안 홍콩에 제공한 관세나 투자, 무역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던 특혜를 없애겠다는 겁니다.
출처 - 머니투데이/AFP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 같은 거대 기업은 홍콩 정부에 이용자 정보 제공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중국과 갈등이 심화하는 데 따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홍콩 시민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쪽을 선택한 겁니다.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경우 홍콩 정부에 이용자 정보를 제공한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홍콩 시장에서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틱톡의 홍콩 시장 철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틱톡을 비롯한 중국 애플리케이션을 미국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홍콩보안법이 불러올 파장은 정치, 사회를 넘어 경제적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출처 - 매일경제
미국 의회는 홍콩보안법 발효 몇 시간 만에 홍콩 시민들에게 난민 지위를 주는 홍콩 피난처 법안을 초당적으로 발의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정치적 박해를 받는 홍콩 시민과 가족은 미국에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됩니다.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도 이민법을 개정해 홍콩 시민이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언하는 등 홍콩 시민의 망명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힌 국가가 이미 여러 곳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실제로 이미 해외로 망명한 홍콩 민주화 운동 인사도 있습니다. 조슈아 웡과 함께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했던, 2014년 우산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인 네이선 로입니다. 그는 보안법 시행 다음 날 본인의 페이스북에 "나는 이미 홍콩을 떠났으며, 국제적 차원에서 홍콩에 대한 지지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영국 《가디언》과 나눈 인터뷰에서 "지난해 이후 언론의 자유와 관련한 상황이 악화됐지만 이렇게 가속화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홍콩에 끝까지 남아 싸우겠다고 밝힌 조슈아 웡은 EFE 통신과 나눈 인터뷰에서 "네이선 로의 결정을 이해한다.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홍콩을 위해 싸우려고 떠난 것이다. 우리는 국제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거대한 악에 맞서 함께 싸우던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던 조슈아 웡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출처 - GOODTV NEWS
홍콩보안법에 의해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시키려는 행위, 국가 기관을 공격·파괴·교란하려는 행위, 폭발·방화 등을 통해 사회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행위, 국가 안보 관련 기밀정보를 빼내거나 외국과 결탁해 홍콩과 중국 관련 통제를 요청하는 행위 등이 처벌될 수 있습니다. 4가지 죄형 모두 가장 가벼운 처벌은 최저 3년 이하의 징역형이지만 사안이 중대할 경우 10년 이상 또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2009년 시행된 마카오의 국가보안법이 최고 형량을 30년으로 규정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번 홍콩보안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 수 있죠.
출처 - 연합뉴스
문제는 홍콩보안법에 의해 홍콩 시민만이 아니라 홍콩 거주 비영주권자, 홍콩에 거주하지 않는 외국인조차 처벌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니 홍콩 시민뿐 아니라 중국을 비판하는 민주화 인사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홍콩 시민사회에서는 이미 자기검열이 확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는 과거에 올렸던 자신의 SNS를 삭제하거나 일정이 잡혔던 책의 출간을 취소하는 정도입니다만, 훗날 이 영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출처 - 한국일보/Xinqi Su 트위터
중국 당국이 그토록 원하던 공포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된 형국입니다. 중국은 홍콩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감이 무력감으로 이어져 결국 사람들이 체념하기를 원하겠죠. 홍콩 시민들의 입장에선 몇 년째 시위를 해왔지만,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지기만 하고 중국이 폭력적으로 홍콩을 뒤흔들고 있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최근 현지 여론조사에서 홍콩보안법에 대한 여론은 반대 56%, 찬성 34%로 반대 입장이 훨씬 많았습니다.
[홍콩 경찰이 보안법을 위반할 경우 체포될 수 있다는 경고 문구가 적힌 보라색 깃발을 들고 있다.]
출처 - 홍콩 경찰 트위터
한국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홍콩을 그저 여행 가기 좋은 나라 중 한 곳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한국 내 정치 상황도 언제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마당에 남의 나라 보안법 이슈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홍콩보안법을 홍콩만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인류사적 문제이기도 하고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무차별적인 권력 확장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도 예의주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YTN
출처 - 머니투데이/AFP
중국 당국은 골리앗처럼 너무 거대하고 홍콩 시민은 다윗처럼 너무 작습니다. 그런 홍콩 시민조차 반중, 친중 입장으로 나뉘어 있죠. 홍콩보안법이 시행된 마당에 시민들이 무엇을 하든 당장 눈에 띄는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미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관심이 중요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기자 위르겐 히츠펠터와 택시운전사 김사복에 의해 외국에 알려졌듯이, 국제사회가 홍콩 이슈에 관심을 두고 연대해야만 중국 당국이 조금이라도 눈치를 보게 될 것이고, 홍콩 시민이 그에 힘입어 조금이라도 싸울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이룬 우리가 홍콩보안법 사태를 묵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어느 날 문득 '그래서 홍콩이 어떻게 됐지?’ 하듯 관심을 끊는다면, 우리도 언젠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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