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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KT 화재, 초연결사회에서 디지털 난민이 된 우리

by 생각비행 2018. 11. 27.

지난 주말 KT 아현지사 화재 때문에 네트워크 블랙아웃이 찾아와 서울 서북 지역과 멀리는 경기도 고양시 일부에 이르기까지 통신이 두절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말을 맞아 홍대, 망원, 신촌, 이대, 용산 부근으로 나들이하신 분들과 주민, 이 지역에서 장사하는 자영업자분들은 그야말로 막막하셨을 겁니다. 통신장애로 인한 각종 문제로 거의 사회적 재난에 가까운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중앙일보


우선 KT 기반망을 쓰는 스마트폰의 안테나 신호 표시가 사라지며 전화기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PC에 연결해서 쓰는 유선 인터넷도 마찬가지였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려고 해도 전화도 문자도 인터넷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밖에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가득 모이는 홍대나 신촌 근처의 카페나 음식점 중에 KT 회선을 쓰는 건물에 입점한 곳들은 카드 결제도 안 되었습니다. 결국 현금이 없는 손님을 받기 어려운 희한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요즘은 주문과 결제가 네트워크에 연결된 POS 방식입니다. 이 때문에 통신이 두절되자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들은 고객의 주문을 일일이 손으로 받아 적어야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 소지조차 귀찮아서 스마트폰 페이 서비스만 쓰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현금을 소지했을 리 만무하죠. 그래도 밥음 먹어야 하겠기에 인근 은행에 현금을 찾으러 갔더니 KT망을 쓰는 건물에 있는 ATM은 모조리 죽어버렸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타려고 해도 스마트폰 안에 있는 교통카드가 반응을 안 합니다. KT 화재로 통신이 두절된 곳 일대에서 운전하던 분들은 내비게이션이 멈춰버리는 아찔한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하루하루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 자영업자들의 경우 문제가 훨씬 심각했습니다. 식자재 납품업체와 전화가 되지 않으니 자재를 주문할 수도 배달을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화재 당시 복구에 일주일을 예상하던 전망대로라면 11월이 지나가 버리게 될 수도 있는 문제였죠. 통신 장애가 일어난 지역에 속한 중소기업들은 월말 정산과 출입금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자칫하면 부도가 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망원역 인근 약국에서는 KT 인터넷이 끊기며 병원에서 발급한 처방전이 전달되지 않아 몸이 아픈데도 약을 받을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처 - 한겨레


이번 KT 화재의 심각성은 유무선 인터넷과 함께 전화도 죽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지난 25일 새벽 5시 35분쯤 마포구에 사는 76세 할머니가 119와 통화가 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합니다. 평소 당뇨를 앓고 있던 할머니는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심장이 답답하다며 남편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휴대폰으로 아무리 119를 눌러도 전화가 먹통이었습니다. 놀란 남편은 길거리로 뛰어나가 KT가 아닌 통신망을 쓰는 사람을 간신히 붙잡고 119에 전화를 했지만 늦어버렸다고 합니다. 새벽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연락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겁니다. 원래 휴대폰은 하나의 망에 문제가 있더라도 다른 망을 우회하여 112, 119 같은 긴급호출이 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분의 전화가 불통이었다는 건 휴대폰이 구형이었거나 단말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119에 전화가 제때 됐더라면 할머니가 살 수 있었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 SBS 유튜브


사실 112와 국방부도 직격탄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번 화재로 통신망이 죽은 지역인 용산에 소재한 국방부는 육군본부 등은 군내 직통 연결망을 제외한 내외부 통신망이 모조리 끊겼습니다. 또한 유선망을 KT로 쓰는 112 시스템도 일부 먹통이 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경찰력과 군사력을 마비시키는데 사이버전과 같은 대단한 사건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일개 사기업의 지하 통신구에 화재를 내는 것만으로 전시나 테러에 준하는 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난 겁니다.


출처 - 한겨레


재난이나 재앙으로 불려야 할 이번 통신망 두절 사건은 KT 아현지사 지하에서 일어난 불 때문이었습니다. 아현지사는 서대문, 마포, 용산, 중구 지역 유무선 통신의 대동맥 구실을 하는 곳이라고 하죠. 케이블 부설을 위해 깊고 긴 지하도 관로가 빽빽이 깔려 있어 불을 끄기가 어렵게 되어 있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통신구 화재가 수년 전부터 발생해왔는데 이번에 불이 난 통신구는 관련 규정상 연소방지설비 설치 대상에서 제외되는 곳이어서 화재 예방에 실패한 것이었죠. 한편 통신장애가 발생할 경우 이를 우회할 대책이 마련돼 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해 문제가 더 컸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번 화재로 사람들은 디지털 난민이 되었습니다. 문제의 근원에는 수익과 효율화만을 꾀하며 몸집을 불린 KT 경영진이 있습니다. 공기업인 한국통신에서 시작한 KT는 민영화 이후 수익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통신의 공공성을 도외시하고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하에 현장 인력을 감축하거나 외주로 돌렸습니다. 분산되어 있던 통신 장비를 고도로 집중시켜 장비가 빠져나가면서 비게 된 전화국 건물은 매각하거나 부동산 개방을 하는 임대업에 급급했죠. 그런 실적 덕분에 경영진들은 성과급 잔치를 하기 바빴습니다. 정권 덕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통신 문외한 CEO들은 이런 문제를 더욱 가속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인프라와 백업은 잘 돌아갈 때는 모르지만 문제가 불거지는 순간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지탱하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불이 난 KT 아현지사에 KT 소속 관리자는 없었습니다. 책임자가 없으니 우회 선로 확보를 위한 투자나 안전관리는 뒷전이었겠지요.

 

출처 - 경향신문

 

KT도 문제입니다만 정부의 미흡한 대처도 한몫했습니다. KT 통신망이 죽었는데 KT 핸드폰으로 재난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그게 제대로 가겠습니까? 화재 당시 SK와 LG는 망이 살아 있었던 만큼 재난에 준하는 이 사태 앞에서 LTE 통신망 전체를 열 수는 없었더라도 디지털 난민이 된 사람들을 위해 적어도 SK와 LG의 WIFI 망을 쓸 수 있도록 전면 개방했어야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유튜브


지난 25일 황창규 KT 회장은 화재로 인한 통신 장애와 관련해 사과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소방법을 어긴 것이 없다는 면피성 발언을 해 구설에 휘말렸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장애를 겪을 KT망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이용료 1개월 감면을 보상책으로 들고나와 2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뭇매를 맞았습니다. KT의 작년 매출이 15조 원이 넘습니다. 이번 화재 사고의 책임을 통감한다면 통신비 1개월 감면을 대책으로 내세울 수 있느냐는 겁니다. 더구나 이번 디지털 재난은 생활 전반에 걸친 사회 시스템 마비를 가져왔으니 통신비 감면만으로는 제대로 된 피해 보상이 되지 않습니다. 손님이 많은 주말에 카드 결제가 안 되어 손님을 돌려보내야 했던 자영업자들의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안을 내놓아야 합니다.

 

출처 - 한겨레

 

화재가 일어난 지 24시간 만에 휴대전화는 53%, 인터넷 77%가 복구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영진이 경영 효율화와 비용 절감을 외치며 축소만 하던 현장 인력들이 추운 날씨에 고생하며 이뤄낸 성과입니다. 기업들은 이제라도 현장 전문가와 인프라 유지를 위한 투자 그리고 안전 관리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불을 끈 것도 사람이고 고친 것도 사람입니다. 초연결 시대에 오히려 사람의 힘을 절감했던 주말이었습니다. 이번 화재로 정보화 시대의 그늘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기계에 맡기고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에 너무나 길들어 있지 않았는지 반성할 때입니다. 아울러 큰일이 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만반의 대비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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