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비용'이란 말을 아십니까? 작년 말부터 SNS를 시작으로 암암리에 퍼지기 시작한 신조어입니다. 욕설인 '씨발'과 '비용'이 합쳐진 말인데,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열이 뻗쳐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돈,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더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너무 화가 나서 홧김에 야식 시켜서 나간 돈, 평소라면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텐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사람들과 부대끼기 싫은 마음에 발생한 택시비, 온종일 직장에서 시달린 탓에 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다이소나 마트 같은 데서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느라 지출한 돈 등이 '시발비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홧김이어도 도박처럼 기둥뿌리 뽑아먹을 만한 소비가 아닌 소소한 소비에 머무르는 지출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옛 속담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죠? 말 그대로 '개처럼 번 돈'으로 내가 이 정도도 못 쓰냐? 하는 일종의 반발 심리가 내재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는 시발비용 직전에 유행한 '탕진잼'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아봐야 얼마 되지도 않으니 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나 누리자는 뜻이었죠.
출처 - 머니투데이
신조어인 '시발비용' '탕진잼'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성인남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0퍼센트 정도가 홧김에 돈을 낭비한, 이른바 시발비용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연간 시발비용은 1인 평균 60만 원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집 사고 결혼해서 애 낳아야지' 하고 시대착오적인 얘기를 하는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면 큰 낭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연간 60만 원이면 한 달에 5만 원인 셈입니다.
출처 - 서울신문
오늘날 젊은이들은 요즘 한창 시끄러웠던 넷마블이나 LG의 사례처럼 과로사와 자살로 내몰릴 정도로 극한 스트레스를 받는 근무 환경을 감내하면서 고작 월 5만 원을 자신을 위해 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고도성장기를 지날 때 사회생활을 한 세대가 부어라 마셔라 했던 돈을 지금 시세로 환산한다면, 오늘날 젊은이들이 월 5만 원으로 생명을 한 달 더 연장할 정신적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효율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사실 시발비용도 청년 실질 실업률이 30퍼센트에 달하는 요즘 세대 중에서 취업한 이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입니다. 헬조선의 상황이 얼마나 암담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연간 60만 원인 시발비용을 10년 모으면 600만 원이고, 100년 모은다면 6000만 원입니다. 집은커녕 서울에선 웬만한 전세도 얻기 어려운 액수죠. 그러니 티끌 모아 태산이란 얘기는 요즘 젊은이들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란 자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셈입니다.
출처 - 아시아투데이
이런 가운데 경영계는 작년에 최저임금 1만 원을 전면 부정하며 노동자가 1인 103만 원이면 한 달 생계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아 사회적 분노를 야기한 바 있습니다. 고시원에 살며 집-회사-집-회사로 버스만 타고, 밥은 한끼 3000원 이내로 해결해야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으며, 업무를 위해 꼭 사용해야 하는 스마트폰 비용과 공과금을 내면 겨우 100만 원 안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매달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이걸 온전한 삶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한 끼 3000원 이내면 정크푸드만 먹어야 할 테니 건강을 유지할 수도 없겠죠. 휴지도 안 쓰고 옷도 사 입지 않고 친구를 만나는 사회 활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월 103만 원은 이마저도 학자금 등 대출이 없을 때 겨우 가능한 금액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시발비용, 탕진잼은 젊은 세대에게 '노오력'을 강요하는 사회가 낳은 결과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봤자, 아무리 모아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면 사람들은 순간의 즐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경영계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시발비용, 탕진잼 같은 신조어에 담긴 시대상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바랍니다. 앞선 세대가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생각해보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인지 돌아봐야 할 때이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