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 당시에 불거졌던 '국방부 지정 불온 도서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김진숙 씨의 《소금꽃나무》,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 등의 양서가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한 서적'으로 분류되어 이른바 불온도서로 지정되었죠.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의도와는 반대로 국가 공인 불온도서들은 매스컴을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오히려 불티나듯 팔린 아이러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일화만 봐도 사상 검열이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권의 치졸한 발상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특유의 '창조'적 생각으로 문화계 전반을 살리고(?) 싶었나 봅니다. 청와대가 9473명,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한국일보
지난 11일 국정감사장에서는 청와대가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검열해야 할 9473명의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보냈다는 자료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동안 청와대가 정치검열을 위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루머가 흉흉했는데 사실로 드러난 것이죠.
출처 - MBN
그런데 이 블랙리스트의 기준이 괴상합니다. 지난해 5월 1일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문화인 594명, 2014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명,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때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등입니다.
이명박 정권 때 나온 국방부 불온도서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같은, 웃기긴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작품(도서)이라는 결과물에 대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시국 선언을 했으니까, 문재인을 지지했으니까, 박원순을 지지했으니까'처럼 유치원생 같은 기준으로 정한 겁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냥 '난 네가 싫어' 하고 딱지 붙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해당 기관인 청와대와 문체부에서는 "오해다" "그런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눈가리고 아웅 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블랙리스트 때문에 실제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알 만한 분이 수두룩하죠.
출처 - 중앙일보
문체부의 대본 공모 지원, 우수 작품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된 박근형 연출가의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선정이 확정되었으나 지원금 포기를 종용받았다고 하죠. 선정 직후 블랙리스트가 청와대에서 하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박근형 연출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작품인 〈개구리〉를 무대에 올린 전적이 있습니다.
이윤택 연출가의 희곡 〈꽃을 바치는 시간〉도 문체부 심사에서 1위를 받고도 지원작 선정에서 탈락했습니다. 배후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2014년 광주 비엔날레 당시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시선이 담긴 작품 〈세월오월〉 전시 문제로 홍역을 치른 홍성담 작가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시대가 인정한 빼어난 결과물을 냈음에도 단지 박근혜 정권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다니,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이 얼마나 말뿐인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집요하게 포기를 종용하고 재심사에 재심사를 해도 떨어지지 않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문체부가 전산망에 작가도 모르게 임의로 포기서를 제출하여 나중에 징계를 받은 경우도 있다고 하죠. 이러니 오히려 작가들 입장에서 '뭘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하나' 싶을 정도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출처 - 한겨레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되자 박근형 연출가는 "워낙 어처구니없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예상은 했다"고 심경을 전했습니다. 또한 많은 예술인이 충격보다는 "솔직히 현 정부가 그런 성향이기 때문에 '그럼 그렇지' 하는 분위기다"라고 밝혔습니다. 한 영화 제작자는 "박정희 시대에나 있을 법한 저런 유치한 리스트가 말이 되느냐. 리스트가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세월호, 문재인, 박원순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눌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죠.
자기들 눈에 거슬리면 돈줄, 밥줄 끊는 게 이명박근혜 정권의 더러운 습성이라지만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보면 우리 사회가 대체 얼마나 퇴행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출처 - 페이스북
사람들은 지난번 불온도서 사건 때처럼 이번 블랙리스트를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실린 작가라고 SNS상에 커밍아웃하며 '청와대 공인' 예술가임을 즐기고 있죠. 한편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작가들은 수치스럽다며 박근혜 정권을 더욱 '가열차게 까드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여기서 잠깐. 배우 백윤식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시면 아시겠죠?
출처 - 〈그때 그 사람들〉
지난해 〈다이빙벨〉 상영으로 취소 위기까지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열리게 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 각국의 영화계 인사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성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인 토니 레인즈는 "시장이 이야기도 듣지 않고 본인의 생각만 주장한다.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형편없는 정치인은 빨리 물러나게 해야 한다. 제대로 된 시장을 선출해야 한다. 다음 선거 때 잘 뽑아야 한다"며 거침없이 부산국제 영화제를 파행으로 이끈 서병수 부산 시장과 이명박근혜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토니 레인즈는 "서병수 시장이 어리석고 멍청한 행동을 한 것은 박근혜가 대통령이고, 새누리당이 여당이라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박근혜 정권은 부산국제영화제 20년을 거친 정권 중 좌우를 가리지 않고 특히 더 멍청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평론가 장미셸 프로동 또한 부산영화제 사태는 부산과 한국만의 이슈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라고 강조하며 지난 19년을 거치며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가 단 한 번의 실책으로 몰락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실력 있는 작가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상 대상에서 떨어뜨리고, 이미 자리 잡은 영화제를 몰락 직전의 위기로 내모는 짓이 박근혜 정권이 자랑하는 창조경제의 진상입니다. 이런 망측한 일들을 저지르는 작자들이 문화융성을 위해 미르재단을 설립했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문득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당시 문화 부문 정책이 그리워지는군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출처 - 경향신문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인 법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사상을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옥죄려는 시도는 역사 이래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문화계의 특성상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억압하고 핍박할수록 더 많은 조롱과 풍자가 쏟아져나올 겁니다. 생각비행도 청와대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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